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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4:2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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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새생활, 거룩한 성도의 경쟁력(2) 정서 통제 경쟁력 분노
엡4:25-5:4
올해 서울 송파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60살 먹은 아내가 음식점을 하였답니다. 결혼한 지 40년이 되었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답니다. 65세인 남편이 폐질환을 앓아 약을 복용하면서 성 기능을 상실하였답니다. 부부는 자녀를 다 결혼시키고 살았는데 남편이 하루 장사를 정리하고 있던 아내를 데리러 가게에 갔답니다. 그런데 부부가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을 시작했고 어느 순간 부인이 "남자 구실도 못하는 게!"라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40년 금실은 그 한마디에 무너져 남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가게에 있던 자귀로 아내를 내리쳐 죽였습니다. 경남 창원시에서는 사장님이 꾸짖는다고 분노하여 27살 경리 직원이 분신한 일도 있었습니다. 서울 염창동에서 누나 집에 돈을 빌리러 갔는데 빌려 주지 않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창원시에서는 윗집이 쿵쿵거리며 시끄럽다고 화를 참지 못하고 위층에 휘발유를 담은 소주병에 불을 붙여 현관에 던진 사람이 구속되었습니다.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한 해 동안 '화가 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우발적 살인은 576건 이었답니다(2009년). 전체 살인사건의 47%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폭행 혐의로 기소된 15만7913명 중 6만4071명(40.6%)이, 상해 혐의로 기소된 11만6600명 중 8만8759명(76.1%)이 단순히 화가 난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상에서 패배자가 됩니다. 좀 더 고상한 말로 하면 정서 통제 경쟁력이 없는 것입니다. 학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감성 지수 즉, EQ(Emotional Quotient 이모셔널 궤션트) 경쟁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새사람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모든 사탄의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며 정서 통제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 늘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분노를 다스리는데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분노를 다스리는 경쟁력이 없어 실패하는 사람들이 종종 주변에 있는 것을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분노할 때도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경건을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 제사 사용하는 샤프가 없으면 분노가 생깁니다. 사소한 것에 화를 참지 못하여 신앙적으로 낭패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1. 정서 통제 경쟁력
자기감정을 잘 통제하는 사람과 감정 통제를 못하고 분노를 자주 폭발하는 사람 중 누가 경쟁력이 있을까요?
제가 언젠가 설교시간에 소개했는데 이런 문제에 대한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 월터 미쉘 교수가 대학 구내 유치원 아이들을 통해 실험을 해 보았답니다(1960). 감정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실험해 본 것입니다. 「매쉬멜로 과자실험」이라고 하는데 만 4살 유치원 아이들 100명에게 우리나라로 하면 맛있는 솜사탕 과자를 주었답니다. 매쉬맬로 과자 한 봉지씩을 주면서 선생님이 볼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 올 터이니까 그 때까지(10분 이상) 참으면 상으로 한 봉지 더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관찰 유리로 아이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관찰하였습니다. 이 때 세 종류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첫 번째 그룹은 선생님이 나가자 마자 매쉬맬로 과자를 먹은 아이들이었답니다. 자기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조금만 참으면 더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참았지만 매쉬맬로가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입으로 들어간 아이들이었답니다. 감정을 조절하며 참다가 유혹에 굴복한 아이들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눈으로 보고 있으면 못 견디니까 눈을 감고, 입을 가만있으면 먹고 싶으니까 노래를 부르며 다른 일을 함으로서 선생님이 돌아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던 아이들이었답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고 통제하는 아이들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름을 그룹별로 나누어 적고 돌아와 참은 아이들에게 약속대로 과자를 더 주었답니다.
