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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

고린도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007 추천 수 0 2011.11.16 22: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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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2:12-31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그리스도의 몸
고전 12:12-31
    swe 12기를 홍천에서 마치면서

                  *수채화 같은 홍천의 하나님 품안에서
                    수려한 벗들과의 행복한 3박4일의 동거는
                    흙으로 빚어진 몸을 입고 잠시 녹색의 지구에 사는 동안
                    누렸던 그 어떤 즐거움보다 크고,
                    열광했던 그 어떤 감격보다 황홀했습니다.  
                    이 마음이 이번 주 설교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전심으로 봉사하고 기도하고 헌신했습니다. 우리들의 소박하고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시간시간 염려를 기쁨과 환희로 바꿔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달았고 식당의 밥은 기쁨이었으며 성도들의 교제는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봉사했던 교우들은 천사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시작되어서 성령으로 끝난 <서울 워크 투 엠마오 12>기에 저는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이번 영선 훈련을 위해 수고하고 봉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 <엠마오 가는 길>이 필요하냐고 묻는 이들에 대한 답입니다. 왜 우리는 봉사하고 헌신하는가? 엠마오 가는 길은 우리에게 뭘 주려고 하는가?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많았지만, 각각 자기가 받은 은사만 내세우고 서로 화합하지 못했기에 바울은 고전 12:1-10까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어서 오늘의 본문인 ‘그리스도의 몸’ 또는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두에서 바울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문을 꺼내지요. 즉 그는 여기서 일반적인 신체 구조나 원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서두부터 파격적이라 할 수 있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천상의 영역에서 찾지 않고 오늘 우리 가운데서 찾는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체들이라면 그것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은유를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바로 앞 10장에서도 출애굽 사건 때에 모세가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한 일을 두고, 자신의 조상들이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동반자인 신령한 바위로부터 물을 마신 것이고,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다고 합니다(고전 10:1-4). 이것은, 크리스천은 같은 걸 먹고 마신, 한 근원에 잇대어 사는 존재들임을 강조하기 위한 은유입니다. 한 우물의 물을 먹는 사람은 한 동네 사람이요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성령에서 마신 사람, 그리스도라는 한 바위로부터 물을 마신 사람은 저마다 출신과 신분이 달라도 심지어 국적과 인종이 달라도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엠마오 가는 길 3일의 여정은 바로 이것을 경험케 하여 줍니다. 목사 부인이거나 장로거나 권사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누구든지 ‘한 몸’을 경험케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기초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란 우연하게 모인 사람들의 친목 단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한 식구 한 공동체임을 말할 때 흔히 “한 솥 밥 먹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먹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같은 데서 나는 것을 함께 먹는 게 중요합니다. 교회는 한 솥 밥 먹는 사람들인데 그 밥이 그냥 밥이 아니라 말씀의 밥이요, 한 우물 먹는 사람들인데 그 물이 그냥 물이 아니요 성령의 물이며, 한 바위에서 마신 사람인데 그 바위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엠마오 가는 길 3일의 여정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재료로 만들어진 밥을 함께 먹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며 한 몸>이라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분 그리스도로부터 마시고 한분 성령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신다는 것은, 물론 건물이 없이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교회가 있고 훈련이 있을 때 훨씬 더 우리 마음에 와 닿게 깊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암교회가 이 건물에서 예배하는 것을, 엠마오 가는 길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가를 우리가 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매우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센터가 생긴 것을 뜻합니다. 