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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경쟁력

에배소서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718 추천 수 0 2011.11.20 20: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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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5:1-2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새생활, 거룩한 성도의 경쟁력(7)-사랑 경쟁력
엡5:1-2

요즈음 주일 마다 계속 에베소서 말씀으로 말씀으로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하였습니다. 그 때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때가 AD 61-63년경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 로마를 통치한 황제는 악명 높은 네로였습니다. 그가 54년-68년까지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의 4대 황제가 클라우디우스입니다. 네로가 5대입니다. 네로 황제의 어머니는 아그리피나입니다. 장모는 메살리나입니다. 이들은 서로 안사돈으로 로마제국 황실의 여인들 중에서 악독과 음란한 순서를 매긴다면 서로 일등이라고 박박 우길 위인들입니다.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셋째 부인이고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의 넷째 부입니다. 네로가 셋째 부인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얼마나 콩가루 집안입니까?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역사적 기록에 의하며 "메살리나"는 탐욕과 음란이 뱀처럼 똬리 진 여자였답니다. 남편 클라우디우스(로마 4대 황제)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던 중 녹용을 잘못 먹어서 그만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합니다. 두 번이나 이혼하고 나이 50살에 메살리나와 세 번째 결혼을 합니다. 그 때 나이 15살, 무려 35살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원조교제의 샘플입니다. 메살리나는 요염하였고, 미모가 뛰어났고, 머리도 영리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메살리나의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그녀는 황제의 눈과 귀를 가려놓고 신하들은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렸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신하들과 즐깁니다. 거절하는 신하는 죽여 버립니다. 의붓아버지까지 유혹을 합니다. 거절하자 중상 모략하여 죽였습니다. 귀족부인들에게도 억지로 매춘을 시켰고, 거부하면 노예를 시켜 남편의 눈앞에서 욕보이게 했답니다. 심지어는 로마시내에 "류키스카"라는 전용 방을 만들어 놓고 바람을 피웠다고 합니다. 당시 미스터 로마쯤 되는 시리우스를 차지하기 위해 시리우스 부부를 강제 이혼시키고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지방에 출장 간 틈을 타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 버렸답니다. 이 성경이 기록된 당시 문화가 얼마나 개판입니까? 정신이 얼마나 썩어 있습니까?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황제 근위대의 시퍼런 칼에 24살 나이로 처형되고 맙니다.
네로 황제의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아그리피나"도 아주 바람둥이고 악명 높은 여자입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다시 황후를 뽑기 위해 전국규모의 콘테스트를 개최합니다. 로마의 미녀들이 서로 황후가 되려고 심사위원들에게 온갖 뇌물과 향응은 물론 육체까지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보 가운데 "아그리피나"는 비중 있는 심사위원인 "팔라스"에게 육체를 제공한 덕분에 무수히 많은 후보들을 제치고 황후에 추대되었답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네 번째 마누라가 된 것입니다. 이 여자도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14살 때 오빠인 칼리큘라 황제와 첫 관계를 맺었습니다. 15살 때 첫 결혼했으나 사별하였습니다. 명문귀족과 재혼하여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바로 이 사람이 "네로"입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아그리피나"는 삼촌과 조카 관계입니다. 로마법에 위반되니까 법을 뜯어고쳐 결혼을 합니다. 이 때 황제는 57살이었고 아그리피나는 32살이었습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광적일 정도로 권력지향적인 기질을 가진 여인이었답니다. 아들 네로를 황제로 앉히려고 하는데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핏줄이 아닌 것이 걸림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네로를 황제의 아들로 호적을 바꿔 버립니다. 그리고 바람둥이 황제의 전처인 "메살리나"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시켜 버립니다. 결국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의붓아들"이자 "사위"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 지저분한 콩가루 집안입니다. 그리고는 독약으로 황제를 살해해 버렸습니다. 17살의 겁 없는 나이에 네로는 5대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집권 초기에는 네로는 관용정책, 세금감면, 국가유공자 우대 등의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네로가 황제가 되자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신바람 나서 설쳐대며 애인 "팔라스"와 바람피우며 꼴값을 떨었습니다. 그러자 네로는 "팔라스"를 추방해 버렸습니다. 자기 애인을 아들이 내쫒으니까 네로에게 협박을 합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황제의 진짜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앉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네로가 황제의 진짜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연회에 초대해서 독살시켜 버립니다. 네로의 어머니는 자기도 죽을 것 같으니까 아들 네로를 유혹하여 근친상간을 합니다. 결국 네로는 제 어머니도 죽여 버립니다. 그 때 네로가 22살 때였습니다. 59년입니다.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65년에는 세네카를 살해하였습니다. 64년에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자 그 책임을 기독교에 뒤집어 씌워 대학살을 단행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시대정신이 이런 때였습니다. 얼마나 도덕적으로 사악하고 부패한 때였습니까? 인본주의가 성행하고 쾌락주의가 극에 달하고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질 때였습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때였습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이용물일 뿐이었습니다. 이럴 때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에베소 성도들이 있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 시는 로마 제국의 지방 총독이 다스리는 “아시아의 빛”이라 불리우는 아시아 주 최대의 도시였답니다. 