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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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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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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능치 못할 일이 많은 하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9:23,24)
전투적 구호에만 익숙한 신자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신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는 예수님의 약속도 아마 없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의 집에 마치 가훈처럼 액자로 걸러져 있다.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기도하고 또 믿음을 키운다. 권장할만한 참으로 좋은 일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런 신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어졌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능치 못할 일이 많으니까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 아닐까 싶다.
공부 못해 석차를 올려보려는 학생은 책상 앞에 온갖 전투적 구호를 써서 붙여 놓는다. 반면에 항상 일등 하는 학생은 그런 전투적 구호는 필요 없다. 아예 구호를 붙이지 않거나, 붙여도 단지 소망하는 대학 이름만 붙여 놓는다. 전자의 구호는 열심히 공부하자는 뜻이고, 후자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또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공부해 이루고 싶은 목표만이 문제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성도에겐 믿음을 키우고 기도를 열심히 하자는 본문 같은 구호는 사실상 필요 없다. 대신에 믿음의 기도를 통해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할 비전만 적어 놓는다. 자나 깨나 예수님을 닮으려 하고 맡겨주신 소명에 충성하는 데만 신경 쓸 뿐이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똑같이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처럼 내용이 다르다. 거기다 엄밀히 따져보면 흔히 이해하듯 신앙실력의 질적, 양적 차이보다는 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공사역 중에, 정확히 말해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 하셨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신자는 능치 못할 일이 없고,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는 그러지 못하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선 안 된다. 오순절 전이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이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구원은 물론 사도로 택함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은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즉 엄밀히 말해 신자가 되기 전이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는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도하면 귀신이 쫓겨 가고 사용했던 수건만 얹어도 병이 나았다. 물론 기독교의 초석을 다져야 했기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해야만 했던 초대교회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의 기도가 전과 비교해서 완전히 달라졌다. 아주 담대해졌고 예수님의 약속 그대로 능치 못할 일이 없어졌다.
지금 사도들을 높이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참 신자가 되었다면 우리도 그러하다. 말하자면 사도들이나, 구약 시대 큰 능력의 선지자인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확신하는 신자라면, 그래야 한다.
말하자면 온갖 전투적 신앙구호를 열심히 외우며 노력할 필요 없이 묵묵히 자신에게 주신 소명에만 충성하면 된다. 이미 우리는 엘리야요 베드로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 봐도 그렇지 않다.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해도 소명을 실현하기는커녕 아직도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아니 개중에는 구원여부에 확신도 없는 자도 많다. 과연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도대로 다 응답되면
벙어리 귀신이 들린 한 아이의 부모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러 지 못했다. 그 사정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절)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믿음이 없기에 귀신이 쫓겨 가지 않았다고 한다.
무화과를 맺지 못한 나무를 예수님이 저주하자 뿌리부터 말라버렸다.(막11:20)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래도 되리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답하셨다. 동일하게 믿음과 기도 응답을 연결시켰다.
정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는 일이 없는가? 이 산을 명하면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는가? 솔직히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이런 질문에 선뜻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또 대답이 망설여지니 스스로도 제대로 믿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틀림없이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실 텐데도 그렇다. 그럼 우리도 오순절 전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라고 야단맞지 않겠는가? 왜 우리에겐 정말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것일까?
그런데 사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이 산을 명하여 저리로 옮기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과장법으로 비유하여 그 뜻을 알기 쉽게 강조한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표현 방식이 아니다. 그런 일이 아예 현실과는 동떨어진 비유일 뿐이라 간주하고 전혀 시도도 않거나, 그 정반대로 온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해 기도하면 언제든 산을 이 곳 저 곳으로 옮겨주실 초능력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단지 비유로 간주하는 이성적 신자는 기적은 더 이상 없다면서 아예 구하지도 않는다. 그 반대편은 산이 옮겨지는 초자연적 응답만 열심히 구하다 안 되면 불만과 의심을 터트리기 일쑤다. 기적까지는 아니라도 이 간단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신자가 기도해 산이 정말 옮겨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한국의 신자가 광개토대왕이 차지했던 땅을 회복한답시고 백두산을 만주 끝에다 옮겨놓고 우리 땅이라 선포하면 중국의 신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 다음날로 한라산을 상해 남쪽으로 옮길 것이다. 또 그런 식으로 아침저녁으로 온 산들이 핑핑 날아다니면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에는 3차 대전이 일어나고 전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신자들이 이해하듯이 문자적 해석을 그대로 적용해 보았을 뿐이지 않는가? 결국 요체는 이것이다. 인간이 그런 큰 능력을 쥐게 되면 절대 선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자고 나면 논의 경계를 바꾸는 것(我田引水)이 인간이지 않는가?
신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욕심은 믿음에 크게 상관없이 끝이 없다. 불신자는 그 욕심을 자기 힘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려 한다. 인생의 목적은 같되 그것을 이루는 수단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만약에 신자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뤄지면 하나님이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 자체가 가장 큰 힘을 갖는다. 또 신자가 바로 하나님이 되고 그분은 단지 하늘의 보물을 보관한 창고의 수납계 직원에 불과해진다. 신자가 기도로 출고명령을 올리면 무조건 그대로 창고에서 꺼내어 내려 보내야 하는 그런 직원 말이다. 그건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다.
오래 전 미국 코미디 영화에 나온 내용이지만 신이 기도하는 대로 다 들어줬더니 수만 명이 한꺼번에 복권 1등에 당첨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당첨자 전부가 기도한 자였기에 어쨌든 모두가 신자라는 뜻이다. 정말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면 모두가 각양각색으로 일찌감치 파멸했거나, 전부 감옥에 가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 실제로 미국에서 로또 일등 당첨된 사람들의 그 후 인생을 추적했더니 모두 비참한 실패를 겪었다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부패한 심령을 우리보다도 더 정확히 아시기에 헛된 곳에 쓰려는 욕심에 찬 기도는 응해 주시지 않는 것이다.