샘물이 솟는 샘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 자주 이곳에 와서 함께 마시고 배부르고 즐거워하는 체험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그것을 확증시켜주는 것이 엠마오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는 센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삶에 필요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난 교회가 샘이라는 은유가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달리 표현하면 발전소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연결되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도시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교회를 이런 샘이나 발전소로 생각하지 않고 슈퍼마켓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람이 문제만은 아닙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많이 그 본질을 벗어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값싼 물건을 파는 곳이면 언제나 다른 슈퍼로 갈 수 있듯이, 교회도 언제나 필요에 따라서 그렇게 옮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영혼들을 공허하게 만들고 허약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무력해진 <교회>를 통해서 성령의 하나 된 체험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도와 교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샘의 근원에서 멀어진 나무가 건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와 같지요. 우리 믿음의 근원을 무한히 솟아나는 샘에 두어야 하는데, 잠시 문을 열었다가 닫기도 하는 슈퍼마켓이나 구멍가게 같은 데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는 욕망의 사회에 지배당해 있습니다. 그래서 샘이 말라 있습니다. 엠마오 가는 길은 목마른 영혼들에게 샘물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해 주고, 샘물에 잇대어 사는 기쁨을 발견하게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교회 자리가 유전(油田)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까요? 오색약수터 같은 약수터가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통 들고 달려올 것이며, 금세 호텔 짓고 관광지를 만들고 그러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리스도 반석에서 나는 샘물, 성령에서 마시는 샘물이 유전보다 못합니까? 오색약수터보다 못합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 아닌가요? 문제는 우리가 그런 자부심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부심과 한 뿌리 의식으로 먼저 하나가 되지 않으면 개인도 공동체도 힘을 얻을 수 없고, 주위 사람들도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누가 이 동네에 멋진 건물 지어놓고 하는 일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기만 한다고 소문이 날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이 귀한 선물을 성암교회라는 반석, 이 샘물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 과제가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 된 경험에서 출발한 고린도교회였지만 교우들 간에 심한 분열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빈부격차, 배우고 못 배운 사람 사이의 갈등 같은 것이 원인이 되었겠지만, 바울은 그것을 지체들이 서로 무시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하고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발보다 손이 대접받고 귀보다 눈이 더 대접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발이, 귀가 화가 난 것입니다. 바울은,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으며 또 온몸이 다 귀라면 냄새는 어떻게 맡겠느냐고 하면서 약한 지체를 달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눈만 중한 게 아니라 귀도 중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눈이 둘이 있어야 보기 좋지 귀의 자리나 코의 자리에 눈이 있다면 징그러운 괴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서로 다른 지체를 두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전체가 한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즉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른바 “짬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데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하며,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주는 것이 지체가 하나가 되는 대원칙입니다.

