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삼하6:12-14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하나님의 <광대> 다윗처럼
삼하6:12-14
*2007년 4월 15일 주일 설교 원문입니다.
이 문안을 그대로 써서 당일 오후 2시에
동원교회 1.2 남선교회 헌신예배 설교합니다.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옥사나 롭스키>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부자와 결혼하고 싶은 여성들은 미소. 유머감각. 낙관주의. 열정 등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섹시한 몸매, 에스라인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 인생의 에너지를 대부분 소진하거나 그런 압박을 받는 여성들에게 희망이 아닙니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의 백만장자는 아니지만 그 부자들이 왜 몸매 이쁜 여자들이 아니라 미소. 유머. 열정. 낙관적인 성격을 지닌 여인들을 좋아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몸매는 망가지고 변하지만 미소. 유머감각. 낙관적인 생각. 열정 등은 돈을 들여 만들거나, 칼로 깎거나 붙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억만장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품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요? 좀 더 확대해서 말하면 억만장자들은 <건강한 광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성서의 인물들 가운데, 다윗만큼 유명하고 높임을 받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외적 블레셋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넓히고, 예루살렘을 정치, 종교의 중심으로 삼아서, 나라를 부강하고 안정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시에 뛰어났으며 신앙심도 깊어서 시편에 수록된 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그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윗의 외적인 매력들입니다. 다윗은 겉 보다는 속으로 더 많은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
다윗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한 악성 두통 같은 것을 앓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하들은 누가 곁에서 수금을 타면 그 증세가 나으리라 생각하고 사람을 찾았는데, 다윗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의 증세가 가라앉곤 했다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지도 않고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자기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삼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경호실장쯤 되는 셈이죠. 궁중악사로 불려갔는데 금세 경호실장 자리에 오른 것을 보면, 왕이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나중에 다윗과 경쟁관계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적대시하기는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늘 다윗을 아들 같이 대하고 좋아하였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유명합니다. 요나단은 제 목숨을 아끼듯이 다윗을 아끼어, 그와 가까운 친구로 지내기로 굳게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게 되자, 거의 작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계획을 짜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줍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만나서 먹을 것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보통 빵은 없었지만 다윗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제사장이나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인 제단 빵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나중에 사울에게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민심도 사울에게서 떠나 다윗에게로 기울고 있었는데, 개선하는 병사들을 환호하며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불렀다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 18:7). 사울이 아직 왕좌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 앞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으니, 다윗의 인기가 얼마나 하늘 높이 치솟았는지 알 만하죠.
***
다윗은 주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물건을 전해 주러 갔다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쾌거를 거둡니다. 그가 싸우러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형도 말렸고, 사울 왕도 걱정을 하였습니다. 골리앗은 가소롭다는 듯이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고 하면서, 돌 하나를 무릿매로 던져서,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서 쓰러뜨립니다. 어린 소년이 장비 같은 장수를 쓰러뜨렸으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이야기를 다윗의 용맹을 보여 주는 무용담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흐르는 주제는, 다윗은 골리앗에게 객관적인 전력으로 봐서는 질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싸움은 칼과 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일개 목동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성서에 자주 나오는 것이지만, 특히 다윗을 묘사할 때 자주 나오며, 그래서 마치 다윗의 특성처럼 되어 버렸습니다(16:18; 18:12, 14, 28).
***
다윗은 일 속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어려부터 베들레헴 근처에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치면서 자라났습니다(17:15). 사무엘이 왕을 세우려고 다윗의 집에 갔을 때도 다윗의 형들은 다들 집에 있었지만 다윗은 양 떼를 치러 나가고 없었습니다. 집안에서는 막내지만 일하는 데서는 절대로 막내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했을 때, 사울 왕은 다윗에게 ‘네가 너무 어려서 어떻게 싸우겠느냐’고 했지만, 다윗은 굽히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 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 가서 그 놈을 쳐 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 내곤하였습니다 ……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17:34-37).
아무리 어린 사람이지만,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지고 말하니, 사울도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그에게 자신의 투구와 갑옷과 칼을 주어 출전하게 하였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의 용맹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그의 믿음도, 모두 그가 양 떼를 치면서 맹수들과 싸운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 속에서 잔뼈가 굵으면서, 다윗은 매사에 일을 잘 처리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사울이 어떤 임무를 주든지, 맡은 일을 잘 해냈으며, 그리하여 사울이 다윗을 장군으로 임명하였을 때도 온 백성은 물론 사울의 신하들까지도 그 일을 마땅하게 여겼다고 합니다(18:5). 그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나거나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지만, 일 속에서 단련되고 경험을 쌓고 성숙해가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질을 갖춰나간 것입니다. 그는 실천적인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
다윗은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입니다.