믿는 자의 의미부터 살펴라.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제자들이 왜 자기들은 그럴 수 없었는지 물었다. 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였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는데, 그러려면 기도하면 된다는 식으로 아주 단순명료하게 정리해버렸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정리해 놓은 내용을 오히려 너무 철석같이 믿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공식 내지 공리가 되어버렸다. '믿는 자'와 '기도'라는 두 단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나는 믿는 자임에 틀림없고 기도도 그만큼 간절히 했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어야 하지 않느냐 정도로밖에는 사고의 틀이 진전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믿는 자'의 해석에서부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기독교 교인이 된 것과 믿는 자를 동의어로 취급한다. 교회에 출석하여 그 가르침대로 따른다고 즉, 기독교적 신앙행위를 하고 있다고 다 신자가 된 것은 아니다. 교인(敎人)과 신자(信者)는 분명 다른데도 아무 차이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정말 성령으로 거듭난 자다. 자기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임이었음을 철두철미 깨닫고 오직 주님의 긍휼만 소원해야 한다. 세상만 따라갔던 이전의 헛되고 헛된 삶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비록 당장의 실천은 더딜지라도 머리 둘 곳 없이 좁고 협착한 길이라도 그분만 따라가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 차있어야 한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을 넘어 정말 평생을 예수만 주로 모시고 살아야 진짜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종교적으로 판단되는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보는 정체성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그분이 나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직 죄 중에 있을 때에 주님이 내 대신 죽으셔서 나를 살려내셨기에 평생을 두고 그분께 감사와 경배와 찬양만 드리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볼 때는 전혀 믿지 않는 자인데도 스스로 신자라고 착각하는 교인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왜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부득부득 따진다. 마치 남의 집 아들이 찾아와서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탕 안 사준다고 우기는 꼴이다. 그럼 이웃집 아저씨는 처음에는 불쌍해서 한두 번 사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이상한 아이 취급하지 않겠는가? 교회 안에도 처음에는 기도 응답이 몇 번 되니까 자기가 신자인 줄, 그것도 기도의 은사를 받은 믿음이 좋은 신자로 착각하는 자들이 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당시의 의도와 배경을 잘 살펴야 한다. 아비가 아이를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고 땅에 엎드려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게 만들었다.(20절) 주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21절)고 물었더니 아비는 어릴 때부터 그랬고 저를 죽이려고 자주 불과 물에 던졌다고 대답했다.(22절)
그리고는 아비가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절) 라고 간청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아비의 말을 그대로 받아 반문하는 형식으로 야단친 셈이다. 새로운 가르침이나 약속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은 물론 신자에게 은혜가 되지만 당시 정황으로 돌아가면 축복의 약속이 아니었다.
마치 욥기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말씀의 경우와 같다. 문맥상의 뜻이 성경적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 기복적인 말이며, 친구 발닷이 욥을 견책하는 가운데 했던 말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아님에도 많은 신자들이 액자로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주문처럼 외운다.
본문은 오히려 더 명약관화하다. 말씀 자체의 의미만 따져도 꾸중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 너는 내게 못할 일도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그리고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도,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인데 너는 그것조차 모르느냐?"는 뜻이지 않는가?
물론 이조차 모르거나 믿지 않는 신자는 사실상 한 명도 없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은 다 믿는다. 신앙이 없는 자도 하나님이 있다면 전지전능할 것은 너무나 지당하다고 여긴다. 문제는 때로 기도응답이 오래 지체되면 문득 그런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절대 부인될 수 없는 진리이기에 그 의심도 당연히 절대로 잘못된 것이다. 당연히 기도 응답이 지체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이해부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못할 일이 없는 것은 1+1=2와 같은 너무나 확고한 진리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능치 못할 일이 생기니까 자기 믿음에 하자가 있다고 여긴다. 잘 믿긴 하지만 완전하게 믿은 것은 아니라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어떻게 하든 더 열심히 믿으려고만 든다.
그러나 잘 믿으려 열심히 노력했는데 어떤 기도는 응답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음을 체험한다. 결국 믿음에 얼마나 열심과 정성이 따랐느냐에 따라 응답이 달라진다고 추측한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못 받고는 기도하는 자의 믿음의 세기에 따른다고 말한다. 올바르게 잘 믿으면 응답이 잘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강단에서 그렇게 가르쳐지고 있고 신자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열심히 잘 믿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능치 못할 일이 생긴다. 그것도 하나님에게 말이다. 너무나 크고 심각한 오류가 아닌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믿음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아니 인간이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는 것이다. 오류를 넘어서 너무나 참람한 짓이다.
능히 안하는 일도 많다.
마땅히 신자라면 열심히 간절히 꾸준히 무슨 일이든지 기도해야 한다. 또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아주 기쁘게 여기신다. 본문의 경우도 주님이 아비를 견책하는 말씀을 했어도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어주셨지 않는가? 그 믿음의 수준이 아직 어리거나 하자가 있을지라도 주님은 그마저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또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겸비하고도 진정으로 간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열심히 간절히 꾸준히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잘 응답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반면에 정말로 궁급하고 절실하여서 오직 주님의 도움만 소망하기에 열심히 간절히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믿음은 후자의 것이다. 믿음의 본질이 열심히 간절히 꾸준히 기도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얼마나 더 깊이 절감하고 또 그래서 주님을 얼마나 더 절실히 찾느냐의 문제다.
