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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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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새 생활, 거룩한 성도의 경쟁력(4) 언어 경쟁력
엡4:29
오늘은 새 생활, 거룩한 성도의 경쟁력 네 번째로 “언어 경쟁력”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내일이 추석 명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만나서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어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말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대통령이 되었으면 대통령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되었으면 아버지다운 말을 해야 경쟁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왕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거지처럼 말하고 사탄의 종처럼 말하면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조롱합니다. 경쟁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로서 언어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2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말에서 사실을 말하는 사실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먼저 더러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더러운”이란 “썩은” “무가치한” “나쁜” “부패한” “낡아 빠진” “질이 안 좋은”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쓸모없는” 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입니다. 현대어 번역에서는 “악담을 하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남을 해치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나쁜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악담, 남을 해치는 말, 나쁜 말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남을 조롱하는 말, 흉보는 말, 비판하는 말, 욕하는 말, 저주하는 말, 창피를 주는 말 등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해를 끼는 말의 대표적인 것은 진실하지 못한 거짓말입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축소하고 사실을 확대하는 말입니다. 더러운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믿는 우리를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렸듯이 오늘 이시대도 말을 통해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속이는 말, 거짓말, 진실하지 못한 더러운 말이 공동체를 썩게 만드는 말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말입니다. 공동체를 오염시킵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습니까? 사정 기관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을 고용하여 수사를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도 사단은 계속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고 말씀했는데 사탄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 경쟁력이라고 말합니다. 적당히 더러운 말을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거짓말을 하고 살아야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거짓말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합니다. 거짓말로 인간관계를 조종하고 이용하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진실만을 말하고 거짓말을 못하면 바보라고 합니다. 백설 공주의 계모가 요술 거울에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는 순간, 거울이 센스를 발휘했다면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보처럼 진실을 말하였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일종의 교환과 거래의 과정이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읽고 적당히 거짓말을 해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고선 훌륭한 중매쟁이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인간관계의 기술자들인 훌륭한 중매쟁이가 되기 위해서는 거짓말의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말도 계속하면 사실이 된다는 것이 '괴벨스'의 선전이론 입니다. 그러나 계속된 거짓말은 다른 사람에게 사실처럼 들리게 하여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0)의 거짓말을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이나 아간의 거짓말은 거룩한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진실 경쟁력이 있습니까?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마 26:63)” 그들은 참람죄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하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빌라도가 심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아니라고 부정하면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하게 “네 말이 옳도다(막15:2)”라고 진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진실말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말에 있어 진실 경쟁력이 있는 성도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 경쟁력있는 우리가 회사를 하면 회사가 살아납니다. 기업도 진실 경쟁력이 있을 때 인정받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업의 조건"을 쓴 라인하르트 K. 슈프렝어는 "기업의 조직과 조직구성원에 있어 신뢰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며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요소이다. 따라서 21세기 기업의 생존과 번영은 신뢰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정치인들이 많을 때 살맛나는 정치가 나옵니다. 안철수 신드롬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말은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생각이 마음에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더러운 생각은 입 밖으로 끄집어내서는 안 됩니다. 썩은 것은 드러나면 보기 좋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의 눈을 찡그리게 하고 만약 그것을 썩은 줄 모르고 먹으면 먹는 사람이 병듭니다.
말도 경쟁력입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말에 경쟁력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진실입니다. 어떤 경우도 사실을 말하려고 노력합니다. 임기응변적으로 순간적 이익을 보려고 사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 세상에서 경쟁력이 없습니다. 지난 주 모 연예인이 세금 문제로 그 좋은 mc 자리에서 하차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서울시 교육감이 구속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 진실 경쟁력 문제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말에 있어서 사실을 말하는 진실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팥으로 매주는 쓴다고 말해도 믿어줄 만한 진실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 우리 장로님, 우리 권사님, 우리 집사님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야”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록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 아니라(잠언 12장19절) 미워함을 감추는 자의 것으로써(잠언 10장18절)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잠언 12장22절) 거짓을 말하는 자는 거짓말을 뱉으며(잠언 14장5절)망령된 증인으로서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잠언 6장19절) 거짓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며(잠언 19장9절) 거짓 증인은 패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잠언21장28절)
그러나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며(잠언 12장6절) 그 입술은 영원히 보존 될 뿐 아니라(잠언 12장19절) 함께 하는 자들로부터 사랑을 입습니다.(잠언16장13절) 정직한 말은 사람의 속을 유쾌하게 하고(잠언 23장16절) 그 입술에는 덕이 있다고 했습니다.(잠언 22장11절) 그리고 정직한 자의 말은 축복하는 말이기에 하는 일 마다 진흥하게 된다고 했습니다.(잠언 11장11절) 진실한 말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2. 거룩한 성도인 우리는 말하는데 유익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데 필요한 선한 말을 하여야 합니다.
