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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부활

고린도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214 추천 수 0 2011.11.16 22:56:24
.........
성경본문 : 고전15:12-5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죽은 사람의 부활  
고전15:12-58
2007.4.7
            *춘천문화 예술회관에서 <인체의 신비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입장료 만원인데, 꼭 한 번 관람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19일까지 입니다.
              저는 <인체의 신비 전>을 보면서 부활 주일을 더욱 뜻 깊게 맞
              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믿음도 굳건해졌습니다.
              이번 주 설교는 그것이 바탕되어 정리되었습니다.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인체의 신비 전>을 다녀왔습니다.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 뼈와 살과 가죽, 장기와 핏줄을 어떻게 그렇게 잘 발려(?) 놓았는지 무서움보단 경외감이 생겼습니다. 마침 고난 주간이라 <인간>에 대한 의미가 더 생생하게 다가왔는데, 여타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실제 인간의 해부를 보면서 신비함과 생의 간단함이 교차했습니다. 관람하는 동안 저는 물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동물의 해골과 다르지 않은 모습가운데서 인간의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부활은 무엇인가? 만약 부활이 없다면, 영혼이 없다면 사람이란 게 고작 우리가 즐겨 먹는 돼지의 삼겹살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떤 이들은 인체의 신비 전을 보고서 기독교의 부활과 영생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 거 별거 아냐. 재미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야!” 하는 소리도 들렸으니까요.      

이천여 년 전, 고린도 교회 사람들도 이런 물음에 봉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교회는 다니면서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2절). 특히 열광적으로 믿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부활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과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역사의식이 없어서였습니다. 그들은, 다가올 종말에 죽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살아나는 것에 대한 꿈을 갖는 대신, 개개인이 내면적으로 심령적으로 구원을 받아서, 지금 여기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열광주의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로, 좀 후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그들의 구호로 삼았습니다(딤후 2:18).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은, 역사 끝에 올 부활, 곧 종말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역사의식과 종말 의식 가운데서 부활을 말하였지만,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역사가 없는, 심령적, 무역사적 부활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바울은 말합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13, 16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핍박을 받고 죽은 사람, 지금 고난당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그는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똑같은 지평에서 봅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기에 그리스도도 부활할 수 있었고, 반대로 그리스도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종말론이 갖는 파격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신원되고, 보상받고, 권리를 회복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죽은 사람 가운데 살아난 첫 번째 사람(첫 열매)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며, 그 다음에 하나님이 통치하는 마지막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종말론을 철저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근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근거하여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확증하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므로, 그 고난도 죽음도 헛되지 않음을 확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종말 의식은 현실을 보는 투철한 역사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을 문제 삼는 다른 이유는 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정할 뿐 아니라, ‘몸의 부활’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몸의 부활을 부정한 것은, 몸은 썩어질 천한 것이지만, 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리스의 영혼불멸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썩어질 육체를 벗어나서 영혼만이 ‘빛’과 합일한다는 것이 2세기 영지주의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오늘 <인체의 신비 전>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몸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씨앗의 비유를 듭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하며, 우리는 씨앗을 뿌릴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36-38절). 이 비유로써 바울은 중요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곧 심기는 씨와 나는 열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씨를 심으면 좋은 싹이 나지만 병든 씨를 심으면 제대로 된 것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은 살아 있는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 어떠한 연속성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죽어서 썩고 살아나는 것은 영일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비유로써 부활의 삶은 오늘 여기에서의 삶이 심겨서 나는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는 죽음이 단절시킬 수 없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이 몸을, 썩어서 없어질 천한 것이나 함부로 다루어도 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소중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몸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면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까지 하였겠습니까?(6:19).

바울은 부활의 몸을 씨앗에서 피어난 것에 비유합니다. 그것은,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고,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나고,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나고, 자연의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42-44절). 현세의 몸이 까맣고 작은 씨앗이라면, 부활의 몸은 화려하고 향기 나는 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몸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의 변화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혹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 자연의 몸과 신령한 몸 사이의 대조가 그리스의 이원론의 구조와 같은 것으로 비칠까봐, 즉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에 속한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46절).

아무리 부활의 몸이 신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수도 있는, 이 세상의 몸이 없이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그것은 작고 볼 품 없는 씨에서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종말의 소망은, 현실의 삶을 무의미하게 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을 의미 있게 해 주고, 지향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32절). 이 말은, 본래 이사야서 22:13에 나오는 것인데, 열광주의자들이 이것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구호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부활은 이미 지나갔고, 다가올 종말도 심판도 없으니, 남은 것은 현세의 삶을 즐기는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 된다”는 그들의 구호(고전 6:12; 10:23)는 그들의 이런 쾌락주의를 잘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며, 몸으로 무슨 짓을 해도 된다며, 방종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쾌락주의는, 사냥꾼에게 잡힌 타조가 덤불에 머리만을 박고서 안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쾌락주의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포자기입니다. 누구도 마침내 다가올 그 냉혹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열광주의자들의 이런 쾌락주의가 갖는 허무함을 알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속지 말라”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합니다(34절).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그리하여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정면으로 대면합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있는 죽음을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라고 합니다(26절). 여기서 마지막은 종말의 때입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는, 살아 있는 자는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회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원수’라고 명시함으로써 그것과의 투쟁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죽거나, 고난을 받아서 죽는 것은, 죽음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무기를 ‘죽음의 독침’이라는 섬뜩한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죽음만도 무서운데 그것의 독침이라니, 과연 그렇게 무서운 무기는 무엇인가? 바울은 그것은 바로 죄라고 합니다(56절).

사람을 진정으로 망하게 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잘못 살았다는 의식입니다. 짐승은 죽음을 두려워할지언정, 존재 전체가 파멸되는 그런 죽음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만이 완전한 파멸을 경험하는 죽음, 곧 영원한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임지와 CNN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3%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절반 이상이,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누구도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원수인 죽음에 대하여 승리를 선언합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54-55절)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리라는 것과, 그때 지금까지 고난 받고 죽임 당한 사람들이 살아나서 함께 통치하리라는 종말의 소망은, 현실의 하루하루의 삶을 긍정하게 합니다. 비록 그것이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고난의 삶이라 할지라도(30절), 그런 삶에는 죽음이 그림자도 드리우지 못합니다. 그런 삶에는 허무주의나 죄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 살고 있다는 죄책감과 심판의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이룩하고 완성해가는 역사에 참여하는 기쁨 가운데 삽니다. 그들에게서는 죄가 그 권세를 떨치지 못하므로, 독침을 잃은 죽음은 이미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이런 종말의 소망 가운데서 살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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