아비가 "주님더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했기에 주님은 그 전제가 잘못이라고 꾸중했다. 그리고선 그 꾸중치는 이유로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이런 전후 사정은 전혀 따져보지도 않고 후반부의 절로 은혜가 되는 말씀만 초지일관 붙들고 있다. 말씀을 이렇게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초보적인 믿음인지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공부 못하는 아들이 형편없는 성적표를 아빠에게 보이면서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성적이 나쁘게 나왔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아비는 “공부 안 해서 성적이 안 좋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아들은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고 노력했다. 어떤 부분에서 잘못되었는지는 전혀 따져보지도 않는다. 이전처럼 무조건 열심히 공부해보아도 결과는 여전히 실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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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다니 대체 말이나 되느냐? 내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기본이지 않느냐?”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심히 믿지(공부하지) 않았으니까, 열심히 믿기로(공부하기로)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무엇이 잘못인지 이해하겠는가?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나, 신자가 잘 믿는 것이나 너무나 기본이다. 그러지 않으면 학생도, 신자도 아니지 않는가?
주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 뒤집어서 말하면 능치 "못할" 일은 전혀 없지만, 능치 "안할" 일은 있다는 뜻이다. 어린 아이는 아빠가 틀림없이 돈이 없어서 사달라는 캔디를 못 사주는 것이라고밖에 생각 못한다. 아이의 치아 건강과 근검절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습관 등을 가르치려는 아비의 의도는 짐작도 못한다. 또 아무리 잘 설명해주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어렴풋이 알아먹어도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자꾸 돈이 없어서 사주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조르면 아빠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아빠가 지금 캔디 사줄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아느냐? 아빠는 언제든지 너한테 캔디는 사 줄 수 있다.”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아빠의 숨겨진 또 다른 뜻은 무엇인가? “내가 '못 사주는' 것이 아니라 너를 생각해서 '안 사주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비의 대화도 바로 이런 내용이지 않는가?
하나님께 능치 못하는 일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 반면에 능치 안 하는 일은 아주 많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신자가 기도한대로 다 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 중 거의 모두의 믿음이 아직도 매일 캔디만 먹고 싶은 어린아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또 캔디만 먹으면 충치밖에 생기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이 왜 응답해 주시지 않는지 혹은 지체되는지 성경의 진리와 대조 비교하면서 따지고 또 따져야 한다. 정작 기도의 대부분을 이런 묵상에 할당해야 한다. 간혹 “뭘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며 믿느냐? 그냥 단순히 믿으면 되지.”라고 반발하는 분들이 있다. 단순히 믿는다는 뜻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불순한 의도나 욕심이 개입되지 않고 정말로 순수하게 온전히 믿는 것이 단순히 믿는 것이다. 또 그 일은 성경을 제대로 배워서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아야만 가능하다. 무조건 믿고 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심과 고집을 버리지 않으려니까 무조건 믿으려드는 것인데,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맹신일 뿐이다.
순수하지 않는 것은 단순하지도 않다. 반면에 단순하다고 해서 전부 순수하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정말로 순수하게 믿어야지 단순히 믿어야 하는 법은 없다. 아무 것도 모르고 단순히 무조건 믿는 자는 오히려 항상 자신과 세상과 사단에게 속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유는 무슨 유인가?
제자들이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지 못했는지 물었을 때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주님의 대답 또한 많은 이들이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기도로 귀신까지 쫓겨나가는 이적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든 기도로 못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침 예수님도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딱 들어맞는 해석 같다.
여전히 믿음과 기도를 연결시켜서 본문의 원래 뜻과는 무관하게 진짜 말 그대로 단순하게 믿으려 든다. ‘단순’에 대해서도 단순히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재차 강조하지만 단순한 믿음이 좋은 믿음이라고 치장하여서 자신들의 욕심과 고집을 교묘히 숨긴다. 안타깝게도 그런 착각 내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줄도 잘 모르고 가르쳐 주는 이도 없다.
예수님의 초점은 귀신같은 종류는 기도 외에는 절대 쫓아낼 수 없다는데 있다. 기도하기만 하면 다 쫓겨 간다고 말씀한 적이 없다. 귀신을 대적하는 수단은 기도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도해도 귀신이 쫓겨 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도 결국 같은 뜻인데 뭘 그리 복잡하게 따지느냐고 반발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먼저 우리 믿음, 엄밀히 말해 믿음이 아니라 생각은 이미 말한 대로 기도만 하면 귀신도 쫓겨나간다는 틀을 넘지 못한다. 기도라는 방법론에만 관심이 온통 쏠려 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런 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쫓겨나가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귀신과 축사사역의 특성을 강조하셨다. 전자는 기도가 만사형통의 수단이 된다는 뜻이지만,. 후자는 귀신의 본질을 알고서 대처해야 한다는 경고다.
또 귀신을 쫓아내는 데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은 축사 외의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기도 외의 방법을 동원해도 된다는 것이다.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가고, 돈이 없으면 열심히 벌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병이 당장 낫거나, 부도난 사업에 구제금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미 피조물 중에 가장 수준 높은 지성적 능력을 주었기에 그것을 잘 활용하여 일상적인 삶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운영해야 한다.
반면에 귀신은 순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다. 귀신이 활동하는 무대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이다. 또 사람의 영혼을 자기 수하에 묶어서 농간을 부리고 훼방하는 일도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전혀 볼 수 없는 영적인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고 물이나 불에 뛰어 드는 결과적 증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증상이 마치 심한 우울증이나 간질 같은 질병처럼 보여도 약, 수술, 상담 등 어떤 대책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순전히 영적인 문제이므로 순전히 영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기도가 만병통치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는 언뜻 무슨 일이든 기도만 하면 다 이루어주겠다는 뜻처럼 보이는 약속이 곳곳에 나온다. 자세히 보면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 전부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의 전제 내지 조건이 붙는다. 또 그런 전제는 수많은 의미를, 단적으로 말해 성경 전체가 말하는 내용을 다 내포하고 있다. 성경 66권이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도가 만병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하다. 단, 능치 안 할 일도 많은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상한(?) 전지전능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쫓지 말고 기도하라.
