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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고린도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929 추천 수 0 2011.11.06 09: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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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3:12-1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고후 3:12-18
 *2007년 3월 25일 주일 설교 본문입니다.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라 보에티의 <스스로 노예이기를 원하다>라는 글이 나옵니다. 동물들의 본성은 자유인데 반해 그보다 더욱 자유로워야할 사람이 되레 자유보다 굴종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실제로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유를 빼앗기면 이내 죽어버린다. 또 큰 동물과 작은 동물은 사람이 잡으려고 하면 부리, 발톱, 뿔 같은 온갖 무기로 저항하며,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자유를 소중히 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그러다가 잡히면, 자신들이 얼마나 큰 불행을 느끼고 있는지를 생생히 표현하고, 그 뒤에도 잃어버린 자유를 계속 탄식하면서, 자신들의 노예상태에 대해 절대로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렇습니다. 동물들은 정말 야생의 상태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양계장의 닭이나 돼지우리의 돼지를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지만, 하늘로 비상하는 청둥오리 떼, 산 속에서 우연히 만난 다람쥐나 산토끼 같은 것을 볼 때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송어는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어 버립니다. 성질이 나빠서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 그만큼 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들을 잡아다가 어항에 넣으면 튀어나오거나 죽습니다. 본성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들짐승이나 산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생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동물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자유의 기쁨을 줍니다.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바닷가에 가서 넓은 바다를 보거나 하늘을 나는 갈매기를 보면 가슴이 툭  터지는 것도 자유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는 자연이나 동물을 볼 때 아름답고 기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보에티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보다 저급한 동물조차 마지못해 하면서 가까스로 길들여지고 있는데, 원래 자유롭게 살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그 본성을 완전히 바꾸어, 자유에 대한 추억도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구도 다 잃어버렸다는 건 얼마나 괴이한 얘기인가!”

그러면서 실례로 전제군주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길들이는가를 보여줍니다.

“아시리아의 역대 왕과 그 뒤 메디아의 왕들은, 민중이 자신들을 이상하고 거대한 인물로 상상하고 영원히 그 망상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과장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시리아 왕정 하의 민중은 그 비밀 덕택에 노예제도에 길들여졌고, 군주를 아는 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스스로 노예가 되어갔던 것이다. 또 때로는 원래 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왕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두려워했다. 이집트의 초기 왕들은,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반드시, 나뭇가지를 들고, 또는 머리에 불을 얹고 가면을 쓰고 나가서, 민중에게 외경심을 불어넣으려 했다.”

이러한 속임수는 참 우습기도 하고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허술한 함정에도 민중들은 걸려드는 법이라고 합니다. 전제군주로서는 그들을 속으로 비웃고 있을 때가 가장 그들을 속이기 쉽고, 가장 지배하기 쉬운 때라고 합니다. 그러니 전제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복종과 노예적인 봉사뿐만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민중을 길들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모세가 자기 얼굴에 너울을 쓴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4:29-35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이 빛났고, 사람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모세는 사람들 앞에서는 수건을 쓰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그것을 벗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두고, 모세가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이스라엘 자손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본래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나쁜 의도로 그렇게 했다는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도 모세 자신을 비난하려는 의도보다는, 유대사람들의 어떤 맹점을 지적하려고 하는 의도로 이런 해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완고해져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서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14절).

“옛 언약의 책”은 율법서(토라)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옛 언약”, 즉 “옛 계약”이라고 하는 데서 이미 “새 계약”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서의 참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에 율법주의라는 너울을 덮어 쓰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본래 율법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고 자유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율법주의라는 너울은 사람들을 위선과 정죄에 빠지게 하여 사람들을 법 문구와 형식의 노예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율법의 노예 말입니다. 이와 같이 진실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허위의식과 거짓된 권위를 세워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바울은 “너울”이라는 은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모세가 얼굴에 너울을 쓴 것을 비판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위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요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 얼굴에 너울을 씌워서 뭔가를 은폐하고,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거짓 권위를 세우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그들을 노예화한다면, 그 너울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훌륭한 율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서, 그것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노예로 만드는 도구로 변질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마음의 너울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너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비로소 제거될 수 있다고 합니다(14b).

그러면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들은 뭘까요?
지금 여러분을 노예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뭐가 여러분을 붙잡고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까?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 어항속의 금붕어로 살 게 하느냐 말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께로 돌이키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15-16절)

여기서 14절 말씀이 한 번 더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를 강조한 것은 모세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즉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왔어도, 그 너울이 벗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소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해오고, 전통적으로 해오고, 습관적으로 해온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보에티는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원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듭니다.
첫째는 습관입니다.