그는 형을 일곱이나 둔 막내입니다. 어려부터 형들에게 치이면서 자랐습니다. 귀공자로 자란 것이 아니라 양 떼를 치면서 자랐고, 그가 말하듯이 그렇게 사자나 곰하고 싸움이나 하면서 컸습니다. 그가 인간관계가 좋은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치이고 낮은 자리에 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얼마나 다급했으면 원수인 블레셋 족에게로 가서 자신을 의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곳 왕은 다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받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왕에게 다윗은 위험인물이니 그에 대해 경계심을 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서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미친 척을 하였습니다. 그는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습니다(21:11-13). 꼭 중국 고사에 나오는 것 같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윗이 젊은 시절에 얼마나 위기를 많이 겪고 고생을 많이 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그는 거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어떤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다윗은 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서는 다윗의 허물을 감추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좋아하여 그를 왕궁으로 데려다가 정을 통하였습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을 알고서 다윗은 그것을 감추려고 하다가 잘 되지 않자, 야비한 방법으로 우리야를 죽게 만듭니다. 그런 다음에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자기의 아내로 삼죠. 예언자 나단은, 다윗의 이런 행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심판을 선포합니다(삼하 12:10). 실제로 그 후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큰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그 복수로 암논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다윗을 왕궁에서 쫓아내고, 다윗의 후궁들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동침을 하는 수치스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다윗의 허물은 그의 약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스스로 이런 자기의 약점을 감추거나 더 이상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사랑을 받았던 비결은 그의 힘이나 재능이나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억만장자와 결혼 하려면 잘 빠진 몸매가 아니라 미소. 유머감각. 열정. 낙관적인 사고와 같은 인간 품성이 필요하듯이, 다윗은 사랑 받을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다윗을 다윗 되게 하는 데는 다음 이야기 하나가 더 있습니다.
결론***
그는 예루살렘 성을 수도로 정한 다음에, 그 곳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하였죠. 그런데, 법궤를 싣고 가던 소들이 뛰고 법궤에 손을 댄 사람이 죽는 등, 그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성 밖의 한 곳에 머무르게 했다가, 석 달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성 안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너무나 기뻐서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는, 법궤를 멘 사람들이 몇 걸음을 옮겼을 때,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모시로 만든 작은 옷만을 걸치고, 법궤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습니다(6:14).
한 나라의 왕이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춘다는 것은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춤을 추었던지, 또 그것이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꼴불견이었던지,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에게 빈정거리며 말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합니다.
“주께서 나를 뽑으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를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6:22).
다윗이, 자기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한 말은 진실일 것입니다. 그는 본래 목동으로 자랐고, 명절이나 축제 때면 신명나게 어울려 춤을 추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춤을 추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가 시와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가 ‘끼’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습니다. 본래 그런 끼를 타고났고 또 어린시절부터 그런 끼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살아 온 사람이 왕이 된다고 그 끼가 어디 가겠습니까? 그러나 왕이 된 후로 그는, 왕의 체면 때문에 아마 그렇게 신명나게 춤을 출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날은, 그의 아내가 그렇게 그를 업신여길 정도로, 왕의 체면을 다 던지고 열광적인 춤을 춘 것입니까? 법궤가 자기 뜻대로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뻐서인가요? 그것만이 이유라면, 그렇게까지 열광적으로 춤을 출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 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점잖게 앉아서 찬양할 수만은 없다고 합니다. ‘주님 앞에서’라면, 좀 창피스럽고 천박해 보여도 좋으니, 자기 자신을 잃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춤추고 싶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춤은 그저 그의 끼를 발산하는 춤이라기보다는, ‘주님 앞에서’의 춤입니다. 성서는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6:14). ‘주님 앞에서’라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그는 백성들 앞에서는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왕이지만, 주님 앞에서는 여전히 양치는 목동이요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도 때로는 양치기 목동으로 돌아가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그는 그 모든 것을 벗고 벌거벗은 존재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양치기에서 왕이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시련을 겪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환호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죽임을 당했는가. 그의 성공은 무엇이고 실패는 무엇인가.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일이 이보다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 그런 죄나 실패가 꼭 그 일 이후에만 일어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누구 앞에서도 이런 자기를 풀어헤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누구 앞에서도 풀 수 없는 물음들을 안고 사는 존재이기에, 그는 주님 앞에서 더 힘차게 춤을 추었습니다.
억만장자와 결혼하는 여자는 누구입니까?
에스라인으로 몸매를 잘 다듬은 여인이 아닙니다. 싱싱하고 촉촉한 피부의 여인이 아닙니다.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여자가 아닙니다. 부자에게는 이미 그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미소. 유머. 열정. 낙관적인 사고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결혼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수금을 잘 타고,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시를 잘 쓰는 대 시인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주님이 함께하는 사람’ 이 된 것은 그와 같은 치적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출 수 있는 광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렇게 사랑을 받은 것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광대가 되어 자기를 열어 보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소와 유머감각과 열정과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여인은 억만장자와 결혼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 춤출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광대가 되는 사람은 사람도 얻고 하나님도 얻습니다. 세상도 얻고 세상 너머의 세상도 얻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