본문에서 정작 주지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예수님은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25절)고 하셨다. 당신께선 꾸짖기만 하여 쫓아내었다.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기도만 하라고 했다. 왜 그러셨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주님은 물질계와 영계를 다 망라한 만물과 만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또 당신의 능치 못하실 능력에 비해 귀신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라 당신의 꾸중 한마디로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쫓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자들은 물질계 내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데 영적 존재인 귀신을 대적해 감당할만한 능력 자체를 갖지 못했다. 또 아직 오순절 전이라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주님과 떨어져 있는 상황에선 더더욱 귀신과 맞설 수 없다. 오직 주님께 쫓아 내어주도록 요청하는 길 외에는 없다.
기도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주님이 강조한 것을 보면, 아마도 제자들이 주님의 흉내를 섣부르게 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아이에게 대고 주님과 비슷한 내용의 명령을 외쳤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흉내만 내었기에 사단에 대한 명령도, 하나님에 대한 기도도 아니었다. 일종의 주문을 외운 것에 불과했다. 나아가 아직까진 제자들은 영적인 문제에 대한 올바른 지식도 없었다. 요컨대 성령의 권능이 동반하지 않았으니 귀신이 꿈적도 하지 않을 수밖에는 ....
오늘 날에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하며 명령하는 기도를 외치기만 하면 귀신이 쫓겨 나갈 것이라고 단순히 기대해선 안 된다. 어떤 특정한 수단으로 특정한 결과가 반드시 일어나면 그 수단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다. 대신에 대적하며 기도하는 신자의 영적인 자세가 올바르게 서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순전해야 한다. 개인적 욕심과 계획을 고집해선 안 된다. 믿음이 단지 내 의지력과 결단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내 속의 죄와 교만과 욕심부터 완전히 제거해 내어야 한다.
당연히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혹시라도 다른 어떤 능력이나 권세를 의지하거나 보태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없애야 한다. 물론 축사 외에 일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까지 그러라는 뜻은 아니다. 급성맹장염인데 병원 안가고 기도만 하는 것은 오히려 비성경적인 불신앙이다.
정말로 하나님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특별히 아무리 강력한 군대 귀신이라도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 앞에 결코 대항할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한다. 또 그런 영적인 일은 영적 차원에서 이뤄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진척이 없어도 주님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영적인 눈으로 보고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은 없어도 능치 안할 일은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미리부터 포기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이라면 진짜로 뜨겁게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큰 뜻을 세워서 기도해야 한다.
축사를 위한 기도도 단순히 그 사람을 치료하려는 목적에 그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꾸짖었다. 당신의 자녀로 온전히 세우려는 뜻이다. 정말 그 모든 일에서, 특별히 그 자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만 드러나기를 소원하며 기도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완벽하게 순전해지기는 정말로 힘들다. 전적으로 확신에 찬 기도를 하기도 사실상 어렵다. 기도 중에 온갖 잡념은 물론 불안, 염려, 의심, 불신마저 들어온다. 그러니까 우리로선 더더욱 기도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그야말로 쉬지 말고 기도할 수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진짜 위로되는 사항은 주님은 우리의 그런 점까지도 이미 잘 알고 계시기에 일단은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만 하면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다.. 정말로 모든 기도가 끈질기고 간절해야 한다. 본문의 아비를 야단은 쳤지만 응답해주었듯이, 우리 또한 기도 중에 우리 잘못을 깨우쳐 주시면서 필요하다면 잘못된 기도의 응답까지도 해주신다. 진정성과 갈급성이 기도의 본질, 아니 믿음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영적인 문제는 예수님 말씀대로 기도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귀신을 쫓거나 은사를 발휘하는 초자연적인 문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 자신의 영혼부터 주님 은혜와 권능 안에서 거룩하게 소생하는 일을 위해 정말 평생을 두고 모든 일에 앞서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교제에 어떤 잡티라도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주위 사람들의 심령이 아름답고 풍성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전도할 불신자의 영혼을 품어 안고서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얼마나 긍휼히 여겼겠는가? 믿음 없는 제자나 그 아비는 꾸중하고 가르치면 되지만, 아이는 정말 당신의 역사가 아니고는 참 생명을 누릴 길이라곤 전무했다. 또 그 동안에 얼마나 귀신에게 시달려왔을지 생각하면 주님의 심령이 죽은 나사로를 보듯이 통분하고 민망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이의 영혼에 주님의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바로 영적인 일이다. 신령한 은사의 첫 번째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시인하게 하고 그분 품 안에서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이지 않는가?. 바로 그런 일은 기도 외에는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말씀도 병행해서 봐야지만 기도 없이는 도덕과 종교 계명일 뿐이지 살아있는 은혜와 권능의 말씀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신자가 기도하면 주님께는 능치 못할 일도, 안할 일도 하나도 없게 된다. 나아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는 약속도 그대로 응한다. 정말로 우리는 주님보다, 정확히 말해 주님께 순전한 기도를 드려서 주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것보다 더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선 영혼을 살리는 일에는, 심지어 자신의 영혼마저도, 그리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지성과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에 큰 이적을 보여 달라고 죽어라고 기도한다.
그러다 조금만 응답이 지체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약속하셨지 않느냐고 불평을 쏟아내기 바쁘다. 기도가 지체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응답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본문 또한 약속이 아니라 꾸중하는 말씀이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도 수십 년 교회 안에서 중직을 맡으며 성실히 봉사했던 자들마저 말이다.
