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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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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교회를 안 다닐 수 없다면
행19:1-7
*이 원고는2007년 7월29일 설교입니다.
백두산 여행이 토요일에 끝나기 때문에 서둘러 설교 준비를 마쳤습니다.
여행을 통해 문장과 언어 속에 거룩한 양분히 가득 고이게 될 것입니다.
1절에 아볼로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앞에서 보면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하며, 주의‘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열심히 예수에 관한 일을 말하며, 정확하게 가르쳤다고 합니다(행 18:24-25). 맨 끝에 보면,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 세례를 몰랐어요(25b). 본문에 보면, 바울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에베소를 방문하게 될 때, 거기서 (아마도 아볼로의) 몇몇 제자들을 만나“여러분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들은“성령이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몸으로 어떻게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초대교회 사람들은 많이 배운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지식 이상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갈릴리에서 활동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신자들에게 부어 주십니다(행 2:33). 사도행전 전체는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는가를 보여줍니다(1:8). 당시의 그 열악한 교통 환경 속에서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은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거죠.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빌립, 바울, 일곱 집사, 스데반과 같은 인물들을 묘사할 때, 꼭 그들은 성령이 충만했다는 구절이 빠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땅 끝까지 퍼져가는 비전은 사실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주의적,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갖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 그런 관점이 있었다면, 십자가를 지는 대신 많은 기적과 카리스마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면서 별 문제 없이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고난 받고 부활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우선은 그들에게 고통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유익하다고 보았습니다. 성령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아무리 능력이 크시다 해도, 육을 가지신 예수는 이스라엘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유다와 사마리아의 한계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요 14:26). 그래서 이젠 예수를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도 직접 만난 사람 이상으로 예수를 알게 되고 고백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생전의 예수를 뵌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뵈었다고 고백하고 있잖아요? 그게 모두 성령으로 인해서 아닙니까?
누가 기자는 이런 경지를“성령 충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어요. 충만이라는 개념은 본래 그리스적 개념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프뉴마(영)를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사물에도 깃들어 있고 사람의 몸을 채울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기(氣)와 같아서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거나 조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영(루아흐)은 인격적인 분이어서 사람들이 이용하거나 조종할 수 없습니다. 누가 기자는“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적 영 개념에 익숙한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을 친숙하게 이해하게 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의 프뉴마처럼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사로잡는 분임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성령을 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죠. 오늘날 기 수련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기를 주입하기도 하고 기로 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성령이 이런 물질적인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성령 충만”이라는 용어에서 이런 기가 자신을 채우는 것을 연상하고,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정성을 들이는 만큼 성령을 많이 받고 능력을 받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령 충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는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즘식으로 표현하면,“성령의 시스템 속으로”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예수를 만났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회의 작은 사람들인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배운 사람들보다 신념 있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땅 끝까지 겁 없이 도전하는 능력의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그런 성령 시스템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 시스템 때문에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 성암 교회는 교권주의를 극복하고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를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목회자들 스스로도 권위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목회자의 역할에 있어서만 권위를 갖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질서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일절 제도적인 권위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주도적인 구성원 한두 사람이 교회를 좌우하는 낡은 모델을 깨고, 누구나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은 대로 헌신하고 참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그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서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이 되지 않겠어요?
성령의 시스템에 들어간 사람은 처음에는 별로 대단한 사람 같지 않은데, 자기 능력으로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에 어느 샌가 보면 위대한 생애를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잘나고 가진 게 많다고 자만하는 사람들, 교회를 다녀도 무슨 직분을 받은 것으로 자만하고,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단한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아주 작고 종재기 같은 사람이 됩니다. 하찮은 이익이나 일에 매여서 평생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혼자 노를 저어서 대양을 건너려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성령의 시스템에 들어간 사람은 노를 젓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지만 인생이 그 노력만으로 되지 않으며, 때로는 순풍이 아닌 풍랑이 일어도 그것을 타고 내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성령에 자기를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인 거죠. 요즘 저는 김우영 이라는 다큐멘타리 감독의 책들을 읽는데, 굉장히 감동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막 성령의 시스템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놀라운 일들이 마구 일어납니다. 그가 성령의 시스템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명문학교가 왜 명문이 되는지 아세요? 명문이 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성령이 있다는 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내렸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와 같이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이런 모습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죠.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뜨겁고 신명났던지,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다는 겁니다(행 2:13).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이런 빠져듬과 황홀경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론적이거나 냉소적이기보다는, 빠지고 반하고 미치고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한 편으로 설교 말씀을 경청하고 201반 성경공부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뜨겁게 찬양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성도의 친교 속에서 푹 빠지고 봉사와 헌신에 열의를 다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사를 나누는 희열을 경험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해 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성적인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사람에게는 있음을 다들 느낀다는 의미죠. 사람은 아폴로니우스적인 것(이성적인 것)만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것(취하고 빠져듬)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황홀경을 느끼는 것은 외부의 물질에 의해 취하는 때가 아니라 내 속에서 솟아나는 것에 의해서 취할 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진정한 자유를 느낄 때,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황홀경을 느낍니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 가장 충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이 진정으로 술 취한 사람보다 더 취할 수 있고 진정으로 황홀경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볼로의 신앙으로 살지 말고,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가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부족한 것 많은 우리들이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그리고 영감을 받으며 살며, 새 술에 취한 사람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가 하는 일에 반하고 취하고 미치고 빠져드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만이 승리하는 신앙인으로 사는 길이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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