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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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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빼앗기지 않는 기쁨
고후 6:10
*이 설교는,
두 아이를 물에 떠내려보내고 며칠 째 강을 헤매고
있는 부모들과 목사를 만나고,
저와 같은 고통과 상실에 빠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를
묻는 물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는 그 답을 바울의 삶에서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신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후에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가 별 거 아닌 듯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인사동에 드나들 게 되었는데, 거기서 내가 매료된 것은 오래된 문자거나 유교의 경서강독 같은 거였습니다. 유정기 라고, 당시에는 충남대학원장이셨던 분이 한 주일에 하루씩 인사동을 드나드는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고전을 읽고 풀어 주시는 모임에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공자의『논어』를 읽어주시는데, “군자의 마음은 늘 평탄하나, 소인의 마음은 늘 근심이 가득하오” 하는 구절이 마음을 콱 찔렀습니다. 어쩌면 신학교를 휴학하고 인사동에 굴러 들어간 것이 나의 열등감을 감추려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지 말고 군자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다시 내 마음은 열등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우연히 읽게 된 단 카스터 목사의 글에서 『논어』와는 전혀 다른 관점을 만나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진화의 역사와 의식의 발달 과정을 연구해 보면, 추리 능력을 가진 두뇌 부분만이 쓸데없는 걱정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추리한다는 것은 연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연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쓸데없는 걱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우리가 연상을 잘 하면 할수록 쓸데없는 걱정을 잘 하게 된다. 성격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줄기차게 쓸데없는 걱정을 할 수가 있다. 우리는 추리력을 건설적으로도 사용할 수도 있고 파괴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일을 그만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병이 나도록 걱정을 할 수 있는 그런 빛나는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매우 고마운 일이며 우리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증거이다](단 카스터, 『정신력의 기적』, 문예출판사, 288f).
이 한 마디에서 나는 나를 괴롭히던 열등감의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작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굉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며, 그것을 바로 쓰기만 하면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같은 사람을 두고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것과, 적어도 사람에 대해서는 현상만 보고 도덕적 평가를 하기보다는 가능성을 보고 격려를 해 주는 것이 바람직한 것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단 카스터 목사의 책을 계속 읽게 되었는데, 읽을수록 그의 생각이 어디서 왔나 궁금했습니다. 그리고는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에야 단 카스터의 생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그가 운이 없다거나 죄가 많다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예수는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고 하셨어요(마 5:4). 헬라어 성경에는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구절 다음에 ‘hoti’(때문에)가 나오는데, 이것은 괜히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슬픔을 청승맞은 것이나 운 없는 것으로 돌리지 않고 위로를 받을 것의 원인으로 보는 예수의 신선한 관점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겁니다. 가끔 저의 책을 읽는 분들이 인사삼아 ‘보는 관점이 독특하다’고들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훈련된 나의 눈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왔던 것입니다.
예수는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제자들을 낙망시키는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잠시 동안은 슬플지 몰라도 조금 있으면 그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라고 제자들을 위로합니다. 그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하나 이야기해 줍니다.
“여인이 해산할 때에는 근심한다.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 16:21).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죠?
내가 잘 아는 한 여인이 첫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그에게서 그 아이는 착하고 총명할 뿐 아니라 너무나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이가 다섯 살인가 되었을 때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어요. 우린 그 사람이 3년 동안 송장 같이 웃음을 잃고 사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말로도 그를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후로는 아이를 갖기만 하면 쉽게 유산이 되어서 고생을 했습니다. 하혈을 많이 해서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다시 임신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유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임수술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 수술만은 할 수 없다고 버티면서 병원을 옮겨 다니면서 노력한 결과 마침내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그때 그의 얼굴에서 웃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임신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만 지내면서 지방에서 서울의 유명한 병원까지 와서 진찰을 하고 노력한 나머지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겪은 고통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는 이제는 지금의 그 기쁨 때문에 이전의 아픔을 잊고 삽니다.