요컨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만 붙드는 신자는 캔디만 먹으려는 어린아이다. 능치 안할 일도 많은 하나님인 줄 알기에 그분께서 능히 하실 일만 찾아 기도할 줄 알아야 올바른 신자다. 최대한 양보해서 능히 안하는 이유라도 열심히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4/12/2011-->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9:23,24)
전투적 구호에만 익숙한 신자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신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는 예수님의 약속도 아마 없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의 집에 마치 가훈처럼 액자로 걸러져 있다.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기도하고 또 믿음을 키운다. 권장할만한 참으로 좋은 일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런 신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어졌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능치 못할 일이 많으니까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 아닐까 싶다.
공부 못해 석차를 올려보려는 학생은 책상 앞에 온갖 전투적 구호를 써서 붙여 놓는다. 반면에 항상 일등 하는 학생은 그런 전투적 구호는 필요 없다. 아예 구호를 붙이지 않거나, 붙여도 단지 소망하는 대학 이름만 붙여 놓는다. 전자의 구호는 열심히 공부하자는 뜻이고, 후자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또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공부해 이루고 싶은 목표만이 문제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성도에겐 믿음을 키우고 기도를 열심히 하자는 본문 같은 구호는 사실상 필요 없다. 대신에 믿음의 기도를 통해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할 비전만 적어 놓는다. 자나 깨나 예수님을 닮으려 하고 맡겨주신 소명에 충성하는 데만 신경 쓸 뿐이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똑같이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처럼 내용이 다르다. 거기다 엄밀히 따져보면 흔히 이해하듯 신앙실력의 질적, 양적 차이보다는 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공사역 중에, 정확히 말해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 하셨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신자는 능치 못할 일이 없고,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는 그러지 못하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선 안 된다. 오순절 전이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이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구원은 물론 사도로 택함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은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즉 엄밀히 말해 신자가 되기 전이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는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도하면 귀신이 쫓겨 가고 사용했던 수건만 얹어도 병이 나았다. 물론 기독교의 초석을 다져야 했기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해야만 했던 초대교회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의 기도가 전과 비교해서 완전히 달라졌다. 아주 담대해졌고 예수님의 약속 그대로 능치 못할 일이 없어졌다.
지금 사도들을 높이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참 신자가 되었다면 우리도 그러하다. 말하자면 사도들이나, 구약 시대 큰 능력의 선지자인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확신하는 신자라면, 그래야 한다.
말하자면 온갖 전투적 신앙구호를 열심히 외우며 노력할 필요 없이 묵묵히 자신에게 주신 소명에만 충성하면 된다. 이미 우리는 엘리야요 베드로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 봐도 그렇지 않다.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해도 소명을 실현하기는커녕 아직도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아니 개중에는 구원여부에 확신도 없는 자도 많다. 과연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도대로 다 응답되면
벙어리 귀신이 들린 한 아이의 부모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러 지 못했다. 그 사정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절)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믿음이 없기에 귀신이 쫓겨 가지 않았다고 한다.
무화과를 맺지 못한 나무를 예수님이 저주하자 뿌리부터 말라버렸다.(막11:20)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래도 되리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답하셨다. 동일하게 믿음과 기도 응답을 연결시켰다.
정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는 일이 없는가? 이 산을 명하면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는가? 솔직히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이런 질문에 선뜻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또 대답이 망설여지니 스스로도 제대로 믿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틀림없이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실 텐데도 그렇다. 그럼 우리도 오순절 전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라고 야단맞지 않겠는가? 왜 우리에겐 정말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것일까?
그런데 사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이 산을 명하여 저리로 옮기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과장법으로 비유하여 그 뜻을 알기 쉽게 강조한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표현 방식이 아니다. 그런 일이 아예 현실과는 동떨어진 비유일 뿐이라 간주하고 전혀 시도도 않거나, 그 정반대로 온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해 기도하면 언제든 산을 이 곳 저 곳으로 옮겨주실 초능력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단지 비유로 간주하는 이성적 신자는 기적은 더 이상 없다면서 아예 구하지도 않는다. 그 반대편은 산이 옮겨지는 초자연적 응답만 열심히 구하다 안 되면 불만과 의심을 터트리기 일쑤다. 기적까지는 아니라도 이 간단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신자가 기도해 산이 정말 옮겨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한국의 신자가 광개토대왕이 차지했던 땅을 회복한답시고 백두산을 만주 끝에다 옮겨놓고 우리 땅이라 선포하면 중국의 신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 다음날로 한라산을 상해 남쪽으로 옮길 것이다. 또 그런 식으로 아침저녁으로 온 산들이 핑핑 날아다니면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에는 3차 대전이 일어나고 전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신자들이 이해하듯이 문자적 해석을 그대로 적용해 보았을 뿐이지 않는가? 결국 요체는 이것이다. 인간이 그런 큰 능력을 쥐게 되면 절대 선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자고 나면 논의 경계를 바꾸는 것(我田引水)이 인간이지 않는가?
신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욕심은 믿음에 크게 상관없이 끝이 없다. 불신자는 그 욕심을 자기 힘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려 한다. 인생의 목적은 같되 그것을 이루는 수단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만약에 신자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뤄지면 하나님이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 자체가 가장 큰 힘을 갖는다. 또 신자가 바로 하나님이 되고 그분은 단지 하늘의 보물을 보관한 창고의 수납계 직원에 불과해진다. 신자가 기도로 출고명령을 올리면 무조건 그대로 창고에서 꺼내어 내려 보내야 하는 그런 직원 말이다. 그건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다.
오래 전 미국 코미디 영화에 나온 내용이지만 신이 기도하는 대로 다 들어줬더니 수만 명이 한꺼번에 복권 1등에 당첨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당첨자 전부가 기도한 자였기에 어쨌든 모두가 신자라는 뜻이다. 정말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면 모두가 각양각색으로 일찌감치 파멸했거나, 전부 감옥에 가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 실제로 미국에서 로또 일등 당첨된 사람들의 그 후 인생을 추적했더니 모두 비참한 실패를 겪었다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부패한 심령을 우리보다도 더 정확히 아시기에 헛된 곳에 쓰려는 욕심에 찬 기도는 응해 주시지 않는 것이다.