시험은 여기에서 끝이 났는데 아이들의 학부님들에게 어디에 이사 가시던지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을 졸업하였고 그 후 14년이 흘러 아이들이 고등학교 3학년 18살이 되었답니다. 연구진은 전 미국에 흩어진 아이들 수소문하여 조사를 하였답니다. 학업성적, 인관관계, 친구관계, 교사의 평가, 부모의 만족도 등을 살펴보았답니다. 종합적으로 조사한 후 이 아이들의 차이를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 볼 것인가를 다각도로 연구를 하였답니다. 아이큐별로 나누어 보았답니다. 그러자 별 차이가 없었답니다. 아이큐가 높은 아이들이나 낮은 아이들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경제정도, 교육정도로 분류해 조사해도 특별한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4살 때 과자를 먹을 때 취한 반응별로 아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보았더니 확연히 차이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과자를 앞에 놓고 자신의 감정을 참고 견딘 아이들과 바로 과자를 먹은 아이들과는 무려 SAT(미국판 대학수능시험)성적이 약 200-210점 차이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미국의 심리학 박사인 다니엘 골먼이 감성 지수 EQ(Emotional Quotient 이모셔널 궤션트)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감성 능력이 있는데 그 감성 지수가 높은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더라는 것입니다. 감정 지수가 높은 아이들이 경쟁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지능지수(IQ)가 사람의 성공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IQ는 학교와 직장, 그리고 인생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약 20% 내외로 설명할 뿐이며 실상 나머지 80%는 오히려 EQ에 의해 설명된다고 그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분노를 잘 내고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경재력이 있습니까?
첫째 건강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분노를 품으면 먼저 신체적으로 건강치 못합니다. 파괴적 분노는 불이 되어 몸에 불의 씨인 독을 뿌립니다. 과격한 분노 흥분된 상태를 유지하게 하고, 신체를 계속적 응급상황으로 유지시킴으로 여러 가지 질환의 원인이 되어 수명을 단축합니다. 오사카 의과대학에서 제출한 보고에 의하면 “개 한 마리를 네 시간 동안 결박하여 때리면서 잔뜩 성이 나게 만든 후 그 뇌수 가운데서 액을 취하여 검사해 보니 ‘시안’이라는 독소가 다량 검출되었는데, 그 양은 개 80마리를 능히 죽일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게이츠 교수의 실험에 의하면 “1시간 동안의 격렬한 증오는 80여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소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독사의 경우는 자신의 몸속의 독을 몸 밖으로 배출하도록 구조가 되어 있는 반면에 인간이 스스로 생산한 독은 체내에 남아 여러 가지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합니다. 분노와 적대감 지수가 높은 사람은 면역력 약화, 혈압, 동맥경화, 심장병, 위장병 등과 같은 질병을 유발하며, 사망률을 증가시켜 건강의 악화와 조기 사망률로 이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둘째, 대인 관계의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파괴적 분노의 힘은 대인관계에 폭탄을 터뜨립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회피의 대상이 됩니다. 분노가 잦고 강렬할수록 인간관계는 치유하기 어려운 손상을 입습니다. 분노를 자주 대하는 사람은 분노에 무감각해지고 점점 욕구와 감정에 무관심하게 되고, 분노의 횟수가 증가할수록, 관용과 융통성은 줄어듭니다. 결혼 생활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이 될 것이고, 자녀는 마음을 굳게 닫고 저항이 세지면서 스스로에게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결국 분노하면 소외감과 외로움, 친밀감의 결핍, 사회적 지지의 단절, 대인관계의 종결 등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셋째, 심리적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분노의 힘은 정서적 피해로 뿌리 내립니다. 만성적으로 표현되는 분노는 삶의 질을 갉아먹습니다. 무기력감을 쉽게 느끼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족감이 떨어집니다. 집중력이 저하되어 일의 능률이나 문제해결능력이 저하되고,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게 되고 후회와 짜증과 같은 상태가 지속됩니다. 울화병에 걸리게 됩니다.
넷째, 재정적, 사회적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분노의 힘은 재정적, 사회적 피해로 열매 맺습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폭력을 행하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자신이 받습니다. 수습하고 복구하기 위해 재정적인 손해를 보게 되고 지금까지 쌓아 온 사회적 명성과 지위에도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습니다.
2. 정서 통제 경쟁력을 갖는 방법
우리가 거룩한 성도로 살려면 정서를 어떻게 통제해야 하겠습니까? 이미 거룩한 성도가 되었는데도 과거를 돌아보면 분노뿐이고, 미래를 생각하면 염려뿐라고 생각하며 내면에 분노를 가득 채워 놓고 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정서 중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잘 통제해야할 정서 중의 하나가 분노입니다.