인구는 25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고, 소아시아의 육로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동 서의 교차로였습니다. 소 아시아의 최대의 도시로 경제적으로 풍성한 도시였을 뿐 아니라 민주정치가 발달된 도시였답니다. 운동경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상업적으로 번창하고 동방과 서방 종교와 문화의 뛰어난 융합을 이룬 곳입니다. 국제 상업도시로 로마제국 내의 최대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약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신전 뜰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답니다. 신전 청소를 위하여 수천 명의 노예가 일하였다고 하니 과연 어느 정도였을 것인가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최대의 신은 아데미 여신(다이아나)이었습니다. 이 신전은 종교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범죄와 부도덕의 중심지였습니다. 여사제만 해도 수백 명이 있어 신성한 창부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신전 경내는 도피권이 인정되어 범죄자가 신전 300M 이내에 오면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온갖 범죄의 소굴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헬라클리투스는 “누구든지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도덕에 울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타락한 도시에서 바울이 감옥에 잡히기 전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이 개척을 하였습니다.(행18:18-23; 19:1-8) 바울이 3년 동안 눈물과 희생으로 목회한 교회였습니다.(행20:17-38) 나중에 아볼로가(행18:24-) 목회하였고 디모데가 목회한 교회입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행19:5-7) 성령의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가 떠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이것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도 마술 책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얼마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났는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신전에 참배를 하지 않음으로 참배객에 기념품을 팔아 오던 사람들이 망하게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이제 바울은 감옥에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신앙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를 35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동일한 시민, 동일한 백성, 한 성전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네로 시대의 사람들이나 젓이 24개나 있는 이방신 아데미 신을 섬기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로 경쟁력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5장 1절 2절에서는 사랑의 경쟁력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1. 사랑의 경쟁력을 가지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임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는 접속사 “운”이라는 말로 “그래서, 이제(그때), 따라서, 결과적으로” 등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앞 전체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동사는 두 개입니다. “본받는 자가 되라” “사랑 가운데 행하라”입니다. “되라” “행하라”입니다. 영어로는 be와 do를 말합니다. 존재와 행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본받은 사람이 되려면” 즉 어떤 새로운 존재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은 자녀같이”가 전제됩니다. 의미적으로 볼 때는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은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가족적, 동족적인 사랑인 스톨게 사랑이 아닙니다. 친구나 우애적인 사랑인 필레오 사랑도 아닙니다. 이성적, 정적인 사랑, 낭만적인 사랑인 에로스 사랑도 아닙니다. 당시 여신을 섬기고 네로가가 즐기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이런 사랑을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는 잊을 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사 46:3-4)”
우리가 어떤 죄에 들어가 있다 하더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어떤 죄가 있을 지라도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7)” 허랑방탕한 탕자가 돌아 와도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사람의 욕구 중의 강력한 욕구는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받지 못하면 결코 만족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는 신비한 사랑의 공간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하고 그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의 요절 말씀이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성경 전체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의 사랑도 불완전하고 친구의 사랑도, 애인의 사랑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나 자신에 대한 시각이 변합니다. 사랑받으면 행복해 집니다. 사랑받으면 마음이 변합니다. 사랑받으면 얼굴 표정이 변합니다. 사랑받으면 말이 변합니다. 우리 교회 이장로님 딸 결혼식을 앞두고 요즈음 주일마다 제가 결혼 예비학교 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사랑받으니까 얼마나 표정이 싱글벙글한지 모르겠습니다. 얼굴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유행가에서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 받는 것만큼 사람을 깊이 그리고 항구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십니다. 집단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관심이 온통 나에게만 쏠려 있는 것 깨닫게 됩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진정 사랑의 경쟁력을 가지고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두 마리의 머리 좋은 침팬지를 택해서 실험해 보았답니다. 하나는 어미와 동거를 하게하여 어미의 사랑을 받으며,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게 했으며, 다른 하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어미의 모형에 인공으로 자동 조절된 우유병을 설치해 먹고 자라게 했답니다. 