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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4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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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몰입의 축복
눅 2:41-52
*2007년 3월 18일 설교 원고입니다.
평소보단 조금 일찍 원고가 실리는 거죠? 영혼의 보푸라기가 크게 일어나서 집중(몰입)했기때문입니다.
아, 얼마나 행복한지요! 역시 몰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언제나 천국의 행복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도, 이 원고를 읽을 때 몰입하면 내용에 없는 은혜를 천배나 누릴 수 있습니다.확실합니다. 오늘 읽더라도 내일 다시 성령을 의지해서 몰입하여 들을 땐 만 배 나 큰 천상의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몰입(沒入)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일만이 좋은 결실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이던지 몰입하여 하지 않으면 결과가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가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몰입은 그 일을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좋은 결과를 얻게 합니다. 아이들더러 ‘공부해라’ ‘공부해라’할 때 그 <공부>라는 한자는 <工夫>입니다. 이것은 여공(女工)의 공(工)자와 농부(農夫)의 부(夫)자가 합쳐서 된 글자입니다. 이 뜻은 여자가 길쌈을 하듯이, 농부가 농사를 짓듯이 그렇게 전심을 다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공부이고, 그렇게 해야 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몰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늘과 하나님의 뜻에 몰입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빠져 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길 잃은 예수’입니다. 예수가 길을 잃다니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누가복음에만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거기에 어린 예수가 유월절 명절 때 부모 따라 예루살렘에 갔다가 길을 잃고 사흘 동안이나 부모와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길을 잃었다는 말은 왠지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으레 이 이야기를 교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집에서 거한 것이라고 제법 어른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는 구절에서, 또, 어린 예수가 성전에서 선생(랍비)들과 토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의 지혜와 대답에 경탄하였다는 구절에서 생각을 더욱 굳힙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린 예수가 길을 잃은 상태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됩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고 하는 마리아의 말은 필요 없는 잔소리로 칩니다. 그들의 애타는 심정은 무시되고, 오히려 마리아가 예수에게 요셉을 ‘네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려고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고대 사본들 가운데는, ‘네 아버지와 내가’를 ‘우리가’ 또는 ‘너의 친척들과 내가’로 고친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교리적 이해는 본문 자체 안에서도 금세 모순에 부닥칩니다. 끝부분인 51절에 보면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자기 직분을 인식하고 자신을 부모들로부터 구별하려고 했다면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부모에게 순종했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뜻밖에도 교회 강단에서 이런 모순은 쉽게 해결되고 있습니다. 어린 예수가 선생들과 토론을 했다는 구절은 성서주일 같은 때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인용되곤 합니다. 그 구절로 예수의 탁월함과 위대함만을 말하고 부모에게 순종한 부분은 대개 그냥 넘어갑니다. 그리고 어버이주일이 되면 반대로 앞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뒷부분만 강조하여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효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년주일이나 어린이주일이 되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는 맨끝 구절을 인용하고 이렇게 청년은 지혜와 몸이 자라야 한다고 하거나,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설교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데 성서 구절을 임의로 잘라서 갖다 붙여 써먹는 데 익숙합니다. 참 은혜롭기는 한데, 앞에서 말한 모순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교리적인 전제에서 벗어나서 본문 전체를 새롭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본문이 예수의 어린 시절을 미화하거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거죠.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이보다 훨씬 더 거창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영웅 전설에 비해 이 이야기는 지극히 소박합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태어난 지 겨우 1년쯤 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를 독살하려고 보낸 독사 두 마리를 양손으로 꽉 쥐어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위인전기들을 보면 대개가 다 네댓 살에 천자문을 떼는 신동들입니다. 예수는 그런 괴력이나 비상한 머리를 지닌 것도 아니고 그저 선생들과 토론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열두 살 때의 일이니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영웅의 모습이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관심사에 <몰입>하다가 사흘 동안이나 부모를 잃고 지낸 말썽의 주인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이라면 어린 시절에 말썽도 안 피우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길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크리스천의 일반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혹 예수가 부모를 놓쳤다 할지라도 그건 말썽쟁이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 집에 거하는’ 좀 더 근본적인 그의 사명을 의식해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제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작은 사건, 말썽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도 길을 잃은 적이 있구나, 예수도 말썽을 피우기도 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본문을 벗어나는 억측일까요?
