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23:1-13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52856 |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태복음 23:1-13, 창조절 아홉째 주일, 2011년 10월30일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자신이 사제로 일하고 있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의 벽에 95항목의 신학명제가 적힌 대자보를 내다걸었습니다. 교회사가들은 훗날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정했습니다. 루터가 바로 그 날을 시점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당시에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해명한 것뿐입니다. 그런 노력이 교회 내외의 여러 가지 요인과 맞물려 당시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에너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입니다. 무엇이 종교개혁의 정신일까요?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붙인 95 항목의 신학 명제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면죄부가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 역시 신학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당시 가톨릭의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이 언어도단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나름으로 일리가 있었습니다. 면죄부나 교황무오설이나 그 중심은 교회입니다. 면죄부는 당시 베드로 성당 건축비 조달을 위한 조치였고, 교황무오설 역시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건축물보다 더 웅장하고 좋은 성당을 건축하는 노력이나, 그리고 세상의 왕보다 더 막강한 교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모두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비성서적인 교리를 끌어들인 것뿐입니다. 사람은 목적만 좋으면 그 수단은 별로 문제를 삼지 않는 경함이 있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머물러 있으면 종교는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라고 규정했습니다. 한시적으로가 아니라 항상 개혁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은 누구나 개혁이라고 하지만 그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종교 집단에서는 개혁이 특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가 보수적이기도 하고, 경건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잘못을 뚫어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 그런 풍토가 굳어졌습니다.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찬송 부르는 사람은 자타가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하자고 말합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지만 실제로는 옳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일주일 산기도, 또는 40일 금식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비민주적이고, 잘못된 일을 하더라도 이런 경건한 포즈를 취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루터가 당시에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을 문제 삼았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행위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루터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대로 따라가기는 귀찮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종교적인 경건에 담긴 위선은 분간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더 힘듭니다. 그래도 그런 걸 따지지 않으면 교회는 순식간에 본질로부터 이탈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이들은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경건의 대명사입니다. 그들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자주 충돌한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신학적으로 수호하는 이들이었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가 장로처럼 거의 직업적으로 율법과 연관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나 사두개인들에 비해서 이들은 종교적인 위선에 떨어질 개연성이 훨씬 높았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3:1-12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그 자리에 그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2절)에 앉았다고 합니다. 모세의 자리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아마 그곳이 회당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은 받아들이고 그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행동은 별 볼일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것이 위선의 정체입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습니다.(3절)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가리킵니다. 4절은 이런 행태를 더 노골적으로 묘사합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런 말은 물론 과장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율법을 수호하고 실천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죽도록 수고했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직업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런 율법을 일반 사람들에게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세상에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짐은 율법입니다. 율법의 짐이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은 쉽지 않습니다. 그걸 강요받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억압에서 마조히즘적인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만족은 병든 정신에서 나오는 겁니다. 노예근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테리 이글톤(Terry Eagleton)은 <신을 옹호하다>는 책 37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길게 인용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억압에 마치 연인처럼 집착하며, 거기서 얻는 자학적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 죄책감을 떨쳐낸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질병 자체를 빼앗기는 일이 된다. 이 질병이 바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근원적 마조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로서 사랑받는다는 복음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입증해주는 고통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것 같고, 도덕적 자기수양을 위해 애쓰는 우리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멍에가 가벼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거운 사슬에 묶이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오늘 현대인의 모든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실정법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위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남의 부도덕성을 지적하다보면 자신은 도덕적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바리새인이 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소위 정치검찰에게서 이런 모습을 흔히 봅니다. 피의자의 피의 사실을 일일이 매스컴에 알립니다. 빨대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법원에서 선고가 내리기 전에 이미 범법자 취급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불법이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위선입니다.
둘째, 바리새인들의 경건한 행위는 남에게 보이려는 것입니다.(5절) 남에게 보이려면 우선 좋아보여야 합니다. 가치가 있어야 하고, 세련되어야 합니다. 속은 어떻든지 일단 그렇게 보여야 합니다. 기도, 찬송, 구제는 모두 그럴듯해 보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바리새인은 자랑스럽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는 모든 게 부끄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눈에 뜨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모든 경건한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부정되면 세상의 질서는 파괴됩니다. 문제는 경건을 앞세우는 삶의 태도입니다. 경건하게 사는 건 필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는 건 잘못입니다. 기도하는 건 좋지만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내세우는 건 잘못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주의의 잘못입니다.
왜 잘못일까요? 사람이 근본적으로 경건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 대답입니다. 경건하지 않은데 경건한 척하려다 보니 위선에 떨어집니다. 기도의 영성에 들어가지도 못한 사람이 기도하는 척하려니 위선에 떨어집니다. 저는 그것을 어떤 글에서 모범생 콤플렉스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이런 모범생 콤플렉스에 빠져 있습니다. 복음이 선물로 주는 자유와 해방에서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이런 신앙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공격성을 보입니다. 세상을 모두 악한 사탄의 자식들로 봅니다. ‘예수구원, 불신지옥’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규정합니다.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화론에 치우칩니다. 구원은 이미 끝난 문제이니 거기서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자는 주장입니다. 옳은 이야기일까요? 사람은 아무리 성화를 외쳐도 성화되지 않습니다.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기껏해야 단지 교양이 많아질 뿐입니다. 교양으로 사람의 근본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모범생을 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매달려 사는 모범생 콤플렉스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위선이 악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파렴치한 행동으로 감옥에 가거나 부도덕한 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보다는 위선이라 하더라도 남이 볼 때 존경받을만하게 사는 게 더 낫다는 주장입니다. 그걸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위선과 악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악은 이미 악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별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은 선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위험합니다. 사이비 영성이 훨씬 위험한 것과 비슷합니다.
낮춤의 영성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지금 단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자신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롭게 시작한 공동체에도 여전히 위선이 작동된다는 말씀입니다. 서로 잘난 척하는 일들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선생, 아버지, 지도자 연 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한 겁니다. 사람은 선생이, 아버지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엄정한 사실을 직면하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결론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1, 12절) 특히 12절의 역설적 진술은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낮춤의 영성입니다. 이 말씀은 좀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자기를 낮춘다고 해서 나중에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높아지기 위해서 지금 자기를 낮추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 자체가 이미 높아진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자기를 억지로 낮출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자기를 낮출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답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가장 높아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종교적인 위선, 세속적인 온갖 위선에서 떠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위선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며, 그것으로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거꾸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한 사람은 자기를 높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지만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낮은 자리가 곧 높은 자리라는 삶의 역설적 신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아멘.
댓글 '2'
코리도라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