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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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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나무를 옮겨 심으며
눅10:38-42
2007.5.13
*어제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저녁에 끙끙 앓으면서 생각했어요. '노동을 하며 살기에 내가 너무 허약한 존재구나. 목사 일 아니면 영 쓸모 없는 인생이구나.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더 잘해야 겠구나'하고 말입니다. 말도 하기 싫을 만큼 피곤했어도 밤에 두 번이나 옮겨 심은 나무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고생 시켜 미안하다. 힘들더라도 죽지 말고 살아 다오'하면서 껍질 벗겨진 곳에 바른 진흙을(이렇게 한 것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상처가 너무 아파 보여서 진흙을 이겨 발랐거든요)매만져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가 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나무들이 빗방울을 맞으며 잎새를 팔랑팔랑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 설교 원고를 읽거나 들으면서 마음과 삶의 자락에 '그 분' 머물 뜰 을 보듬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이 설교는 제가 여러분을 모실 자리 하나 장만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배당은 1999년 11월에 세워졌다. 그때는 겨울이고, 직영을 하다 보니 마무리가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다. 그러나 지금은 예배당 주변의 환경도 달라졌고 주차장도 넓혀야 해서 일을 시작했더니 자꾸만 커진다. 돈도 자꾸만 들어간다. 어제는 하루 종일 인부들과 나무 옮겨 심는 일을 했다. 그런데 막상 나무를 옮기려고 하자 그 나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사람도,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도 그 하나님이 깃들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이 깃든 사람이라야 그가 비로소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신분 상승’만큼 인기 있는 주제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그것을 이루려고 공부하고, 일하고, 돈을 번다. 그러나 마침내 신데렐라가 되는 행운을 쥐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왕자는 한 사람 뿐이고, 재벌 2세라고 해도 백 만 명 가운데 1명도 되지 않는다. 백 만 명이 그런 신분 상승을 꿈꾼다고 할 때 운이 좋은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신데렐라가 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단 한명의 신데렐라 때문에, 신데렐라가 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꿈만 꾸면서, 남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단 한명의 신데렐라’마저도 허상일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좇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우연’이나 ‘운’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머니에 든 것이라곤 기껏해야 복권 한 장을 살 수 있는 돈이 전부인 사람이 그 돈을 털어서 복권을 산다. 수백 만 명 가운데 단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행운을 꿈꾸면서…. 신데렐라도 알고 보면 왕자를 만나는 행운을 잡은 사람이며, TV 연속극 <신데렐라>의 주인공도 지독하게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다. 10원만 모자라도 음료를 내주지 않는 자판기처럼 냉혹하다. ‘신분 상승’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계, 재계, 학계를 막론하고 기득권을 쥔 사람들은 그 권 밖의 사람에게 그 안으로 합류할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화려한 꿈과 각박한 현실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사람들은 하루하루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간다. 다들 바쁘다. 시간을 벌겠다고, 자동차, 컴퓨터, 이동전화를 사보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추가될수록 삶은 그만큼 더 바빠진다. 어디에도 여유가 없다. 쉴 만한 곳도 시간도 사람도 없다. 누구든 이번 주말에 같이 어디 구경이나 가자고 말할 사람이 있는가 생각해보라. 그런 사람을 주위에서 찾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 크게 실례가 될 사람들만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다들 그렇게도 이루고 싶어 하는 ‘신분 상승’ 또는 성공의 꿈은, 그것을 위해서 다른 삶을 다 팽개쳐도 좋을 만큼, 정말 가치 있는 것인가.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역사는 이미 낙원에서 쫓겨난 다음의 역사이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수한 영혼이 아닌 타락한 모습이며, 아벨의 후손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이다. 신데렐라니 콩쥐니 흥부니 하는 인물들은 다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 속의 인물이지 현실의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그들을 칭찬하고 극으로 꾸미면서, 그들만큼 예쁘지도, 착하지도 못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다음에 받는 가장 큰 형벌이 있다면 그것은, 낙원에 살지 못함이 아니라, 낙원에 들어갈 수 없으면서도 늘 그것을 그리워하는 바로 그런 콤플렉스가 아닐까.