이 분노에 대하여 오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1) 분노 정서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분을 내어도”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룩한 성도로 구별되게 살지만 인생살이를 하는데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가 옵니다. 분노는 인간의 기본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하나인 ‘노’(怒)에서 오는 것으로 인간이 느끼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입니다. 학문적으로는 “자신의 가치나 신념이나 욕구가 손상되었다고 느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적으로는 그것을 초래한 사람이나 사물을 향해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정서를 느끼게 하고 외적으로는 그 대상에게 피해를 주고 공격할 준비를 하게 하는 파괴적이고 강력한 감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조건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사람의 정서는 자극을 받으면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응하지 않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슬픈 일을 보며 슬퍼지고, 기쁜 일을 보면 웃게 되는 것처럼 분노할 만한 일을 보거나 당하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듯 분노는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정서적 반응으로써, 기능적이며 건설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절에 나오는 “분을 내어도”는 헬라어로는 “오르게”입니다. “분을 품지 말고” 말씀하는 분은
“파롤기스모스”라는 말의 번역입니다. 그리고 31절에 나오는 “노함”은 “뒤모스”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고 “분냄”은 “오르게”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5장 6절에 “진노”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도 “오르게”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 말에서는 비슷한 말인데 신약 성경에서 다른 말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대표적인 단어가 이 셋인데 ‘뒤모스’는 ‘난폭한 흥분, 분통을 터뜨림, 격분’을 으로 매우 흥분한 상태로서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발끈하지만 ‘오르게’처럼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타오르고 곧 사라지는 개념입니다.
‘오르게’는 복수를 노리고 오래 지속되는 분노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파로기스모스(parorgismos)’는 ‘오르게’보다 강한 형태의 분노입니다(엡4:26하,6:4). 이것은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부들부들 떤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 ‘아가나크테시스(aganaktesis)’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5회 정도 나타납니다. .이 단어는 ‘의분’으로 번역되며 부당한 행동이 없는 분노를 뜻합니다(마20:24)
그러니까 우리 신앙인도 “오르게” 즉 복수를 노리고 오래 지속되는 분노의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분을 만들어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수치를 당할 때 분노의 감정이 생깁니다. 욕구가 좌절될 때 분노하게 됩니다. 신체적으로 억압을 당할 때, 심한 간섭을 받을 때, 재산을 빼앗겼을 때, 공격이나 또는 협박을 받았을 때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면 격렬한 감정적인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처럼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한 사람도 분노하였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내려왔습니다(출애굽기 32장)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나 신령한 체험을 하였습니까? 그런데 밑에 내려 오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크게 노하며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고 백성이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특별 새벽기도를 하고 가다가도 부부가 시비가 붙어 화를 냅니다. 오늘 예배 드리고 가시면서 차 속에서 왜 예배시간에 졸았냐고 시비붙어 분노할 분도 있을 줄 모릅니다. 민수기 20장에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부족하여 갈증에 시달리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이 때 모세는 화를 참지 못하여 그들을 반역한 무리로 칭하면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20:10)하면서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세만 그렇습니까? 다윗의 분노합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평소 다윗이 나발의 양떼를 보호해 주었는데 겸손하게 음식을 좀 구하자 나발은 너무도 무례하고 악한 태도로 다윗을 하찮은 사람처럼 깔보았습니다. 이 때 다윗은 화가 칠밀어 400명 가량의 군사를 이끌고 나발과 그 집 사람들을 다 치려고 나섰습니다. 물론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로 인해 분노가 폭발하지는 않았습니다. 참으로 흠없는 지도자 느헤미야도(느5:6-7) 유다 지도자들의 경건치 못한 생활을 보고 분노하였습니다. 참으로 성숙한 사도 바울도 분노합니다. 바울도 아테네에 가서 전도하려 할 때,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분노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는 자들을 보시고 노를 발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완악한 태도를 보였을 때 분노하였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 보고 분노하였습니다(막3:5-) 성전을 더럽히는 종교 모리배들을 보고 분노하였습니다.(막11:15-17)