사람들이 슬픔을 고통으로 느끼는 것은, 슬픔이 없는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상태로 상상하기 때문 이예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자기만 그런 슬픔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슬픔이 사라진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가정하거나, 우리의 목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건 아주 명심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슬픔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죠. 그리고 나서 그것이 오히려 위로와 기쁨의 원인이 되도록 바꾸려고 합니다.
슬픔이나 근심이 사라진 상태를 완성된 인격으로 보거나 인생의 목표로 보는 것은, 마치 고요한 바다나 반듯한 수평선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관념 속의 세계일 뿐 이예요. 관념 속의 바다는 고요할 수 있으며, 관념 속의 수평선은 분명 가느다란 선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바다는 늘 움직이며, 수평선은 언제나 넘실거리는 파도의 표면일 뿐입니다. 이걸 믿고 바다에 뛰어들면 금 새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옵니다. 눈앞에 닥쳐오는 파도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인생도 늘 이런 파도가 있어서 재미있고 살 만하고 거기에 슬픔도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바다나 반듯한 수평선을 찾으려는 사람은,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기에 늘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음을 일찌감치 인정하고, 파도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다가 무섭지 않으며 오히려 파도를 타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해산하는 여인의 근심과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수난을 받은 후에 제자들이 겪게 될 슬픔과 근심을 압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확신하기에 그는 제자들에게, “지금 너희는 슬픔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고 말한 것입니다(요 16:22절).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구절에서 무언가를 빼앗기며 사는 사람들의 불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배로 나라를 빼앗기고, 로마와 예루살렘과 성전지배체제에 바치는 세금으로 가진 것을 거의 다 빼앗기고, 박해를 받으면서 신념의 자유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에게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주는 기쁨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언제라도 마음대로 죄수를 처형해 버리는 그 엄청난 폭력을 겪으면서, 그래도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곳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음을 당하고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습니다. 그때 그를 붙들어 주고 힘을 불어 넣어준 시구가 있었는데, 이런 것입니다.
“그대가 체험한 바는 이 세상의 어떠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대로부터 그 경험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아우슈비츠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많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만은, 그 경험을 하는 그의 실존만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음을, 그는 통찰했습니다. 그의 고통의 경험은 의미로 가득한 것이었고, 그것은 그가 생존 확률이 거의 희박한 그 상황에서 살아남게 했고, 그 의미들을 적은 책은 이후에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경험한 것은 이천여 년 전 초대교회 사람들이 박해 속에서 경험한 것과 비슷하며, 예수가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약속한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슬픔이 없거나 슬픔을 잠시 잊어버리는 상태로서 일시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큰 슬픔이 있어도 그 슬픔을 이기고도 남을 만한, 속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약속한 것입니다. 해산한 여인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잊는 것같이,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얻게 될 그 기쁨을 생각하면서 수난을 각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를 바쳐 가면서, 사람들에게 안전한 삶이나 부나 지위를 보장해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보장해 주려고 했어요. 이걸 아셔야 해요.
우리가 갖고 있는 기쁨은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쉽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죠?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여러분 중에 크고 작은 기쁨을 잃었거나 빼앗겼거나 한 교우들이 있죠? 이게 인생입니다. 인생의 기쁨이란 이렇게 아침에 기뻤다가, 오후에 금전적 손해를 좀 보면 우울해집니다. 주식이 떨어져도 우울해집니다. 학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직장이 문제가 있어서, 인간관계가 문제가 있어서, 사랑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등등 이런 저런 핑계는 끝이 없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그런 핑계는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기쁨은 돈이 없어지면 빼앗기는 것이요, 성취가 주는 기쁨도 그러한 것입니다. 출세가 주는 기쁨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때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주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그것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주어지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예수의 사랑에서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사람들에게 보장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천여 년 전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약속해 준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그가 주는 기쁨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일들을 겪고 슬픔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소유한 것을 지키는 데 급급하며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지만, 그런 기쁨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 있기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든든함과 밝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기쁨에 사로잡혀서 살았기에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은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후 6:10).
우리도 그런 사람 되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길러 내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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