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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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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현 목사 |
참고 : |
< Nov. 6, 2011 복된교회 / 성령강림 후 스므 한 번째 주일 / 1부 예배 >
< Nov. 6, 2011 / This message is for twenty one Lord's Day after Pentecost. >
마 Matthew 5:4, 『 하나님께서 복 주는 사람 10 』
『 The Person That God Give the Blessing 10 』
함께 봉독했던 본문에서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 복이 있다 했습니다. 그러한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네 인생들을 애통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애통해 하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애통해 해야 합니다. 애통해 할 때에 죄와 세상과 욕망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살고, 영적으로 사는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자인 찰스 스펄전 목사는 “마른 눈으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눈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라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함으로 인정받을 사람은 결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늘 온전하지 못한 우리 자신에 대한 눈물, 곧 애통함입니다. 그 눈물, 애통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하고,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인정받게 하며, 하나님께로, 천국에로 이르게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찰스 스펄전 목사는 그러한 눈물, 애통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지난 1991년, 걸프전 때 다국적 총사령관이었던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에게 ABC방송의 바바라 월터스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가장 큰 적,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때 슈워츠코프 장관은 “미국에서 눈물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아주 생뚱맞은 대답을 했습니다. 눈물 없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의 문명과 물질만능에 취하여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 불신앙으로 사는 사람들,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함께나눌 줄 모르는 냉혈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인간미를 상실한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 가는 가운데 미국이란 나라가 점점 더 황폐되어 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어디 미국만의 문제겠습니까? 사람이 사는 곳이 다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일랜드 속담에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라고 했고, 또 아람의 속담엔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 현대인들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눈물이 메말랐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속담들이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애통하는 것이 우리의 살 길이요, 가정과 교회가 살고, 사회와 나라와 민족과 인류가 살길이란 것입니다. 그렇기에 애통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이요, 필연입니다.
애통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는 신앙은 하나의 값싼 장식품에 지나지 않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애통해 하되 어떻게 애통해 하라는 것입니까?
옛날 중국의 진나라 '환온'이 촉나라를 정벌하러 가다가 한 지역을 지날 때였습니다.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면서 백여 리를 뒤따라 왔습니다. 마침내 새끼 원숭이가 배에 올라타자마자 어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병사들이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까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끼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큰 슬픔을 가리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곧 끊을단, 그리고 창자장 그 두 자가 합쳐져 ‘단장(斷腸)의 슬픔’ 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바로 그와 같은 단장의 슬픔입니다. 부모나 자식이 죽었을 때처럼 가슴이 찢어지고 마음이 찢어지듯 아파하며 우는 상태, 슬퍼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욜 2:12-13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시 51:17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무엇을 그토록 슬퍼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는 죄악들을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네 인생들이 애통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 애통이란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죄악들을 마음 아파하며 뉘우치는 회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는 애통함, 눈물이 없다면 어찌 영적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눅 23:28에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 예수님의 희생을 보고서 울기 이전에 우리가 지은 죄를 마음 아파하고, 회개하며 우는 것이 급선무(急先務)라는 것입니다.
마 26:75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심히 통곡했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저주까지 해 가면서 세 차례에 걸쳐 부인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추하고 부끄러웠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을 보고 애통해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연약함을 보면서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린 바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피 우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셨고(요 11:35),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버린 과부가 슬퍼하였을 때에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함께 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한 죽을 죄에서 허덕이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보시면서 긍휼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타인의 아픔에 동참하는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역하던 교회의 한 권사님이 청상과부로 외아들 하나를 남편처럼 아들처럼 애인처럼 사랑하며 살았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통사고로 22살의 그 귀한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이 위로 차 심방을 갔는데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그저 권사님의 손만 꼭 잡고 안타까워하며 쩔쩔매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먼저 말문을 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이번에 아들을 잃고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외롭기 한량없던 저에게 22년간 너무 멋진 아들을 보내주셔서 행복했었습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아들이 이 세상보다 훨씬 완전하고 아름다운 곳에 가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외아들을 잃고 보니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나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더라는 것입니다.