믿는 자의 의미부터 살펴라.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제자들이 왜 자기들은 그럴 수 없었는지 물었다. 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였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는데, 그러려면 기도하면 된다는 식으로 아주 단순명료하게 정리해버렸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정리해 놓은 내용을 오히려 너무 철석같이 믿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공식 내지 공리가 되어버렸다. '믿는 자'와 '기도'라는 두 단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나는 믿는 자임에 틀림없고 기도도 그만큼 간절히 했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어야 하지 않느냐 정도로밖에는 사고의 틀이 진전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믿는 자'의 해석에서부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기독교 교인이 된 것과 믿는 자를 동의어로 취급한다. 교회에 출석하여 그 가르침대로 따른다고 즉, 기독교적 신앙행위를 하고 있다고 다 신자가 된 것은 아니다. 교인(敎人)과 신자(信者)는 분명 다른데도 아무 차이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정말 성령으로 거듭난 자다. 자기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임이었음을 철두철미 깨닫고 오직 주님의 긍휼만 소원해야 한다. 세상만 따라갔던 이전의 헛되고 헛된 삶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비록 당장의 실천은 더딜지라도 머리 둘 곳 없이 좁고 협착한 길이라도 그분만 따라가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 차있어야 한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을 넘어 정말 평생을 예수만 주로 모시고 살아야 진짜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종교적으로 판단되는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보는 정체성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그분이 나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직 죄 중에 있을 때에 주님이 내 대신 죽으셔서 나를 살려내셨기에 평생을 두고 그분께 감사와 경배와 찬양만 드리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볼 때는 전혀 믿지 않는 자인데도 스스로 신자라고 착각하는 교인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왜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부득부득 따진다. 마치 남의 집 아들이 찾아와서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탕 안 사준다고 우기는 꼴이다. 그럼 이웃집 아저씨는 처음에는 불쌍해서 한두 번 사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이상한 아이 취급하지 않겠는가? 교회 안에도 처음에는 기도 응답이 몇 번 되니까 자기가 신자인 줄, 그것도 기도의 은사를 받은 믿음이 좋은 신자로 착각하는 자들이 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당시의 의도와 배경을 잘 살펴야 한다. 아비가 아이를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고 땅에 엎드려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게 만들었다.(20절) 주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21절)고 물었더니 아비는 어릴 때부터 그랬고 저를 죽이려고 자주 불과 물에 던졌다고 대답했다.(22절)
그리고는 아비가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절) 라고 간청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아비의 말을 그대로 받아 반문하는 형식으로 야단친 셈이다. 새로운 가르침이나 약속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은 물론 신자에게 은혜가 되지만 당시 정황으로 돌아가면 축복의 약속이 아니었다.
마치 욥기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말씀의 경우와 같다. 문맥상의 뜻이 성경적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 기복적인 말이며, 친구 발닷이 욥을 견책하는 가운데 했던 말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아님에도 많은 신자들이 액자로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주문처럼 외운다.
본문은 오히려 더 명약관화하다. 말씀 자체의 의미만 따져도 꾸중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 너는 내게 못할 일도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그리고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도,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인데 너는 그것조차 모르느냐?"는 뜻이지 않는가?
물론 이조차 모르거나 믿지 않는 신자는 사실상 한 명도 없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은 다 믿는다. 신앙이 없는 자도 하나님이 있다면 전지전능할 것은 너무나 지당하다고 여긴다. 문제는 때로 기도응답이 오래 지체되면 문득 그런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절대 부인될 수 없는 진리이기에 그 의심도 당연히 절대로 잘못된 것이다. 당연히 기도 응답이 지체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이해부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못할 일이 없는 것은 1+1=2와 같은 너무나 확고한 진리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능치 못할 일이 생기니까 자기 믿음에 하자가 있다고 여긴다. 잘 믿긴 하지만 완전하게 믿은 것은 아니라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어떻게 하든 더 열심히 믿으려고만 든다.
그러나 잘 믿으려 열심히 노력했는데 어떤 기도는 응답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음을 체험한다. 결국 믿음에 얼마나 열심과 정성이 따랐느냐에 따라 응답이 달라진다고 추측한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못 받고는 기도하는 자의 믿음의 세기에 따른다고 말한다. 올바르게 잘 믿으면 응답이 잘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강단에서 그렇게 가르쳐지고 있고 신자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열심히 잘 믿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능치 못할 일이 생긴다. 그것도 하나님에게 말이다. 너무나 크고 심각한 오류가 아닌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믿음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아니 인간이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는 것이다. 오류를 넘어서 너무나 참람한 짓이다.
능히 안하는 일도 많다.
마땅히 신자라면 열심히 간절히 꾸준히 무슨 일이든지 기도해야 한다. 또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아주 기쁘게 여기신다. 본문의 경우도 주님이 아비를 견책하는 말씀을 했어도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어주셨지 않는가? 그 믿음의 수준이 아직 어리거나 하자가 있을지라도 주님은 그마저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또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겸비하고도 진정으로 간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열심히 간절히 꾸준히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잘 응답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반면에 정말로 궁급하고 절실하여서 오직 주님의 도움만 소망하기에 열심히 간절히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믿음은 후자의 것이다. 믿음의 본질이 열심히 간절히 꾸준히 기도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얼마나 더 깊이 절감하고 또 그래서 주님을 얼마나 더 절실히 찾느냐의 문제다.