우리는 성서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삶의 모범이 된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과 씨름한 의지와 믿음의 인물 야곱, 나라를 적으로부터 지키고 부강하게 한 믿음의 왕 다윗, 복음을 이방 세계까지 전한 사도 바울 등, 본받고 따라야 할 인물들은 많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인물들의 면면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신화의 옷을 입혀 놓고 우리의 이상형으로 삼고 있지는 않는가? 그들은 다들 믿음이 좋고,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유능하고, 성실한데, 나는 그렇지 못하므로 그들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는 한 우리는 그런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잘못 배웠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그들을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치켜세워서 이상형으로 삼기에 바빴지, 그들이 얼마나 약하고, 우리와 똑 같으며, 못난이들 인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늦게 얻은 외동아들까지 바친 믿음의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하면서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쳐야 했던 사람이다. 야곱은 장자의 복을 가로채려고 형을 속이기도 하였고, 사랑하는 여인을 얻으려고 14년간 머슴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사랑하여 강제로 데려다가 아내를 삼고, 그 부하를 죽이기까지 하는 죄를 저질렀고, 그 벌로 사랑하는 자식들이 자기 앞에서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바울은 스스로 말하듯이 그리스도교를 핍박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흔히 우리는 성서가 위대한 것은 이런 훌륭한 인물들의 어두운 면까지도 묘사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성서는 오히려 이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면도 있다’가 아니라 ‘이것이 진면목이다’ 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인물들은 이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큰 성공을 거두거나 신분 상승을 이룩한 이상형의 인물들은 아니다. 그들은, 큰 죄에 빠지기도 하고, 시련을 겪기도 한 사람이다. 그들은, 흔히 옛날이야기의 주인공들처럼, 나중에 잘된 인물들도 아니다. 그들의 노후 삶도 평탄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는 쓸쓸하게 타향에서 죽기도 하고, 어떤 이는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서가 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그들처럼 살고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위인전기와는 다르다. 우리는 그저 성서를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것은 거울처럼 우리를 비추어 우리 모습을 찾게 해 줄 것이고,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게 해 줄 것이다.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완벽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인간적이고 약한 사람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음과 삶에 빈자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 자리에 주님이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라고 부른다면, 그 위대함의 비밀은 바로, 그들의 삶에 이와 같은 ‘하늘이 깃들일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한번은 제자들과 함께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의 집에 들르셨다. 마르다는 예수를 집으로 모셔들이고, 여러 가지로 접대하느라 분주하였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언니를 돕지 않고 예수님 발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보다 못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가서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였다(눅 10:40). 예수께선 그런 마르다의 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마리아에게 잘못이 없다고 두둔하신다.
우리는 흔히 여기에서 마르다는 잘못했고 마리아는 잘했다고 쉽게 판단을 하고, 마리아가 잘한 것은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라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인 셈이다. 예수께서 정말 이런 교훈을 말씀하려고 하신 것일까?
누군들 자신이 마르다의 입장이 되면 화가 나지 않겠는가? 집안에 잔치가 있어서 목사님과 성도들을 초대했다고 하자.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인가. 언니가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오셨다. 언니한테 부엌을 맡기고는 목사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손으로 턱을 괴고 말씀을 듣는 동생이 있다면 누가 그 동생을 좋다고 하겠는가?
마르다가 동생을 못 마땅해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어찌하여 예수는 마리아를 나무라지 않고 두둔하는가? 예수는 여기에서 두 사람이 한 일을 비교하여 어느 것은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은 덜 중요함을 말하고 있지 않다. 마르다가 예수와 그 일행을 맞아들이고 접대한 것은 문제 삼을 것이 없다. 어떤 주석가는 마르다가 음식을 너무 많이 장만한 것을 예수께서 문제 삼으셨다고 보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예수께서 문제 삼으신 것은 많은 음식이 아니라 마르다의 마음이다. 마르다의 열심은 좋으나 그런 열심 때문에 동생을 비난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도 직접 동생에게 가서 말하지 않고 예수께 와서 일러바쳤으니 더욱 문제이다. 마르다는 꼭 일손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동생에 대한 미움이 앞서서 그리하였으리라. 예수는 그 마음을 보신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41절).
이 말이야말로 마르다의 상태를 잘 설명한 것이리라. 예수는 마르다를 만나고 싶어서 그 집에 들렀는지도 모른다. 예수가 원한 것은 진수성찬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쁘게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를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에 분주하다 보니 정작 제일 중요한 마음이 들떠 버린 것이다. 바쁘다는 것(忙)은 곧 마음(心)이 망가짐(亡)을 뜻한다 하지 않는가! 더욱이 예수는 두 자매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싶었을 텐데, 예수를 접대한다고 하면서 언니가 동생을 헐뜯기까지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마르다는 일하는 데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이 왜 그렇게 바쁜지를 잊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영접하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인데, 도리어 그분을 난처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42절).