대개 길을 잃는 아이의 특성은 뭔가에 집중을 잘 하는 아이입니다. 뭔가에 잘 빠져드는 아이입니다. 어쩌면 어린 예수도 그런 타입이 아니었을까요? 길을 잃은 지 사흘이 되었으면 배가 고프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텐데, 울기는커녕 선생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다니 그 집중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어린 예수가 길을 잃었다는 것은, 그가 뭔가에 빠져서 몰입할 줄 알고 자기를 잃어버릴 줄 아는 타입이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49절의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구절에서 본래 성경 원문에는 ‘집’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원문 ‘en tois tou patros mou’를 직역하면 ‘내 아버지의 일에’라는 의미입니다. 개역의 난하주나 The King James Version 같은 데서 이 번역을 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질문에 대해 예수는 꼭 자기가 어느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절 전체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 속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이런 의미가 됩니다. 예수는 이미 그때 아버지의 일에 빠질 줄 알았습니다. 그 일에 빠져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 한번이라도 우리는 무엇에 몰입하여 길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점차 어른이 되면서, 신앙의 햇수가 늘어 가면서 그 집중력, 몰입을 잃어버리고 점점 건성으로 모든 것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근간에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대개 기성의 것들, 가정, 교회, 학교, 직장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절대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몰입해서 하지 않습니다. 잠시만 정신 못 차리고 자기를 잃었다가는 그날로 해고이고 대열에서 이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삽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 어둠에 묻혀 살았고 산에 들어가면 못 찾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혼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민등록 번호, 학번, 군번, 카드번호, 통장 비밀번호, 아이디, 이메일 주소, 핸드폰 번호 등등 온갖 번호들에 묶여서 삽니다. 수십 년 동안 못 찾던 사람도 컴퓨터에서 자판 몇 번 두드리면 쉽게 찾아냅니다. 어디에도 숨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깊은 산에 가도 핸드폰이 울립니다. 핸드폰 업체가 사활을 걸고 만들어서 선전하는 것이 “어디서나 잘 터져요”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까? 몰입할 수 있습니까? 요즘은 아이들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목걸이나 팔찌에다가 집 주소 전화번호 등을 새겨 놓습니다. 외국에서는 컴퓨터 칩에다가 아이의 개인 정보를 입력하여 이에다가 이식해 놓는다는 말도 합니다.
우리는 잠시도 자신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잠시라도 자기를 잊어보고 싶어서 그렇게들 술을 마신다고 하고 “필름이 끊어졌다”는 말들을 쓰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속으로는 정신이 말똥말똥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을 잃는다 한들 잠시뿐입니다.
나이도 어린 저는 아주 자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합니다. 제 자신도 설교를 다 마친 다음에 왜 내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어른들 앞에서 했을까하고 반성합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얻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 그때, 그 어린 시절이 가난하고 고달프긴 했지만 몰입하고 살았던 시절이구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몰입했던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세요. 인생에서 창의적인 것, 지혜라고 할 만한 것들, 결단의 능력 그런 것은 모두 자기를 잃어버리는 경험 끝에 나오지 않던가요? 사춘기 때 성에 눈을 뜨고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순간 아득하게 추락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혼자된다는 것이 너무나 두렵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아득하게 이전의 나를 잃어버렸을 때, 어느새 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생의 기로에 선 경험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랑에 실패했을 때, 실업을 당했을 때 버스정류장 표시판에 기대어 현기증을 느껴보았습니다. 나는 누군인가 물으면서 한없이 추락하는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잃어버린 다음에 새로운 날들이 꼭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절대로 깨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깨어지는 순간에―그것이 도덕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난 아득한 추락을 경험했습니다. 지옥에라도 떨어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경험은 나를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인도하곤 했습니다.
마치 헤르만 헤세 『지와 사랑』에서 골드문트가 방탕한 생활 끝에 명화를 그린 것처럼,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경험하고 나서 『죽음의 집의 기록』을 쓴 것처럼 말입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늘 눈동자 같이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건 어쩌면 하나님을 간수처럼 감시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우릴 지킨다고 고백하면서 우린 우리 자신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고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요? 길을 잃은 예수. 그를 생각한다면, 우리도 가끔은 자신을 내버려 둘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끔은 무엇에 빠져 자기를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어쩌면 그것이 “내 아버지의 일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를 온 몸으로 체험 한다는 것,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예수에게 몰입하여 살기 때문에 자주 내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잃어버리는 거 아닐까요? 이렇게 아이들이 소꿉놀이 하는 것처럼 흠뻑, 자기를 잃어버린 듯이 몰입하여 기도하고 설교 듣고 찬양한 적이 있나요? 그게 진정 내가 가야 할 길인데,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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