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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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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十字架와 식탁
요6:1-15( 막6:30-44, 마14:15-21, 눅9:10-17)
*2007년 5월27일 주일 설교 원문입니다.
왜 이토록 빨리 원고가 올려 지는가 하면,
토요일엔 평창으로 연회남선교회 채육대회를 다녀와야 하고,
주일엔 <기쁜 가게>후원 음악회를 해야 하며,
크고 작은 지방 일들을 이번 주에 마쳐야 다음 한주 동안 연회 감리사들과
중국을 다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고를 쓰면서 다음 주 설교에 대해서 궁리하기는 목회 수 십 년 만에
흔치 않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십자가와 최후의 만찬과 식탁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혼자서 무얼 먹거나 마시거나 해서 독점하지 않고 <나누었다>는데 있지 않습니까? 이 외에 다른 공통점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이 세 경우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간섭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쳐 쪼갰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과 나에게 그의 몸을 나누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자신을 쪼개기 이전에 여러 차례 같이 밥을 나누어 먹을 수 없는 이들과 함께 밥을 나눠 드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인들의 졸렬한 비난을 들으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임종 직전에 음식을 차려 놓으시고 제자들과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어 드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후에도 이렇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을 때 나를 기념 하여라!
이 모두 몸과 삶과 정신과 물질을 <나눈다>는 공통분모 속에 배치된 장면들입니다. 이러고 보면 예수의 중심은 <나눔>이라고 해서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고,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나, 따른 다는 것은 결국 그가 사셨던 것처럼 나누며 산다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는 믿음의 정체성이고 교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가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우리 또한 그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죠.
060-700-0070 이런 번호 아세요? 주말 오후에 T.V 화면 우측 상단에 나오는 ARS 번호입니다. 그 번호 아래에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숫자가 나옵니다. 후원 성금액수의 표시죠. 어떻습니까?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를 볼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전화를 돌려서 2000원을 기부하지 않았는데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리퀘스트’란 이름으로 불치 혹은 난치병으로 신음하거나 몸 져 누어있는 부모와 동생들을 거두는 소년 소녀 가장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펼쳐집니다. 사회자의 볼에 눈물이 흐르면 어김없이 스튜디오의 방청객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곤 합니다. 방송이 마칠 무렵에는 화면 속의 숫자는 어느 덧 1 억 원을 훨씬 넘을 때가 많습니다. 한 번의 전화로 2,000원을 후원한 사람들은 스스로 적은 금액이라 할 것이지만,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 했던 가요! 그렇게 모인 후원금이 억 대를 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뿌듯합니다. 아, 이런 게 사는 거로구나! 이 때 비로소 우리가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2000원을 기부하지 않고도 이런 자기 감동을 누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나눔>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니 <나눔>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인간답게 하고, 잃었던 감동을 되찾게 하고, 자신이 사람인 것에 대해서 고마움을 일으키는 값진 행위가 아닙니까?
이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나눔은 꼭 많이 가져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게 됩니다. 콩 하나를 둘로 나누어 먹듯이 그렇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니, 재물이 먼저가 아니라 베푸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인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는 나누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땅은 하느님의 소유고 재물은 하나님이 위탁한 것임으로 사람은 다만 땅과 재물의 청지기임을 망각한 때문인 것이죠.
나눔은 재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나눔으로 삶이 풍요로워지고 소망스러워집니다. 사랑은 베풀수록 커진다고 합니다. 슬픔이 깊었을 때 슬픔을 나누면 슬픔이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을 나누면 기쁨이 배로 늘어난다고들 합니다. 지식은 베푼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덕은 쌓을수록 세상을 밝게 하고 신선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물심양면으로 나누고 베풀며 사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생동감이 넘치고 살아야 할 의미가 충만할 것입니다.
“베풀어야 오래 산다.” 이것은 미국 미시간 대학 사회학 연구소, 브라운 박사의 연구결과입니다. 423쌍(800여명)의 노인부부가 노년기의 삶을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조사하여 보니, 남한테 베푸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노인들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노인들이 베풀며 사는 노인보다 일찍 숨질 가능성이 두 배나 높다는 뜻입니다(한겨레, 11월 16일 9쪽).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성구도 있지만, 또 삶의 질을 보지 않고 무턱대고 장수가 복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여하간 나누는 삶이 우리의 수명연장에도 유익하다는 연구결과는 새삼 ’나눔‘의 삶이 바람직하고 좋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런데 지구촌 사람 중에 하루에도 굶어 죽는(餓死)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지구촌에 먹을 것이 없어가 아니라 전 지구촌 인구의 20%에 해당한 사람들이 지구촌의 자원 80%을 독점하고 베풀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라 나눔이 없고 생명경외(敬畏)가 메말라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많은 기적 중에서 4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은 떡(보리)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 천명을 배부르게 먹인 기적 하나뿐입니다. 4 복음서에 다 기록되었다는 것이 우연일 수 있고 또 그만큼 어느 기적보다 인상 깊은 기적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5병2어 기적을 5000명 급식(給食)기적이라고 하는데, 사실적으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해석 외에 달리 해석할 여지를 많이 가진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 급식기적은 풍랑을 잠잠하게 한 기적(마 8:23-27)과 함께 자연기적에 속합니다. 치병(治病) 기적, 귀신축출 기적 및 자연기적 등은 오직 예수만이 일으킨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당시 다른 사람들도 기적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막 2: 22-34의 바알제불 논쟁 참조). 따라서 기적행위로써 예수의 정체를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당시의 사람들은 당시의 세계관에 의해서 말한 것을 현대인이 자의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위에서 5병 2어 기적의 해석이 여럿이라고 말했는데 그 중에서 3개를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는 이 기적이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인 기적과 모양이 비슷하다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이른바 모세 유형론적 해석이죠. 출애굽기 16장은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회중이 엘림과 시내산 사이의 광야에서 그들의 지도자 아론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리워 토해낸 원망입니다. 그 때 야훼 하나님은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릴 것을 말씀하시고 “저녁에는 고기(메추라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만나)으로 배불리”(16: 2-12) 먹이십니다. 5병2어 기적본문과 출애굽기(16: 1-)에 유사한 내용이 있죠? 즉 광야, 고기와 떡, 불평(이스라엘백성과 제자들), 배불리 먹는 것 등,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5병2어 기적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과 같은 유형으로 본 것입니다. 즉 본문의 5병이어 기적은 구약에서 모세가 백성들을 메추라기와 떡으로 배부르게 먹이었듯이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모세처럼 5병2어로 무리를 배불리 먹였다는 것을 말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모세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크신 분으로서 예수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 5 천명 급식기적이라는 것이 예요.