여기에서 정작 필요한 한 가지 일은 무엇인가? 주석가들은 그것은 ‘영적인 일’이며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도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 뜻인가? 그렇다면 마르다가 한 부엌일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마리아가 한 말씀 듣는 일은 소중한 일이라는 말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라는 구절은 바로 앞의 41절과 한 덩어리로 봐야 한다. 그것은 이런 저런 일로 바쁜 나머지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데 대한 지적이다. 이를테면, 혼인 잔치에서 중요한 건 신랑 신부의 밝고 행복한 얼굴인데, 혼수다, 신혼여행지 예약이다, 주례 예약이다 뭐다 하면서 준비하는데 지쳐서 결혼식 당일에 풀이 죽은 모습이라면 정말 ‘필요한 한 가지 일’을 잊은 셈이다. 아들의 생일상을 준비하는 어머니가 상을 잘 차리려고 하여 너무 바쁜 나머지 정작 주인공인 아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면 ‘필요한 일 한 가지’를 잊은 것이다. 그러니 ‘필요한 일 한 가지’는 ‘영적인 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은 무엇인가? 예수는 어찌하여 언니를 돕지 않고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두둔하였는가? 단지 말씀을 들었기 때문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 곁에 앉아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에 선생에게서 배우는 학생이 취하는 전형적인 자세라고 한다. 당시의 유대교 선생들은 여자들이 배우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의 발 곁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은 그만큼 열의가 있고 용기가 있는 행동이다. 예수는 그것을 좋게 보고 칭찬한 것이리라.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과연 진정으로 예수를 영접했느냐는 것이다. 예수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그 집에 들른 것이다. 그런데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어서 도저히 예수가 말을 붙일 겨를이 없었다. 여유가 없었다. 동생을 너그럽게 보아줄 여유도 없었다. 마르다는 예수께 많은 음식을 대접하였겠지만, 예수는 그에게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마르다는 <사람>이 아니라 <일>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께 음식을 대접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는 그에게 잠시 머무를 수 있었으리라. 일 대신에 사람을 택했던 것이다. 마리아는 그런 삶의 여유와 격이 있는 사람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도 나오는데, 그곳에서도 마르다는 시중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요 12:2). 그런데 거기에서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가 곧 마리아이다(3절). 이것을 보고 있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하고 안타까워했을 정도로, 그의 행동은 타산적이 아니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일꾼의 300일 품삯이니 우리 돈으로 500만원은 족히 되는 큰 액수이다. 그런 것을 아낌없이 쏟아 부을 수 있는 마리아는 진정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돈> 보다 <사람>을 높이는 사람이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가 같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으나, 적어도 마르다에게서는 보기 힘든,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찾기 힘든,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하겠다. 예수는 갈릴리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셨지만, 정작 그를 영접한 사람은 잘나고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어서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 창기,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였다. 성공을 향해 치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없는 것이 그들의 마음에는 있었다.
이것이 예수가 깃들일 수 있는 자리이다.
하나님이 머무실 자리이다. 여기가 하늘나라의 나무를 옮겨 심을 자리이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끝부분).
성경 본문에는 마리아의 목소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다. 예수는 그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칭찬하였으며, 이어서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 말씀은 전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결론과 같은 것인데 무엇인가를 확증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이다. 이를테면 건강이나 생명, 가까운 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성공 또는 신분 상승을 위해서 부단히 경쟁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은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다. 어느 분야에서건 한 번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그 자리를 차지한 기쁨은 순간이고 그 다음부터 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밀려나는 공포에 시달린다. 누군가가 그 자리를 평생 보장해 주면 좋겠으나 아무도 그것을 보장해 줄 사람은 없다. 그것을 빼앗으려고 쉬지 않고 도전하고, 대들고, 공격하는 사람들뿐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하고 분명히 보증을 해 준 것은 이런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마리아는 그저 남들을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용기 있게 사는 삶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각박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일>과 <돈>이 아니라 <사람>과 <하늘>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의 삶 속에는 ‘하늘이 깃들일 자리’가 있었다. 예수는 그 자리에서 잠시 머물 수 있었다. 그런 삶은 누구와 경쟁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누가 빼앗으려고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쁜 오늘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겠다. 우리 안에도 그런 소중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늘이 깃들일 자리’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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