아무리 혈통이 뛰어난 말이라 해도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가지고 놀게 되고, 처음에는 멍에를 지는 것을 거부하며 소란을 피우지만, 마지막에는 사뭇 자랑스러운 듯이 마구를 달고 유유히 걸어가게 되는, 그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항상 국왕의 신민으로서 그에게 복종해 왔고, 자신들의 조상도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은 당연히 지금의 노예상태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에게 폭압을 가하는 군주의 권력을, 그것이 긴 역사를 가졌다는 이유로 억지로 정당한 것으로 믿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오랫동안 해오던 대로 습관대로 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것을 새롭게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주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를 덮고 있고 너울, 고정관념, 나쁜 습관은 우리가 주께로 돌아서는 행동이 없이는 벗겨지지 않고 고쳐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미 고정 관념이 지배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한국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아서 세상이 어두운 게 아닙니다.  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정관념과 교육받은 것이 너울로 덮여 있어서 성경의 의미를 곡해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결국은 자기들의 아집과 독선을 뒷받침하는 데 써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회가 신뢰를 잃고 무당처럼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께로 돌아서지 않는 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롭게 깨닫지 않는 한 그 너울은 걷히지 않습니다.

이번 영성훈련 11기에 김광근 집사라는 분이 뉴 필그림 즉, 영성훈련원생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외교관으로 이번 주 파나마 대사로 임명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파나마로 떠나기 이틀 전에 끝나는 영성훈련에 들어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가해서 일까요? 시간이 남아서 쉬러 오신 걸까요? 아닙니다. 그는 전심으로 십자가에 의지해서 자신이 묶여 있는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걸 뒤로하고 우리와 같이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유를 얻고 우리보다 조금 일찍, 외무부의 긴급한 훈령을 받고 떠났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파나마에 오시거들랑, Swe11기라는 말만 하면 한 걸음에 1호 외교관 차를 몰고 영접을 나오겠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인 아현교회 이선균 목사님이 부러웠다는 것이 옳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이 묶어둘 수 없는 자유로운 교우를 가진 목사는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십자가 아래서 자유를 얻는 교우들이 많이 생겨나길 소원합니다. 세상 습관의 노예로 살지 않는 교우들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너울은 없는지,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서 나를 얽어매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되어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성경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술 중독도 무섭고 담배 중독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렇게 습관과 인습을 따라서 내가 오랫동안 해 온 경험을 따라서 고정 관념을 갖고서 마음에 너울을 덮고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입으로 읽고 마음으로는 이미 정해진 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토 톰>

여러분,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이 너울이 걷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꼭 만나야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구속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상실된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보에티가 말하는 노예가 되는 둘째 원인은 쾌락입니다.
그는 키루스가 리디아인의 수도 리디아를 점령한 일을 예로 듭니다. 그는 그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고 오랫동안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즉, 그 도시에 술집과 유곽, 극장 같은 유흥시설을 만들고, 주민들에게 그것을 이용하라는 포고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그 뒤 그는 리디아인과 전쟁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가엾은 민족은 거기서 다양한 오락을 만들어내어 그 즐거움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인은 리디아인의 이름에서 따온 ‘ludi’라는 말을 ‘소일’(消日)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작은 새가 그물에 걸리는 것보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리는 것보다, 가느다란 깃털로 입술에 살짝 기름을 발라주기만(가려운 곳을 살짝 긁어주기만) 해도 일반민중이 이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연극과 흥행물, 광대, 격투기, 진기한 동물, 그림, 그밖에 이와 비슷한 온갖 어리석은 것들이, 옛날 사람들에게 노예제도에 대한 함정이 되고, 자유에 대한 보상이 되며, 전제정치를 유지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옛날의 전제군주들이 민중을 그 멍에 아래 잠재우기 위해 이용했던 농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가 식민지에 건설한 화려한 로마식 도시들이 쾌락을 도구로 하여 이런 우민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입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창녀들에게 드나들었고, 성적으로 문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바울은 성도로서 그런 방종에 빠지는 자는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 문제에 보수 입장을 취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노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할 때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면서, 죄와 정욕에 종노릇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롬 6장, 갈 5:1, 13).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습관과 쾌락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17절).

그러므로 바울은 주의 영, 즉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지 않고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로마가 식민지에 이식한 문화가 그 주민을 노예로 만드는 문화였듯이, 오늘날 이 세상의 문화는 쾌락과 물질을 통해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노예 문화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상품을 소비하는 노예, 그들의 노래와 영화에 열광하는 문화적 노예로 만듭니다. 그런 문화로서는,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 마음과 눈에 너울을 씌워버립니다.

오늘 이 세상 문화는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게 놔두지 않습니다. 타락 문화, 물질문화, 나쁜 습관들이 온갖 너울들이 되어서 우리를 가리고 그리스도의 영 안에 있지 못하게 합니다. TV를 보아도 자녀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아도, 우리가 즐거워하고 웃는 것을 보아도, 주의 영 안에서 하는 것보다는 늘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습관이 되어 웃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는 한 우리는 늘 쾌락의 노예, 습관의 노예, 물질문화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18절).

바울은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마음을 덮고 있는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고 더 큰 영광에 이르는 비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이신 주,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이 씌운 너울, 우리 스스로 마음에 쓰고 있는 너울을 힘차게 걷어치우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은 바로 그 너울에서 비롯됩니다. 습관과 쾌락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걸 해결 하려면 김광근 집사처럼 타국의 대사로 부임하는 이틀 전에 끝나는 영성훈련과 같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하였으니, 여러분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오셔요. 자유를 갈망하며, 자신을 구속하는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소망하며 십자가 앞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나세요.

그리하여 우리를 얽어매는 온갖 올무들과 나쁜 습관과 쾌락의 함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마침내 더 큰 영광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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