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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5: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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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현 목사 |
참고 : |
< Sep. 18, 2011 라스베가스 소재 복된교회 / 성령강림 후 열 네 번째 주일 / 1부 예배 >
< Sep. 18, 2011 / This message is for fourteenth Lord's Day after Pentecost. >
행 Acts 5:12-16
『 복음의 증표, 복의 증표, 진정한 기적과 능력 』
『 The Proof of Gospel and Blessing, The True Miracle and Power 』
마 4:18-22에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부모와 처 자식을 떠나고,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인 생업을 포기한 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예수님의 무엇을 보고, 어떤 매력에 끌려 부모와 처 자식을 떠나고,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인 생업을 포기한 체, 전 생애를 걸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까? 그저 읽은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근거를 들라 하면 19절의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그 한 마디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등 네 사람에게 뭐 그렇게 대단히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사실 물고기만 잡아서 살았던 어부들인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것은 황당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기 중에서 오징어만을 잡는 어부가 된다든지, 광어나 연어만을 잡는 어부가 된다든지, 아니면 고래를 잡는 어부가 된다든지 하는 등의 말은 들어봤고, 또 그렇다고 한다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비범성을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를 수 있었다는 것. 두 번째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의 엄청난 의미를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영성이 남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다는 것. 세 번째로 예수님을 대면하는 순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이 그냥 압도되어 이끌렸다는 것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 네 제자들을 포함하여 열 두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전생애를 걸고서 예수님을 쫒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쫒는 동안에 열 두 제자들은 모든 종교 지도자들과 전혀 차별화 된 예수님의 심오한 사상과 가르침을 접하고, 순수 본질의 신앙,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쫒고, 태어나면서 불구된 사람들, 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불치의 병들을 고치고,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연을 몇 마디의 명령으로 다스리는 등 많은 기적을 곁에서 목격하고 체험합니다. 그리고 열 두 명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공동생활, 동고동락 하면서, 그 수 많은 시간 동안 늘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엄청난 말씀들로 깨우침 받습니다. 제자들이 막상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보고 체험하면서 예수님은 참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대망해 오던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들과 행적들을 보고 체험하면서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 만사 형통이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고, 스타가 되는 명예까지 얻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축제 분위기의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앞날의 보장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몇 차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럴때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에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무심코 흘려버렸습니다. 예수님 앞에 그 어떤 강력한 대적자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능력을 볼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다윗왕이나 모세를 능히 압도하고도 남는, 감히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그 예수님을 이길만한 적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붙잡혀 갔습니다. 붙잡혀 밤새 대제사장과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끝내 살이 찢어지는 모진 채찍질과 함께, 독이 시퍼렇게 서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붙잡히는 과정, 재판받는 과정, 멸시 천대받고 고난받는 과정,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과정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 어떤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능력도 기적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자, 전 생애를 걸고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이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들 또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히는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할까봐서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혹시라도 로마 군사들이 내 가족을 찾아가 해꿎이를 하지는 않을까? 등등의 엄습하는 무거운 염려거리들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길이 없었습니다. 붙잡혀 죽지만 않아도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까?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스스로 여러 차례 예고했던대로 죽은지 3일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다시금 살아났습니다.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최초의 교회가 생겨난 것의 최초의 근거가 바로 부활 사건에 있습니다. 그 부활 사건 직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120여 명의 성도들에게 강력히 임재하면서 최초의 교회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최초의 교회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행 2:1-4에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 말씀을 이어서 보면, 행 2:5-13에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최초의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받았고, 그들 가운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여러 나라 말들로 복음이 선포되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복음을 선포했던 사람들은 이스라엘 본토 사람들로 다른 나라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다른 나라 말을 할줄 모르던 사람이 다른 나라 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최초의 교회의 모습은 또한 어떠했습니까?
행 2:43-47에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뭐라 했습니까? 첫째,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 곧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둘째,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사랑의 교제가 있어졌습니다. 이것을 한자로 유무상통(有無相通)이라 합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유무상통했더니 어떤 결과가 있어졌습니까?
행 4:32-35에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셋째, 최초의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는데, 이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교회가 그 다섯 가지 모습을 보였더니 어떤 결과가 있어졌습니까? 첫째, 온 백성에게 칭송, 곧 칭찬받는 역사가 일어났고, 둘째, 그러한 가운데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최초 교회의 유사한 모습을 오늘 함께 봉독했던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함께 봉독했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행 5:12-16에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사람들의 각색 질병이 치유되는 기적과 놀라운 일들이 많이 나타났다 했습니다. 그 결과로 첫째, 백성이 칭송, 곧 칭찬하고. 둘째, 주께로 나아오는 남녀가 큰 무리를 이루었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최초의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루게 된 근거들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기적의 능력에 있고. 둘째, 성도들의 유무상통, 곧 주 안에서 성도들 상호간 아름답고 귀하게 섬기는 사랑에 있고. 셋째,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한 것에 있고. 넷째, 하나님께만 영광돌린데 있습니다.
그 네 가지 중에서 첫 번째 것인 기적의 능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주권적인 역사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나타날 수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할 때에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까? 바로 둘째에서 넷째의 것들을 이루어 갈 때입니다. 즉 주 안에서 성도들 상호간 아름답고 귀하게 섬기는 참된 사랑을 이루고,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사람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사람이 영광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릴 때에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들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이 꼭 눈에 보이게, 분명한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우리 복된교회 성도들이 둘째 부분에서 넷째 것까지 이루는 모습 그 자체가 커다란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복된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 우리 복된교회 멤버들이 존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기적의 능력, 특별하고도 기이한 현상을 보는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진정한 기적의 능력을 무엇으로 보느냐는 관점이나 개념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기적입니까? 우리 모두는 성격이나 생각이 다릅니다. 살아온 환경도 다릅니다. 현재의 삶의 자리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외에 많은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복된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서로 다른 모습들을 서로가 끌어안고, 때로는 낮추기도 하고, 때로는 양보하기도 하는 등 내 자신을 죽이고 서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능력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기적입니까? 낮출 줄 몰랐던 내가 수그리고 낮아지는 것, 양보할 줄 몰랐던 나, 고집스러웠던 내가 양보하는 것, 죽을 줄 몰랐던 내가 죽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모난 것, 부끄러운 것, 연약한 모습들을 끌어안고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하여 열심히 힘껏 믿음생활 하는 것, 나를 통해 이룬 아름다운 일들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셔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것이 바로 진정한 기적이요, 진정한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을 따라해 주십시오. “복음의 증표, 복의 증표, 진정한 기적과 능력”.
우리가 서로 많은 부분에서 다르지만, 때때로 맞지 않지만 서로 끌어안고 진정으로 주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사랑으로 섬기며 하나되고,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하여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삶을 살므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이 복음의 증표요, 하나님의 만복을 가져오는 복의 증표가 되고,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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