꼭 말을 하지 않더라도 곁에서 함께 있어주고, 곁에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 아픔에 함께하는 손길로도 그토록 위로와 힘을 얻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타인의 입장이 되어, 타인의 아픔과 연약함에 동참하여 나누는 것, 타인의 약점들을 감싸주는 것, 타인의 약점을 내 약점으로 여기는 것이지 않습니까?
해바라기라는 듀엣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사랑으로”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를 읽어 드립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너무도 아름다운 가사이지 않습니까? 가사 중에 “내가 살아가는 동안, 또 하나의 할 일”이란, 먹고 사는 일상의 삶 외에도 잊어서는 안될 꼭 이루어야만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다.”는 것은 숱한 인생의 풍랑, 세파에도 굳세게 산다는 표현입니다. 그 다음 가사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라고 했는데, 이는 이웃의 아픔과 연약함을 나누는 삶, 그러한 삶으로 인하여 가슴에 햇살이 떠오른다는 것, 곧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참된 인간됨, 아름다운 인간됨의 의미를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노래를 쓴 사람은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고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참된 인간됨, 아름다운 인간됨을 지속적으로 실현해 가리라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그렇게 타인의 아픔과 연약함에 동참하여 나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공동체, 우리가 속한 사회, 나라와 민족 등으로 인하여 애통해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속한 공동체인 복된교회의 부흥과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이루는 사역을 위한 애통, 즉 기도와 여러 모양의 헌신과 수고, 우리가 속한 사회와 나라의 부조리와 불의를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돌아 보십시다. 땅 덩어리가 큰 것도 아니고,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조들이 지혜로웠던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그저 늘 수탈당하는 고난의 민족이었던 우리, 지난 5000여 년 동안 지지리도 가난하던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기적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나쳐 온 2000여 년의 기독교 선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한 세기만에 국민의 1/4이 복음화 되는 기적에 수반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국민 1/4의 복음화의 기적, 세계 10위 안의 경제 규모는 결코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새벽마다, 또 밤새워 뿌린 기도의 눈물, 희생의 눈물이란 씨앗, 방방곳곳에 흘러 넘친 신앙의 선조들이 이룬 눈물의 골짜기가 가져다 준 결과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총칼로 세운 나라는 망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로 세운 나라는 결코 망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리의 대한민국에 믿음의 복을 주셔서 제사장 나라, 복음의 나라가 되게 하시고, 물질의 복을 주신 것은 마지막 시대에 전 세계를 향한 선교 사명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명을 망각한 체 부와 명예와 권력을 목표한 데 있습니다. 부나 명예나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반면에 사명을 이루기 위한 부는 의로움이요 복입니다. 우리의 모든 추구와 목적, 우리의 모든 소유가 사명을 위하여 쓰여질 때에 진정으로 복된 것이요 의미가 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애통해 할 때에 위로를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위로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파라칼레오”입니다. 이는 “곁으로”라는 뜻의 “파라.“와 ”부른다“라는 뜻의 ”칼레오“의 합성어입니다. 한 마디로 곁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통해 하는 사람을 모른 체 하거나 홀로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곁으로 부르셔서 함께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생히, 분명하게 제시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생명도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곁에 두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명한 설교가 토마스 왓슨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낙원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사 61:3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계 21:4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애통해 할 때에 그러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이 세상 나라와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문제와 슬픔과 아픔의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는 영원한 천국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故 옥한음 목사님이 한국교회를 바라 보면서 구원인플레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탄식한 바 있습니다. 인격과 삶의 변화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만 있으면 무조건 복 받고 형통하게 된다는 성공과 번영의 복음이 한국교회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리서치 연구소(Christian Research Institute)의 대표이자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매일 방송되고 있는 바이블 앤서 맨(Bible Answer Man)의 방송 진행자인 행크 헤네그래프가 쓴 책 『 바벨탑에 갇힌 복음 』이란 제목처럼 오늘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바벨탑에 갇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에 갇힌 복음이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성공과 번영의 복음을 말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고난 없는 영광, 슬픔과 애통이 없는 잔치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성도들에게서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라버린 눈물 때문에 영적 안구건조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통의 눈물로 병든 나의 영혼이 치유받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와 민족이 치유받아 하나님 앞에서 온전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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