현대어 번역에서는 상대방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덕을 세우는데”라는 말은 “오이코도메”의 번역입니다. 본래의미는 건축, 건축 물을 말합니다. 공동 번역에는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라고 번역했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but only what is helpful for building others up according to their needs”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말할 때 경쟁력 있는 말을 하려면 먼저 그것이 사실인가 사실이 아닌가를 검증해 보고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사실이 아닌 더러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이 사실이면 말을 듣는 상대에게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는가를 판단해 보는 것입니다. 사실일지라도 유익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이고 말을 듣는 상대에게 유익하면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 비만한 딸을 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여 집사님이 속상해 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이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에게 "메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이에게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말 한마디로 아이는 시험에 들었고 그 가정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꼭 메주라고 할 필요가 있습니까? 건강하다고 표현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자매가 늦잠 자다 교회에 바쁘게 와 눈에 눈꼽이 켜 있으면 “여자가 더럽게 눈꼽이 꼈냐!”라고 말하기 보다는 꼭 말하고 싶으면“맑은 호숫가에 진흙이 쌓였군요. 참 아름답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젊은 자매가 방구를 뀌면 “여자가 더럽게 방구나 뿡뿡 뀌고, 네가 여자냐?”라고 말하기 보다는 아무 말하지 않으면 어디 덧납니까? 꼭 말하고 싶으면 자신도 한 번 방구를 꾸어 방귀로 말해 주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추석에 아들 며느리를 보며 늙은 아내가 "여보, 나 쭈그렁 할머니 다 됐지?"라고 말하면 사실이 그렇다 해도 아니야 "당신은 나이 들수록 품위 있어 보이는 얼굴이야."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다 "난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최고 예뻐요. 당신 없었으면 난 아무것도 못했을 거요. 이정도 사는 것 다 당신 주름살 덕분이어요."라고 말한다면 아들 며느리 간 후 더욱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 맞아. 옛날이 그립구먼!”이라고 말하면 아들 며느리 간 후 대판 싸웁니다. 가난한 며느리가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오면 시어머니가 “그게 뭐니 구질구질하게”라고 말하기 보나다는 "야 우리 며느니, 클래식한 분위기네. 어쩜 이렇게 알뜰해 그래서 우리 아들이 날마다 행복하다 하지" 라고 말한다면 명절 끝나고 아들 부부가 얼마나 더 행복하겠습니까? 시어머니라고 유세를 부려봤자 한물간 권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명절이 와서 햇살같은 손주는 좋지만 거머리같은 자식들은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대문간 들어설 때부터 아들 며느리 눈치를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음식해 놓으면 며늘리가 '기름진 명절 음식 누가 먹는다고 이렇게 많이 하세요?'라고 한답니다. 그리고는 서울 올라갈 땐 동그랑땡 하나 안 남기고 들기름에 참깨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한 물간 권력이라고 해도 시어머니를 보고 '무릎도 아픈데 좀 앉아 계세요' '어머니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있어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시어머니가 신이 나겠습니까? 시누이는 누워 텔레비전 보고 있는데 밥을 차려 오라고 하면 "저는 종일 주방에서 음식을 하는데 시누이는 거실에서 TV만 보고 아니 시누이 밥까지 제가 다 차려줘야 돼요."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명절 집안이 냉장고가 되겠습니까? 말 때문에 부부 갈등이 폭발하여 ‘명절 이혼’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여 재수하는 손자가 오면 "네가 자랑스럽구나!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할머니 할아버진 널 믿어. 힘내. 올해는 꼭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거야"라고 말한다면 손자의 재능은 춤을 출 것입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명절에 수고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아내에게 "이번에도 수고했어요. 당신이 최고에요. 내가 결혼 하나는 잘 했지요. 다 당신 덕분에 내가 행복해."라고 말하면 아내는 피곤이 살아지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까? "내가 네게 힘을 준다. 내가 네 필요를 채운다. 내가 네게 응답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쉬게 한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내가 너를 실족치 않게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낙심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2-3)” 지금 자식도 없고 이민을 와서 살 땅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용기과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나쁜 놈아! 하면서 야단을 치시지 않습니다. 따지거나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흉보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40년 동안 도망자가 되어 절망 가운데 사는 모세에게 하나님을 죄를 캐 뭇지 않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 3:10)”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 3:12)” 의지했던 지도자 모세를 잃고 절망 가운데 놓여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예수님을 보십시오. 만나는 사람에게 유익한 말을 합니다. 아무도 상종하지 않는 삭개오를 찾아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배신하고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고 소망을 줍니다. 경고하고, 위협하고, 훈계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욕설하고, 조롱하고, 캐묻고, 심문하고, 빈정거리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은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였습니다. 사람의 언어도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3)” 믿음의 말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산더러 들이어 바다에 던져지라”라고 말하면 그 말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떨어지는 말을 통하여 상황을 만들어가고 현실을 창조합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약혼하고 결혼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25년 만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10명의 정탐꾼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못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해 주시면 넉넉히 들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말은 그대로 되어졌습니다.
