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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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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이야기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습니다(창2:19). 사람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의 경우는 다른 들짐승이나 새들과는 달리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The breath of life)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령(a living being)이 되게 하셨습니다(창2:7).
참고: 하나님의 생기(The breath of life) : 히브리어 ꡒ루아흐ꡓ, 희랍어 ꡒ프뉴마ꡓ, 라틴어 ꡒanima, animus, spiritus"에 해당됩니다. 이 말은 바람, 폭풍, 기운, 목숨, 등의 뜻에서 점점 그 의미가 확대되어 생명의 본질(principle of life), 생명력(vitality), 성령(Holy spirit),등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생령(a living being)이 되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들짐승은 그냥 들짐승입니다. 공중의 새는 그냥 공중의 새일 뿐입니다. 들짐승이나 새는 흙으로 지음 받은 그 육체 그 의식 그대로 닫혀지고 제한된 본능적 생활을 하다가 그 수명이 다 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들짐승이나 새처럼 흙으로 지음 받은 그 육체 그 의식 안에 갇혀 사는 본능적 존재가 아니라 그 육체와 그 의식을 스스로 통제하고 스스로 새롭게 하고 스스로 초월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그 무엇>을 받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무엇>을 성경은 영혼(soul)이라고 합니다. 즉, 들짐승과 각종 새들은 <육체+의식>으로 구성된 존재이나 사람은 <육체+의식+영혼>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말입니다.
2. 사람과 들짐승
<육체+의식>으로 구성된 들짐승은 충분한 먹이와 안전한 거처 문제만 해결되면 항상 행복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식+영혼/ flesh + consciousness + soul>으로 구성된 사람은 충분한 먹이와 안전한 거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해도 결코 행복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례는 우리 주변 어디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데서 찾아 볼 것도 없이 우리 각자가 그 좋은 사례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사람은 마슬로우가 말한 바 인간 욕구 5단계(Maslow's Hierarchy of Needs). 즉, 육체가 필요로 하는 원초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먹고사는 문제의 안전 확보에 대한 욕구(Safety needs), 사회 활동을 하고 싶은 욕구(Social needs),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Esteem needs), 인생에서 자기다움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욕구(Self-realization needs), 등이 모두 해결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혼이 답답하고 불안하다면 그 모든 성취가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욕구를 채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 영혼이 만족함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영성 생활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그렇다면, 다시 영성 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
영성 생활의 본질은 책이나 이론이나 스승의 가르침으로 배운 지식이 아니라 내가 직접 실존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뵙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뿌리 경험(Root Experience)
절정 경험(Peak or Plateau Experience)
궁극적 은혜 경험(Ultimate Boon)
존재 근거의 경험(Depth Experience)
거룩한 존재 앞에 선 떨리면서도 끌리는 신비 체험(Numinous Experience)
이와 같은 실존적 종교 체험은 사람에 따라 갑자기 비상한 轉機(전기)로 말미암을 수도 있고(광야 떨기나무의 모세, 다메섹의 바울의 경우처럼), 오랜 동안 점진적 과정을 거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들판에서 묵상하는 이삭, 호렙산의 엘리사, 디모데의 경우처럼). 그 어느 쪽이든 일단 하나님과 合一(합일) 되는 만남을 체험한 사람에게 이 세계는 더 이상 <혼돈 속의 혼돈/ Chaos within chaos>의 세계가 아니라 <혼돈 속의 질서/ Cosmos within chaos>의 세계로 인식됩니다.
<혼돈 속의 혼돈/ Chaos within chaos>인 삶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종말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허망하고 짜증나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세상을 ꡒ苦海ꡓ라고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것을 단 한 마디로 ꡒ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ꡓ 라고 갈파하였습니다. 그러나 <혼돈 속의 질서/ Cosmos within chaos>인 삶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啓示며 도전이며 섭리가 됩니다.
즉,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삶의 문제 문제마다 그 문제 자체가 중심이 되고 사람은 각 문제에 끌려 다니는 혼돈의 삶이었으나, 하나님 만난 후에는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능력을 받아 사람이 중심이 되어 모든 문제를 질서 있게 처리하는 삶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중심 축>이 문제에서 하나님께로 이동한 것입니다.
4. 마치는 이야기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소유한 생령(a living being)입니다. 영혼이란 사람의 다차원적(知情意, 육체, 정신, 심리, 등) 측면을 통전하여 총괄하는 내면의 인격적 힘입니다. 건강한 영혼이 건강한 삶을 만듭니다. 사람이 건강한 영혼을 소유하려면 성경에 계시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지혜,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영성 생활이란 각 사람의 영혼이 그 하나님의 사인(sign)을 間斷(간단)없이 예의 주시하는 지속적인 내면의 영적 태도입니다.
5. 들어가는 이야기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회, 소비 지향적 사회, 경제 제일주의 사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男女老少 모두 바쁩니다. 불안합니다. 외롭습니다. 답답합니다. 공허합니다. 그 뿐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각 개인은 가정 생활(A), 직장 생활(B), 개인 생활(C)이 제 각각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습니다. ABC 모두 평안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ABC 중 어느 하나 혹은 둘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요즈음 우리 경제 악화로 ABC 모두가 깨어져 엉망진창인 사람도 많습니다.
