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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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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서로에게 하늘이 되라
마7:7-12
* 이 설교는 아주 오래전에,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많은 뒷날 어느 때 했던 것입니다. 이 번 주일 오후에 지방 청장년들이 예배 하는데 설교를 하라고 해서, 가급적이면 청년 목사들에게 부탁을 하라고 사양을 했건만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청하기를 거듭하기에 마지못해 그러마 해놓고 기도하는 중에, 오늘 아침 전화기의 문자메세지가 주는 자기력에 끌려 더듬거리며 기억을 되살려 적었습니다.
구하면 주겠다. 찾으면 얻게 하마.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겠다.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얻고, 찾는 사람은 뭐든지 차지하고, 문을 두드리면 안되는 게 없다(7-8).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조금 바꿔 보았습니다. 곰곰이 이 문장을 읽거나 들을 때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듭니까? 정말 좋겠다. 뭐든지 가능하니 무슨 걱정이 있겠냐 싶습니까? 아니면 누구든지, 뭐든지 구하는 대로 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겠으며 이것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유익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기독교인들 치고 이 말씀을 싫어하거나 염려하거나 걱정하며 읽는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저는 괜한 걱정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걱정이 됩니다. 이 말씀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니 다행이지만 만약 그대로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목사가 되어서 이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것은 아니시지요? 그렇다고 여기신다면 묻겠습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 뭐든지 구하면 다 됩니까? 마치 동화에 나오는 마법의 램프 같은 구절이란 말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구했는데 왜 아무것도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안 되는 것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만이라도 이 말씀이 무슨 전지전능의 요술방망이 쯤으로 여기는 생각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달리 성경을 좀 보시고 삶에 적응하시라는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아무 고민 없이 냉큼냉큼 받으려고 하는 거지 속성을 좀 버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비롯되었는지 봅시다.
대부분 가질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질 것’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가엾은 사람들(마15:32), 먹을 것 이 없어서 굶주려 길가에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배불리 떡과 고기를 먹이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배고픈 사람들, 뭔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절박한 사람들이 그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세 번째 등장하는 ‘문을 두드려봐라’하시는 말씀은 그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누가 문을 두드립니까? 부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기 위해 남의 집 문을 두드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아주 힘든 일이라 웬만해서는 포기하게 됩니다. 외판원이 되어 처음으로 남의 집 문을 두드려 본 분 있습니까? 쉽습니까? 그것도 구걸을 하기 위해서라면 더욱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뭐 거창한 게 아닙니다. 좋은 자동차요? 근사한 집이요? 많이 배운 사윗감요?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찾지 않아도 될, 이미 넉넉하게 받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는 배가 고프면서도 밥 달라고 구걸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당시의 기득권층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올무였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어서 그리 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도 도움을 청할 수도, 하나님께 탄원할 수 도 없는 거였습니다. 그저 숙명적으로 여기고 짐승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더러 용감하게 그러라는 것입니다.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1절입니다. 기득권층만 아니라 그 버러지 같은 인생들과도 하나님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도 그렇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으면, 정말 예수님이 그러란다고 그렇게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총독이나, 대제사장이나, 사두개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이 그들을 맞아들여 밥을 주고 집을 주고 그랬을까요? 그러면, 그냥 예수님이 선언의 차원에서 하시는 빈 말인가요? 희망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신 다음에 이어서 12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실 것이다....그러므로 너희는 또 이렇게 하라(12절)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자녀로 받아들이신 것처럼 너희들도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거들랑 못된 기득권층처럼 굴지 말고 기꺼이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다른 사람이 구하면 들어주고 찾으면 찾게 해주고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네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하신 일을 이제는 네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 늘
박노해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 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 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어 주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세상이 목사가 없거나, 교회가 모자라거나, 기도가 짧거나, 성경 지식이 박약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에게 하늘이 되어 주려는 실천이 박약하고, 나만 더 많이 갖으려는 욕망이 사람들의 기도 가운데 뱀처럼 숨어서 활동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청장년 여러분!
제발 기성 교회의 그릇된 신앙 이해를 벗고 똑바로, 예수님이 원하는 똑바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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