구약성경에는 ‘분노’라는 단어가 450회 이상 나오는데 그 중에 대략 375번 정도가 하나님의 분노에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부정함과 불경건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와는 달리 죄를 향해 쏟는 거룩한 진노입니다. 사람들처럼 이기적인 욕심에서 질투하심으로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사랑하심으로 구원하시고자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적 타락에 대한 분노(레 18:25)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기에 대한 분노였습니다(레 26:14-16). 형식적인 종교생활과, 말과 행동이 다른 신앙생활에 대한 분노였습니다(사 1:13-17).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분노였습니다(눅11:39-52). 약자를 보호하시기 위해 약자를 억압하는 자들에 대한 분였습니다(출 22:22-24). 인간의 분노처럼 불안정하거나, 이기적이거나, 쉽게 흥분하거나, 도덕적으로 품위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당하며, 객관적인 도덕적 악에 대해 필요한 반응이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의분을 가졌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신앙을 위해서 사회정의를 위해서 분노가 생길 수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화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나고 그 화를 어떻게 푸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 심리학자 게리 콜린스(Collins, Gary R.)는 인간의 분노는 정상적인 감정이고, 그 자체가 죄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적절하게 표현된 인간의 분노는 선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이기심에 의함 분노이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오해하고 왜곡하여 발생된 분노이고 통제하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타락한 인간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바울의 분노나 느헤미야의 분노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그 거룩하심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공분이요, 의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지 못하여 분노를 내며 친동새애 아벨을 죽인 가인과 같은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경쟁심과 열등감, 질투심으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파괴적인 복수를 위한 압살롬의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버지니어 사티어(Virginia Satir)가 “분노는 악덕이 아니라 긴급할 때 쓸 수 있는 남부끄럽지 않은 인간의 정서다.”라고 했습니다. 분노의 감정 자체를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완변주의자가 되어 얼굴 붉어지는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는 스트레스나 좌절감에 대한 자기 방어체계의 일부분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생존하고자 하는 필수적인 감정입니다. 이것이 창조적으로 발산되면 인간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건강한 분노는 인간의 생존이나 적응을 도와주고, 위협에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해 줍니다. 분노는 외부의 장해나 예기치 못하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자아실현을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부당한 일에 대해서 무관심해지지 않고 무책임하게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개인의 존엄성, 주체성, 자존심을 보호해 줍니다.
2) 분노를 파괴적으로 표출하여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화는 불과 같습니다. 분노를 느끼게 하는 고통의 경험이 연료통이라면, 그것에 대한 해석이 담긴 촉발사고는 연료통에 불을 붙이는 성냥과 같습니다. 신체적이든, 정서적이든, 욕구의 좌절이든 고통을 경험하면 분노의 감정이 생깁니다. 여기까지는 가치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분노를 일으키는 촉발사고(觸發思考)입니다. 상황을 해석하고 가정하고, 평가하는 사고입니다. 더위, 소음, 악취, 좌절된 욕구나 위협, 그리고 경쟁심과 과도한 업무로 인한 고통스러운 상황들, 불의한 상황, 배우자의 비협조, 부모의 무시, 친구들의 섭섭케 함, 직장 상사의 강요 등에 의해 분노의 감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대하여 왜곡된 사고를 가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나친 일반화해 버립니다. 이분법적 생각합니다. 비합리적 신념체계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격노합니다. 자신의 분노 감정대로 말로 폭발시켜 버ㄹ비니다. 욕설, 고함, 비판, 정죄, 비난하고 울화통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분개합니다. 적개심을 갖습니다. 공격합니다. 적의를 품고 달려가 싸움을 걸거나 공격하는 것입니다.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는 분은 “파롤기스모스”라는 말의 번역입니다. 파로기스모스(parorgismos)’는 ‘오르게’ 보다 강한 형태의 분노입니다(엡4:26하,6:4). 이것은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부들부들 떤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분노가 부정적으로 파괴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성도도 화를 낼 수 있지만 죄는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화나는데 어떻게 죄지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분노의 감정은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 일어나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의 에너지가 표출되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대부분 세 가지 형태도 표출됩니다. 첫째가 분노표출(angry-out)입니다. 화가 날 때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니다. 다른 사람을 해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니다.
둘째, 분노억제(angry-in)입니다. 화는 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분노통제(angry-control)입니다. 화가 난 상태를 자각하고 감독하면서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내적 억제형, 외적 표출형, 자기주장적 표현형입니다.
외적 표출형이 되어 파괴적으로 화를 사용함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 화가 납니다. 열을 받습니다. 기분이 상하고 기븐이 나쁘고 짜증이 납니다. 이런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얼굴이 경색되고, 주먹을 쥐거나 어금니를 꽉물는 것가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일어서서 물건을 더지거나 언어 폭력을 하고 구타하며 살인까지 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악하게 혈기를 부려서는 안됩니다. 고전13장에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폭력적인 노를 발해서도 안됩니다.