골리앗 앞에 믿음의 선포로 전쟁에 승리한 다윗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
그의 말대로 그는 승리하고 영웅이 되었습니다. 말의 경쟁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말은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 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1)”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아이를 향하여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막5:4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병든 자가 깨끗해지고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부터 앉은 뱅이가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 때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마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말했을 때 그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 걷고 뛰며 찬양하였습니다.
말은 통제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합니다. 삼일 후 누구와 만나기로 약속하면 그 약속시간이 되기까지는 그 사람의 행동과 생각이 이 말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현상은 유동적이어서 구속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은 한 번 입밖으로 나오면 구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말은 성취력이 있습니다. 말은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다.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말은 소성케 하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기쁨을 주는 능력, 평안을 주는 능력, 승리케하는 능력, 소망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격려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의 주택 속에서 인간은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의 중요성을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로 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하는 말의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익을 주는 말 한 마디가 희망의 싹을 심어주고, 절망의 늪에 튼튼한 밧줄을 던져 주며, 풍파에 떠는 가슴을 포근히 감싸 줄 것입니다. 유익을 주는 말 한 마디는 몸의 보약과 같습니다. 힘을 잃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소망 없는 환자에게 건넨 의사의 유익한 한 마디가 생명을 살립니다. 긍정적인 자존감을 갖도록 해줍니다.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긍정적 태도를 갖게 해 주며 적응력을 높여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축복의 말을 듣기 원합니다. 인정해 주는 말, 용기 주는 말, 칭찬해 주는 말, 관심 가져 주는 말을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독적(혐오)인 말(무시하는 말)을 듣기 싫어 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말, 다그치는 말(잔소리), 비난하는 말, 단정 짓는 말(신뢰하지 않는 말), 권위적이며 명령적인 말, 욕설을 싫어 합니다. 듣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남자는 하루에 2만 5천 마디, 여자는 3만 마디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 말 중에 "참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잘 하시네요. 멋있습니다. 좋네요. 훌륭합니다. 예쁘군요. 잘 될 것입니다. 최고입니다. 한결같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부지런하네요. 기발한 착상입니다. 힘내세요. 동감입니다. 믿습니다. 뛰어나네요..." 등의 말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고 산다면 얼마나 세상이 좋아지겠습니까. 하나님은 엄청난 곤경에 처해있는 예레미야에게,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환난을 당한 다니엘에게 소망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에게, 외아들이 죽은 여인에게, 문둥병으로 쓰러져 가는 환자에게, 병든 자녀로 신음하는 자들에게, 배신한 베드로에게 소망의 말을 주었습니다. 혀는 작지만 말 한마디로 듣는 사람을 절망하게도 할 수 있고 소망을 줄 수도 있습니다.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선한 말은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16:24)",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잠25:1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18:21)"라고 말씀합니다.
3.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을 현대어 번역에서는 “복이 되는 말만을 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번역은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려면 조금 보완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듣는자”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듣는 자들이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은혜를 끼치는 것도 능동태도 되어 있습니다.
문법에서 능동태란 주어가 직접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 수동태는 주어가 행동을 당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은혜를 끼칠 수 있도록 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카리스”의 번역입니다. 결과 목적, 이유를 말하는 “히나”라는 말이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어 niv성경은 그것을 반영하여 “that it may benefit those who list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유로 해석하면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여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결과로 해석하면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여 결국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던 강조점은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고, 유익이 된다할 지라도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은혜가 되지 않으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명절입니다. 큰 아들은 잘 살고 작은 아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계속해서 잘 사는 큰 아들 이야기만 합니다. 벤츠가 오래 되어 바꾸고 아파트가 낡아 이제 90평으로 이사 가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고 큰 아들과 큰 며느리에게는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월세를 올려달라고 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작은 아들과 작은 며느리에게는 독이 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낙심하게 합니다. 소망을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 집에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신앙인의 말의 경쟁력입니다.