6. 혼돈과 질서(Chaos and Cosmos)
그렇다면, 현대의 이와 같은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이런 고통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나는 <결코 아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현대 사회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적 통일성의 상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는 吾道 一以貫之(나의 도는 하나로 통째로 꿰뚫려 일관되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5000字를 한 마디로 줄이면 <爲無爲>라고 하였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형식 없는 내용은 혼돈이며,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란 각각 그 자신만의 내적 통일성, 내적 질서가 있어야 어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견고한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확립할 수 있다. 자기 인생의 전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혼이 건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적 통일성, 내적 질서가 없는 사람은 정신분열, 성격분열 환자처럼 그 인생이 조각조각 떨어져 있어 그 사람의 전체 인생 자체가 사라짐으로 공허하고 어둠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혼돈과 질서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외부 세계(자연 세계+사람 세계)는 질서니, 무질서니, 통일성이니 법칙성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 자체대로 千變萬化(천변만화), 生成消滅(생성소멸)하는 객관적 실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 편에서 보면 이 외부 세계는 혼돈(Chaos),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실존에 처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자기 속에 침입한 이 혼돈의 세계와 부딪쳤을 때 아무 대책 없이 <혼돈 속의 혼돈/ Chaos within Chaos>을 사는 사람의 실존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속에 침입한 혼돈의 세계와 부딪쳤을 때 자신의 내적 통일성으로 <혼돈 속의 질서/ Cosmos within Chaos>를 사는 사람의 실존입니다. 이것을 영성 생활이라고 합니다.
7. 그러면, 이 영성 생활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 영성 생활이란 <혼돈 속의 혼돈/Chaos>에서 <혼돈 속의 질서/cosmos>로 삶의 中心軸(중심축)이 전환 된 생활입니다. 혼돈(Chaos)이란 어리석음, 어둠, 혼란, 방황입니다. 하나님은 없다! 라고 믿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ABC 현실 생활에서 그 때 그 때 닥쳐온 절박한 문제들 앞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두려움, 염려, 근심, 걱정으로 고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를 감싸쥐고 몸부림칩니다.
질서(Cosmos)란 지혜, 빛, 전체적 통일성, 올바른 삶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라고 믿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혼돈 속의 질서를 사는 사람들은 ABC 현실 생활에서 아무리 악한 경우를 만났다고 할찌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지극히 아름답게 해결하여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털끝만큼도 걱정하지 않고 삽니다.
둘째. 영성 생활이란 혼돈의 현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혼돈의 현실 속에 질서와 조화를 창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다고 나의 현실이 바뀌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현실은 그대로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믿기 전의 현실과 하나님 믿은 후의 현실은 그 의미가 180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믿기 전의 악한 현실은 고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믿은 후의 악한 현실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내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도전이며 훈련이며 깨달음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한 고통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찬송가 395장, 502장, 503장이 나의 간증이 됩니다.
셋째. 영성 생활이란 내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삶의 현장입니다. 내 재물, 내 명예, 내 자랑, 내 권세, 내 정욕을 추구하던 생활을 버리고, 나의 현실 삶 속에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삶입니다.
자기 부정의 생활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영성 생활의 본질은 바로 이 자기 부정의 생활이라고 하신 걸 어떻게 합니까? 부족한 대로, 비겁한 대로, 이 모습 이 대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면서도 따라 갈 수밖에! 아니 그렇습니까?
옛글에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외식제연 내심무천 심여장벽 가이입도), 밖으로 모든 핑계를 여이고, 안으로 세상 것을 향한 갈망을 없이 하여, 그 마음이 장벽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면 道에 입문하였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8. 그러면 한국 교회 형편은 어떠한가?
오늘 한국 교회의 전체 분위기는 밝고 힘차다기보다는 어딘가 침침하고 축 처지고 답답한 우울 상태 속에 침체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세대 교체된 많은 대형 교회들이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갈등으로 뿌리내리기 진통을 겪고 있고, 그만 그만한 중형 교회들은 과감한 도전과 개혁보다는 현 체제 유지에 급급한 형편이고, 소형 교회들은 自給自足(자급자족)하는 먹고사는 일 조차 버거워 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많은 교인들의 신앙 생활이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교인들이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서 영적 해갈을 받지 못하더라도 산 기도다, 심령 부흥회다, 베델, 크로스웨이, 트리니티 성경공부다, 제자훈련이다, 전도 폭발이다, 큐티 운동이다, 뭐다,... 하는 기독교계의 영성 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 어느 정도 영적 기갈을 면 할 수 있었는데 요즈음은 그런 프로그램조차 신통한 것이 없는 터라 많은 교인들이 영적으로 모호하고 음울한 불만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9.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한국 교회의 믿는 사람들조차 무한 경쟁 사회가 주는 이 악 영향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모두들 바쁩니다. 모두들 불안합니다. 모두들 공허합니다. 모두들 외롭습니다. 모두들 그럭저럭 하루하루 미적미적 살아가고 있습니다.
샘이 깊은 물처럼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시원한 물을 솟쳐내고, 뿌리깊은 나무처럼 비바람 폭풍우에도 흔들림 없이 그 줄기가 튼실하고 그 잎사귀가 늘푸른 그런 삶을 사는 길은 없을까?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현재 삶을 건전하고 따뜻한 눈으로 直視(직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련함으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A man's own folly ruins his life, yet his heart rages against the Lord 잠19:3) 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삶을 제 손으로 망쳐 놓고는 엉뚱하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1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현재 삶을 잘 살펴보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어디로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무엇인가? 萬法歸一 一歸聖父(만법귀일 일귀성부)입니다. 즉, 사람마다 모양과 방법은 다르나 결국 하나로 돌아갈 것이니 그 하나는 <영성 생활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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