(1) 분노의 감정이 생길 때 파괴적으로 발산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노하기를 더디해야 합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생을 공격합니다.그리고 뻔뻔해집니다. 결국 동생을 잃습니다. 살인 죄인이 됩니다(8). 형벌을 받음습니다(11절). 외로움에 빠집니다(12절)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공동체가 피해를 봅니다. 죄를 다스리리지 못한 것입니다. 분노를 죄를 짓지 않도록 잘 다스리지 못한 것입니다. 분노가 생길 때 스스로 완전히 조절할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잠16:32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1:19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신체적인 해(害)뿐만 아니라 자존심이나 인격이 손상되는 상처를 받더라도 그런 상함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것입니다.(갈5:22-23) 제자들이 도망하고 배신해도 참으신 예수님, 버림받아도 참으신 예수님, 억울하게 사형을 당해도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참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안에서 분노와 정욕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2) 온유함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잠15:1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은자로 간주하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의 불친절함을 참고, 어리석음을 견디며, 결점을 묵인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마11:29). 사람들에게 모욕과 경멸을 받으셨지만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무례한 대우를 받으셨지만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시지도 않으셨습니다(눅7:36-50).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불의와 죄악을 보실 때 화를 내셨습니다(마12:34;눅11:42-51).
(3) 분노의 대상을 용서해야 합니다.
요나는 적국인 니느웨 원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성이 납니다. 마음이 분노로 불타오릅니다. 마땅히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무리를 보면서 십자가에서 분노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3) 분노를 마음에 품어 자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의 3요소는 빈도(frequency), 지속 시간(duration), 정도(intensity)입니다. 지속 시간이 길면 안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 담아 놓고 있으면 마귀가 틈다 그것으로 거룩한 성도의 생활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 경쟁력을 잃어 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해가 질 때까지는 분을 품지 말라는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일년의 1/4정도는 낮이 계속되는 그린랜드 사람들은 오래 동안 분을 품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잠들기 전에 분을 즉시 처리하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병들게 하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지 못하게하는 분을 마음 속에 넣고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분노를 품어 놓으면 뇌 자율신경 중추를 흥분시키고 혈관 수축되어 혈압이 오르고 호흡이 바빠지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위산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위궤양, 과민성 대장염이 생긴다고 합니다.
분노를 억제하는 이들은 ‘분노의 표현은 모두 나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분노를 표현하지 않을 거야.’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분노의 감정을 위장하며 선한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이글거리는 불을 가슴에 담는 것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칼슨 박사는 분노의 감정은 에너지와 같아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거나 변형되어 존재하며 ‘용해되지 않는 분노의 응어리’로 쌓인다고 말합니다.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고, 체면도 유지하며, 감정을 자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다는 평가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묻어둔 분노의 감정은 언젠가는 표면에 떠오르게 되어 엉뚱한 대상에게 전이될 수도 있고, 응축된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또한 무조건 삭이고자 할 때, 우울증이나 화병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분노가 마음속에 계속해서 자리 잡고 있으면 분노의 인격이 형성되어 매사에 분노하게 됩니다.
마음에 품지 않고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1)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 울부짓습니다. 글을 써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면 분노의 감정이 해소됩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신의 고통을 큰 소리로 하나님께 외칩니다.
(2)분노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상대에게 표현하는 것이 분노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부부관계에서 어떤 사소한 일로 분노가 일어났을 때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당신 화나셨어요?”라고 물을 때 남편은 큰소리로 “화 안났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노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분노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자기표현적 의사전달은 학자들은 “3F”를 사용하라고 합니다.
사실(Facts), 감정(Feeling), 정당한 요구(Fair requests)입니다.
사실(Facts)는 누구를 탓하거나 상대방의 의도를 추측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관찰된 것을 객관적으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감정(Feeling)은 사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요구(Fair requests)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예의를 갖추고, 목소리를 낮추고 자기의 주장을 제시하는 정도로만 행해져야 합니다.
(3)분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분노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너 전달법보다(You-Message)는 나 전달법(I-Message)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에서 분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4) 분노의 감정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집중하여 사용합니다. 운동을 하면 두뇌에는 엔돌핀이 생성되어 스트레스를 감소시킵니다. 집중적 노동활동은 초점을 맞춘 과제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함으로 분노의 감정을 감소시킵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음악을 듣습니다.
분노의 감정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묵상과 심호흡, 같은 이완운동을 통해 분노의 에너지가 흘러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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