둘째로는 5병2어 기적을 성례전적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초대교회의 성만찬예식의 뿌리는 예수의 최후만찬에 있습니다. 예수는 최후만찬에서 “그들이 식사하는 중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막 14: 22) 하시듯이 초대교회는 성만찬예식에서 그리고 본문 기적에는 같은 말들이 나타납니다.
<떡을 드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여기 4문장은 모두 동사들로서 초대교회의 성만찬 전승에서 사용된 말들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5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초대교회의 성만찬 전승에서 기적이야기로 발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초대 교회에서 실행되던 성만찬 예식을 오병이어 기적으로서 ‘역사화’했다는 해석인 것이죠. 이런 해석은 결국 본문의 초점은 기적에 있기보다는 떡을 떼며 거행된 성만찬 예식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성만찬 예식은 이렇게 중요하고 놀랍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는 거죠.
셋째는 나눔의 기적입니다. 폭풍진압이라는 자연기적은 흉흉한 바다, 폭풍의 바다를 향해서 예수가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명령을 하자 바다가 조용해진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떡과 물고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나는 내용이 없습니다. 복음서의 많은 기적이야기 양식(Form)에 따르면, 기적은 군중들의 ‘놀람’과 ‘찬양’으로 끝나는데 우리의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병이어 기적은 전형적인 기적이야기 양식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기적이야기로 읽기보다 소유의 분배 또는 나눔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는 거죠.
광야에 운집한 군중들의 먹거리가 문제가 됩니다. 요한복음 본문에서는 예수가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수의 질의를 받은 필립의 계산에 의하면 “이들 각 사람에게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200 데나리온어치의 떡을 가지고도 오히려 부족하겠습니다”(요 6: 7)고 반응하고. 안드레는 한 아이가 보리떡(가장 가난한 자의 먹거리)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6: 9)고 대답합니다. 필립과 안드레의 계산은 매우 이치에 맞습니다. 합리적입니다. 더 읽어 가면 공관서의 본문에서는 군중의 먹거리를 먼저 걱정하는 측은 요한복음과 달리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제 각자 식사를 해결하게 하겠다는데, 예수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자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우리가 가서 떡 이백 데나리온어치를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란 말입니까?”(막 6: 37). 불평(불경)스러운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은 예수는 그 현장에 떡이 얼마나 있는가? 고 묻고 제자들은 5병2어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듯
떡을 들고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요한복음에서는 사람들에게 직접) 주시며, 나누어 주(分配)라고 명하십니다. 결과는 그들이 만족하게 먹고도 남은 것을 모으니 12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가진 것을 나누니 모두가 만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유의 독점이 아니라 분배를 말한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5병2어의 기적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굳이 기적이라 할 것이 있다면, 도시락(모든 정통 유대인은 항상 정결 의식에 벗어나지 않게 깨끗한 음식을 먹으려고 각자의 음식을 자기의 바스켓에 지참하였다고 한다. W. Barclay, The Gospel of Mark, p. 159)을 지참한 사람들이 자기들만 음식을 먹지 않고 먹거리 없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은 그것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을 기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나눔의 교훈으로 해석하는 것은 믿음이 깊지 않거나 경건하지 않다고 주장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당신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옳길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믿는다는 말입니까? 교리를 믿는 것이나 문자대로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의 깊이를 재는 기준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떡과 물고기가 5 천명이 먹고 남을 만큼의 양으로 부풀어 나는 과정이나 내용이 전무합니다. 다만 축사하시고 떼고 나누어주는 것( 예수가 제자에게, 제자들이 사람들에게)만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소유는 하나님이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그러면 그 믿음을 삶에서 실천하는 방법으로 나누며 산다면 그게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지 않거나 못하는 반면 내가 그렇게 산다면 그건 틀림없는 기적입니다.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요. 이 지구촌의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한 끝없는 비극은 그 기적이 없어서 아닙니다.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나누는 기쁨을 오랫동안 맛보려고 <기쁜 가게>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ARS 응답기에 빠른 속도로 기부금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감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쁜 가게를 시작한다고 모두 거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십시일반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2000원이 마침내 1억을 만드는 기적처럼 말입니다.
다시 들어 보세요. 예수그리스도, 최후의 만찬, 식탁의 공통분모는 무엇입니까? 나눔입니다. 이 공통분모가 우리 믿음의 주체이며 생명입니다.
혹시 여러분 이 번호 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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