아비가 "주님더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했기에 주님은 그 전제가 잘못이라고 꾸중했다. 그리고선 그 꾸중치는 이유로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이런 전후 사정은 전혀 따져보지도 않고 후반부의 절로 은혜가 되는 말씀만 초지일관 붙들고 있다. 말씀을 이렇게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초보적인 믿음인지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공부 못하는 아들이 형편없는 성적표를 아빠에게 보이면서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성적이 나쁘게 나왔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아비는 “공부 안 해서 성적이 안 좋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아들은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고 노력했다. 어떤 부분에서 잘못되었는지는 전혀 따져보지도 않는다. 이전처럼 무조건 열심히 공부해보아도 결과는 여전히 실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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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다니 대체 말이나 되느냐? 내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기본이지 않느냐?”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심히 믿지(공부하지) 않았으니까, 열심히 믿기로(공부하기로)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무엇이 잘못인지 이해하겠는가?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나, 신자가 잘 믿는 것이나 너무나 기본이다. 그러지 않으면 학생도, 신자도 아니지 않는가?
주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 뒤집어서 말하면 능치 "못할" 일은 전혀 없지만, 능치 "안할" 일은 있다는 뜻이다. 어린 아이는 아빠가 틀림없이 돈이 없어서 사달라는 캔디를 못 사주는 것이라고밖에 생각 못한다. 아이의 치아 건강과 근검절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습관 등을 가르치려는 아비의 의도는 짐작도 못한다. 또 아무리 잘 설명해주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어렴풋이 알아먹어도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자꾸 돈이 없어서 사주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조르면 아빠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아빠가 지금 캔디 사줄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아느냐? 아빠는 언제든지 너한테 캔디는 사 줄 수 있다.”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아빠의 숨겨진 또 다른 뜻은 무엇인가? “내가 '못 사주는' 것이 아니라 너를 생각해서 '안 사주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비의 대화도 바로 이런 내용이지 않는가?
하나님께 능치 못하는 일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 반면에 능치 안 하는 일은 아주 많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신자가 기도한대로 다 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 중 거의 모두의 믿음이 아직도 매일 캔디만 먹고 싶은 어린아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또 캔디만 먹으면 충치밖에 생기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이 왜 응답해 주시지 않는지 혹은 지체되는지 성경의 진리와 대조 비교하면서 따지고 또 따져야 한다. 정작 기도의 대부분을 이런 묵상에 할당해야 한다. 간혹 “뭘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며 믿느냐? 그냥 단순히 믿으면 되지.”라고 반발하는 분들이 있다. 단순히 믿는다는 뜻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불순한 의도나 욕심이 개입되지 않고 정말로 순수하게 온전히 믿는 것이 단순히 믿는 것이다. 또 그 일은 성경을 제대로 배워서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아야만 가능하다. 무조건 믿고 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심과 고집을 버리지 않으려니까 무조건 믿으려드는 것인데,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맹신일 뿐이다.
순수하지 않는 것은 단순하지도 않다. 반면에 단순하다고 해서 전부 순수하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정말로 순수하게 믿어야지 단순히 믿어야 하는 법은 없다. 아무 것도 모르고 단순히 무조건 믿는 자는 오히려 항상 자신과 세상과 사단에게 속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유는 무슨 유인가?
제자들이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지 못했는지 물었을 때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주님의 대답 또한 많은 이들이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기도로 귀신까지 쫓겨나가는 이적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든 기도로 못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침 예수님도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딱 들어맞는 해석 같다.
여전히 믿음과 기도를 연결시켜서 본문의 원래 뜻과는 무관하게 진짜 말 그대로 단순하게 믿으려 든다. ‘단순’에 대해서도 단순히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재차 강조하지만 단순한 믿음이 좋은 믿음이라고 치장하여서 자신들의 욕심과 고집을 교묘히 숨긴다. 안타깝게도 그런 착각 내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줄도 잘 모르고 가르쳐 주는 이도 없다.
예수님의 초점은 귀신같은 종류는 기도 외에는 절대 쫓아낼 수 없다는데 있다. 기도하기만 하면 다 쫓겨 간다고 말씀한 적이 없다. 귀신을 대적하는 수단은 기도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도해도 귀신이 쫓겨 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도 결국 같은 뜻인데 뭘 그리 복잡하게 따지느냐고 반발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먼저 우리 믿음, 엄밀히 말해 믿음이 아니라 생각은 이미 말한 대로 기도만 하면 귀신도 쫓겨나간다는 틀을 넘지 못한다. 기도라는 방법론에만 관심이 온통 쏠려 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런 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쫓겨나가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귀신과 축사사역의 특성을 강조하셨다. 전자는 기도가 만사형통의 수단이 된다는 뜻이지만,. 후자는 귀신의 본질을 알고서 대처해야 한다는 경고다.
또 귀신을 쫓아내는 데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은 축사 외의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기도 외의 방법을 동원해도 된다는 것이다.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가고, 돈이 없으면 열심히 벌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병이 당장 낫거나, 부도난 사업에 구제금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미 피조물 중에 가장 수준 높은 지성적 능력을 주었기에 그것을 잘 활용하여 일상적인 삶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운영해야 한다.
반면에 귀신은 순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다. 귀신이 활동하는 무대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이다. 또 사람의 영혼을 자기 수하에 묶어서 농간을 부리고 훼방하는 일도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전혀 볼 수 없는 영적인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고 물이나 불에 뛰어 드는 결과적 증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증상이 마치 심한 우울증이나 간질 같은 질병처럼 보여도 약, 수술, 상담 등 어떤 대책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순전히 영적인 문제이므로 순전히 영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기도가 만병통치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는 언뜻 무슨 일이든 기도만 하면 다 이루어주겠다는 뜻처럼 보이는 약속이 곳곳에 나온다. 자세히 보면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 전부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의 전제 내지 조건이 붙는다. 또 그런 전제는 수많은 의미를, 단적으로 말해 성경 전체가 말하는 내용을 다 내포하고 있다. 성경 66권이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도가 만병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하다. 단, 능치 안 할 일도 많은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상한(?) 전지전능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쫓지 말고 기도하라.