  2000여 년 전에,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이런 비유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다 하나이다. 우리는 한 거대한 몸의 지체들이다.” 또 다른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도 이와 비슷한 비유를 든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세계의 시민이며 세계의 한 부분이다. 누구든지 이성을 갖고 있고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다면 손이나 발이 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

  당시의 사회는 황제, 귀족, 평민, 그리고 노예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는 고대 노예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귀족이나 평민이나 노예가 모두 다 전체로서 하나의 몸을 이루는 지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파격적이며,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적어도 말 자체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누가 누구에게 어떤 의도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이러한 말을 한 철학자들의 진정한 뜻이 무엇이었든 간에, 로마의 통치자들은 이와 같은 ‘몸과 지체의 비유’를 가지고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한 평민들과 반항심이 가득한 노예들을 이렇게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노예이든 다 같은 지체이며 전체로 한 몸을 이룬다. 그러니 여러분이 우리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곧 여러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B.C. 494년 경 메네니우스 아그립바(Menenius Agrippa)는 당시에 유행하던 ‘몸과 지체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여 불만 계층을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구호들에서는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 허울 좋은 것이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약한 사람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거짓 이데올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아무런 원칙 없이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는 것은 속임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원칙을 분명하게 한 것입니다. 강한 지체가 약한 지체를 향하여 쓸데가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약한 지체를 더 돌보아주고 볼품없는 지체를 더 화려하게 입혀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것은 세상 원칙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TV에서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를 재미있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사자가 영양을 물고 늘어지는 그 적나라한 장면을 보면서 은근히 대리만족을 느끼고 인간도 본성에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존재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자도 배가 부르면 양과 같이 물을 마시면서도 양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지렁이 같은 것은 생태계의 파수꾼으로 알려져 있고 동물들 가운데 평화롭게 사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자나 표범이 양을 물고 늘어지는 그런 특수한 장면을 자연의 법칙인 양 확대하고 은연중에 인간도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이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뿐 아니라 이 성암 센터에서 이런 역량을 모으고 집중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일들을 잘 하는 큰 우물이 되어야겠습니다. 보세요. 우리의 소박하고 진지한 헌신을 통해서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이어가고 있고, 이름을 달리 쓰면서도 하나의 교회라는 공감대를 만들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엠마오 가는 길을 통해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의 의미를 넓혀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더욱 우리 자체 안에서 약한 지체들을 돌보고 그들을 더 존귀하게 대접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물론, 지역의 교회들과 우리 사회 속의 약한 지체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성암교회가 춘천의 교회역사를 새로 쓴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원칙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처럼 강한 자에게 약한 자가 굽히고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굽히고 부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나누고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는 시스템입니다. 26절에 말한 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는 운명공동체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몸짓 가운데서 포옹보다 더 아름답고 따뜻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짐승들이 못하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포옹은 우리말로 하면 품어주는 것입니다. 품는 것은 몸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지체로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손만으로, 가슴만으로, 팔만으로, 머리만으로 우리는 누구를 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말로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지체들이 합력할 때 팔로 안으면서 손으로 등을 다독이고 가슴으로 따뜻하게 품어주고 볼을 부빌 수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 가는 길의 3일 여정은 끝나면 생기는 하나의 행위가 먼지 아십니까? 포옹입니다. 누구든지 끌어 앉는 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돌아와서도, 집에서도 누구와도 그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몸의 행위만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 먼저 그렇게 하고 삶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체들이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지체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랑이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 지체들은 각각 다르지만 하나가 되어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품을 때는 우리 한 사람의 몸으로 되지만, 더 넓은 지역 더 많은 사람들을 품으려고 할 때는 우리 전체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어서 하나의 몸, 하나의 마음을 이룰 때만 할 수 있습니다. 이게 큰 교회입니다. 우리 성암 교회는 이런 큰 교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큰 교회가 아니라 누구나 커지는 그런 큰 교회 말입니다. 이게 엠마오 가는 길에서 경험되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 혼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들을 우리가 이 성암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때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배하고 있는 이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마시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반석, 성령의 샘물이 되도록 우리가 모두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증거 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번 엠마오 가는 길 12기는 은혜였습니다. 하나의 교회와, 성도, 가족을 체험하고 우리가 어떤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 지를 확인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체험과 감동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지체들의 조건 없는 헌신과 봉사와 나눔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안에 아직 일치하지 못하는 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일치하게 하는 길은 회의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한 근원에서 먹고 마시는 경험이 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경험이 없이 그렇게 하나 되는 경험이 없이는 아무리 우리가 회의를 거듭하고 논쟁을 거듭해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모습 이상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중한 그리스도의 몸을 그저 자기들끼리 모여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작은 암자로 만들 것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생수를 마시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센터로 만들 것인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이곳에 그리스도의 센터 그리스도의 반석 성령의 샘물이 솟아나게 하는 주님의 일꾼들 되기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엠마오 가는 길 12기 봉사자들과, 영성체험에 참여한 교우들과, 앞으로 지속적으로 참여할 이들에게 큰 우물의 기쁨을 선물로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빕니다.

주님,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그리스도의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시게 하시고
한 성령을 마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한 우물의 물을 마신 우리, 한솥밥을 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눈이 잘나도 귀가 없으면 소용없고
귀가 잘났어도 코가 없으면 안 됩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체가 더욱 소중한 지체입니다.
약한 지체를 가장 소중하게 여김을 받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소서.
내가 누군가를 두 팔로 끌어안을 때
더 이상 내 손은 나를 돌보지 못합니다.
지체들만 따로 있으면 근육운동을 할 뿐이지만
지체들이 누군가를 끌어안을 때
사랑의 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성암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품을 이루게 하소서.
성령의 샘물이 솟아나는 그리스도의 반석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시는
그리스도의 센터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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