우리 예수 거룩한 성도들이 은혜롭지 못한 말을 하여 비난을 받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말은 많이 하는데 결국 말로 인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습니다. 말에 있어 공동체를 배려하는 은혜 경쟁력이 없습니다. 인격을 존중해주고, 사역을 존중해주고, 대화를 존중해주는 덕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우리들의 세계에 갇혀 다른 사람들 보기에 안하무인격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음식점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가득했고 점원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답니다. 한쪽에 앉아있는 중년 남녀의 자리, 목사님로 보이는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식사 기도를 하고 있었답니다. 기도를 마친 이들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업원을 다급히 불렀답니다. 목사님은 윽박지르듯이 “우리 시간 없어. 언제 주문했는데 아직 안 주는 거야.”라고 했답니다. 점원은 힐끔 쳐다보다 “네, 다 준비됐어요.” 그러면서 혼잣말로 투덜거렸답니다. “늦게 와서 일찍 달라면 어떻게 해. 근데 왜 반말이지.”
그 때 옆에 있던 집사가 화를 내며 “우리 목사님께서 시간이 없다시잖아. 좀 배려해달라는 건데 뭘 투덜거려. 빨리 주면 되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의 세계입니다. 은혜로운 말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 집사님들이 버스를 타고 심방 가는 길이었답니다. 빈자리는 없었답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답니다. 몸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 한 여자가 힘겹게 서 있었답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나 내릴 준비를 하자 어디선가 가방 하나가 자리에 놓였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았답니다. 곧 이어 앞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조금 전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가방을 자리에 얼른 놓으며 큰 소리로 “김 집사, 어여 와. 자리 비었네.” 김 집사는 몸이 불편해 보이는 여자를 힐끗 쳐다본 후 “아휴, 이젠 버스 못 타고 다니겠어요. 힘들어서. 남편더러 차를 놓고 다니라고 하던지 해야지.” 은혜가 되는 말입니까? 믿지 않는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차라리 김집사라고 하지 말고 언니라고 하던지 그랬으면 예수님께 욕은 안 돌리지요.
한 집사님께서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가려고 시골 버스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시골 종점이니까 시골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한 대여섯 타 있었고 운전사는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어 놓은 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날도 새벽 기도부터 오후 예배까지 열심히 드린 집사님이 참다 못해 "아저씨, 이 똥차 안 가요?"라고 큰 소리로 불평했답니다. 그러자 자기가 모는 차를 '똥차'라고 부르는데 열 받은 운전사가 "똥이 차야 똥차가 가지!" 라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것입니다. 시골이라 다 집사님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줄 아는데 은혜가 되겠습니까? 전도문이 열리겠습니까? 말을 하면 말이 먹히겠습니까? 말에 있어 은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구수 여인을 취할 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보십시오.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모세를 비방합니다. 모세는 민족 지도자입니다. 모세의 흠을 들어낸다면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의 권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분만 생각하고 전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모세에게 형제자매로써의 당연한 지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 은혜를 끼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정탐을 하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10명의 정탐꾼을 보십시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것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장된 사실입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유익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을 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죽이려 했습니다. 은혜를 끼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속셈을 다 알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그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를 보십시오. 조롱하는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의로운 말이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다. 의로운 말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고 (잠언 16장13절) 여러 사람을 교육하며(잠언 10장21절) 사람들이 기뻐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잠언10장32절) 그리고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은 가치가 있으며 (잠언 10장20절) 지혜를 내는 (잠언 10장31절) 생명의 샘이라고 말씀합니다.(잠언 10절11절)
선한 말이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다. 선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며(잠언 12장25절)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합니다.(잠언 16장21절) 선한 말은 정결한 것으로 (잠언 15장26절)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됩니다(잠언 16장24절)
유순한 말이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다.
유순한 말은 분노를 쉬게 하며 (잠언 15장1절) 뼈를 꺾는 힘이 있습니다.(잠언 25장15절)
지혜로운 자의 말이 은혜를 끼치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더하여 (잠언 16장23절) 선히 베풀고(잠언15장2절) 그 지식을 전파하며 (잠언 15장7절) 세상의 금보다 진주보다 더욱 귀한 보배로서 (잠언 20절15절) 양약 같다고 했습니다.(잠언 12장18절)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아서 (잠언 18장4절) 그 입술에서는 항상 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잠언 10장13절) 얼마나 경쟁력이 있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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