본문에서 정작 주지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예수님은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25절)고 하셨다. 당신께선 꾸짖기만 하여 쫓아내었다.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기도만 하라고 했다. 왜 그러셨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주님은 물질계와 영계를 다 망라한 만물과 만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또 당신의 능치 못하실 능력에 비해 귀신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라 당신의 꾸중 한마디로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쫓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자들은 물질계 내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데 영적 존재인 귀신을 대적해 감당할만한 능력 자체를 갖지 못했다. 또 아직 오순절 전이라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주님과 떨어져 있는 상황에선 더더욱 귀신과 맞설 수 없다. 오직 주님께 쫓아 내어주도록 요청하는 길 외에는 없다.
기도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주님이 강조한 것을 보면, 아마도 제자들이 주님의 흉내를 섣부르게 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아이에게 대고 주님과 비슷한 내용의 명령을 외쳤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흉내만 내었기에 사단에 대한 명령도, 하나님에 대한 기도도 아니었다. 일종의 주문을 외운 것에 불과했다. 나아가 아직까진 제자들은 영적인 문제에 대한 올바른 지식도 없었다. 요컨대 성령의 권능이 동반하지 않았으니 귀신이 꿈적도 하지 않을 수밖에는 ....
오늘 날에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하며 명령하는 기도를 외치기만 하면 귀신이 쫓겨 나갈 것이라고 단순히 기대해선 안 된다. 어떤 특정한 수단으로 특정한 결과가 반드시 일어나면 그 수단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다. 대신에 대적하며 기도하는 신자의 영적인 자세가 올바르게 서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순전해야 한다. 개인적 욕심과 계획을 고집해선 안 된다. 믿음이 단지 내 의지력과 결단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내 속의 죄와 교만과 욕심부터 완전히 제거해 내어야 한다.
당연히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혹시라도 다른 어떤 능력이나 권세를 의지하거나 보태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없애야 한다. 물론 축사 외에 일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까지 그러라는 뜻은 아니다. 급성맹장염인데 병원 안가고 기도만 하는 것은 오히려 비성경적인 불신앙이다.
정말로 하나님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특별히 아무리 강력한 군대 귀신이라도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 앞에 결코 대항할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한다. 또 그런 영적인 일은 영적 차원에서 이뤄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진척이 없어도 주님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영적인 눈으로 보고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은 없어도 능치 안할 일은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미리부터 포기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이라면 진짜로 뜨겁게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큰 뜻을 세워서 기도해야 한다.
축사를 위한 기도도 단순히 그 사람을 치료하려는 목적에 그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꾸짖었다. 당신의 자녀로 온전히 세우려는 뜻이다. 정말 그 모든 일에서, 특별히 그 자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만 드러나기를 소원하며 기도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완벽하게 순전해지기는 정말로 힘들다. 전적으로 확신에 찬 기도를 하기도 사실상 어렵다. 기도 중에 온갖 잡념은 물론 불안, 염려, 의심, 불신마저 들어온다. 그러니까 우리로선 더더욱 기도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그야말로 쉬지 말고 기도할 수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진짜 위로되는 사항은 주님은 우리의 그런 점까지도 이미 잘 알고 계시기에 일단은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만 하면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다.. 정말로 모든 기도가 끈질기고 간절해야 한다. 본문의 아비를 야단은 쳤지만 응답해주었듯이, 우리 또한 기도 중에 우리 잘못을 깨우쳐 주시면서 필요하다면 잘못된 기도의 응답까지도 해주신다. 진정성과 갈급성이 기도의 본질, 아니 믿음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영적인 문제는 예수님 말씀대로 기도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귀신을 쫓거나 은사를 발휘하는 초자연적인 문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 자신의 영혼부터 주님 은혜와 권능 안에서 거룩하게 소생하는 일을 위해 정말 평생을 두고 모든 일에 앞서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교제에 어떤 잡티라도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주위 사람들의 심령이 아름답고 풍성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전도할 불신자의 영혼을 품어 안고서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얼마나 긍휼히 여겼겠는가? 믿음 없는 제자나 그 아비는 꾸중하고 가르치면 되지만, 아이는 정말 당신의 역사가 아니고는 참 생명을 누릴 길이라곤 전무했다. 또 그 동안에 얼마나 귀신에게 시달려왔을지 생각하면 주님의 심령이 죽은 나사로를 보듯이 통분하고 민망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이의 영혼에 주님의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바로 영적인 일이다. 신령한 은사의 첫 번째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시인하게 하고 그분 품 안에서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이지 않는가?. 바로 그런 일은 기도 외에는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말씀도 병행해서 봐야지만 기도 없이는 도덕과 종교 계명일 뿐이지 살아있는 은혜와 권능의 말씀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신자가 기도하면 주님께는 능치 못할 일도, 안할 일도 하나도 없게 된다. 나아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는 약속도 그대로 응한다. 정말로 우리는 주님보다, 정확히 말해 주님께 순전한 기도를 드려서 주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것보다 더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선 영혼을 살리는 일에는, 심지어 자신의 영혼마저도, 그리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지성과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에 큰 이적을 보여 달라고 죽어라고 기도한다.
그러다 조금만 응답이 지체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약속하셨지 않느냐고 불평을 쏟아내기 바쁘다. 기도가 지체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응답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본문 또한 약속이 아니라 꾸중하는 말씀이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도 수십 년 교회 안에서 중직을 맡으며 성실히 봉사했던 자들마저 말이다.
요컨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만 붙드는 신자는 캔디만 먹으려는 어린아이다. 능치 안할 일도 많은 하나님인 줄 알기에 그분께서 능히 하실 일만 찾아 기도할 줄 알아야 올바른 신자다. 최대한 양보해서 능히 안하는 이유라도 열심히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4/1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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