하나는 어미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는 사랑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라 새끼를 낳아서 키우는데 어미의 사랑을 받고 자란 원숭이는 새끼의 모든 필요를 돌보고 사랑을 주고 어루만지며 어린 새끼 위주로 자신을 맞추는데,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원숭이는 자기에게 새끼가 맞춰 주기를 원할 뿐아니라, 귀찮아하고, 매정하고, 자기 중심적인 행동 양식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깨닫고 감격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무시하거나 혐오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경쟁력이 생깁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사랑을 경험하는 자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 본 자가 진정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아가페 사랑이 경쟁력입니다. 이 사랑이 가정과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 사랑이 아데미를 무너뜨리고 로마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2. 사랑의 경쟁력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받으라는 것은 “따르는 자가 되라. 모방하는 자, 본뜨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그림을 그릴 때 습자지를 대로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모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1:4-5, 2:19, 4:24) 아데미를 본받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하게 간음을 합니다. 네로를 본받으면 안 됩니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콩가루 집안을 만듭니다. 잘못된 사랑으로 얼마나 세상이 혼탁합니까?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오늘날 사랑의 홍수 시대입니다. 그 사랑에 목말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에 목마른 아내가 있었답니다. 남편이 들어오자 “여보 나 사랑해” 라고 말하자 “지금 결혼 한지 얼마나 되었는데 지금도 사랑타령이야, 그저 정으로 사는 거지”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아내가 화가가 베란다로 나가 문에 걸터앉았습니다. “사랑해 안해 말 안하면 뛰어 내릴 거야.” 그래서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여 위기를 모면했답니다. 그런데 이 아내가 병든 것입니다. 날마다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내는 세상을 뜨기 전 절대 재혼해서는 안된다고 약속하라고 했답니다. 만약 재혼하면 귀신되어 밤마다 나타나 괴롭힌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장례 치르자마자, 내연관계였던 여자와 잽싸게 재혼했답니다. 한달 가까이 알콩달콩하는데 옛 아내 귀신되어 나타났답니다. 그러자 이 남편이 “왜 지금 나타났느냐” 따졌답니다. 그러자
"머리와 손톱기르느라 늦었다 이놈~아!.."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 사랑이란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랑이 없어 문제가 아닙니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문제입니다. 잘못된 자기 사랑, 잘못된 자식사랑, 잘못된 회사 사랑, 잘못된 나라 사랑 때문에 시기 질투가 일어나고 간음과 간통이 일어나고 싸움과 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잘 못된 사랑 때문에 파괴되는 가정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네로 가의 잘못된 사랑은 얼마나 성적인 타락을 가지고 옵니까? 이런 사랑을 모델로 삼으면 안 됩니다. 자기 즐김이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만족이 사랑이 압니다. 집착이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집착하면 안 됩니다. 지난 주 신문에 공부 못한 아들에게 나가 죽어라 하고 잠을 못 자게 하다가 이혼한 부부의 기사가 나왔습니다. 고 3 딸과 고 1 아들을 둔 46세 엄마인데 딸은 반에서 1~2등, 전교 10등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하위권으로 처쳤답니다. 독수리 엄마, 헬리콥터 엄마가 열이 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들이 정해진 문제집 분량을 다 풀지 못하면 "너는 살아봤자 사회에 쓰레기가 되니까 죽어!" "거렁뱅이를 갖다 키워도 너보다는 낫겠다."라고 폭언을 일삼았답니다. 잠을 자지 못하게 호스로 몸에 물을 뿌리거나 잠자는 아들을 발로 차기도 했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왜 이렇게 성적이 나쁘냐"며 아들 책상에 톱질을 했고, 잠을 못 자게 침대 매트리스를 세로로 세워놓았답니다. 보다 못한 아빠는 아들을 여름방학 때 고모 집에서 지내게 했고 상담 치료도 받게 했답니다. 하지만 엄마는 오히려 아빠와 아들에게 밥도 차려주지 않고 빨래도 해주지 않았답니다. 아빠와 아들은 거실, 엄마는 안방, 딸은 작은방을 쓰게 됐고, 부부는 얼굴도 안 보고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남남처럼 살았답니다. 결국 가정법원에 이혼 소송을 하였는데 법원은 "아내는 남편에게 위자료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이 판결로 아들은 아빠와, 딸은 엄마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습니까? 사랑의 모델을 잘 못 본받은 것입니다. 독수리 방법이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헬리콥터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한 사람을 보십시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때, 아들은 20대 초반까지 반항아로서 거칠고 타락한 삶을 살았답니다. 한 번은 프랭클린이 바깥으로 떠돌다가 돈이 떨어져서 오토바이를 요란하게 몰고 아버지 집으로 갔답니다. 턱수염을 기르고 오토바이족 옷차림으로 집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전도 협회의 운영위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었답니다. 모두가 프랭클린을 쳐다보았답니다. 평범한 아버지 같으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방탕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그런데 아버지는 운영위원들에게 "내 아들, 프랭클린입니다"라고 소개했답니다. "아들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같은 말을 한 마디라도 하지 않고 환하게 웃었답니다. 자서전에서 프랭클린은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반항과 방황 기간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과 존경과 신뢰가 자신을 붙들어 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은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기준이 된 것이 아닙니다. 내 자존심이 아닙니다. 내 사랑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 하나님을 모델로 한 사랑입니다. 22세까지 어둡고 거칠게 살았던 그는 내면에 심각한 번민과 갈등을 느꼈답니다. 오토바이와 지프를 몰고 들로, 산으로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하게 살았지만 내적 공허감은 더욱 커지고, 방탕한 삶이 점점 권태로워졌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함께 산책을 합니다. 한 참을 걷다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답니다. "프랭클린, 네 엄마와 나는 네가 번민하고 있음을 알고 있단다." "너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든가 거부하든가, 가부간의 결정을 내려야 할 거다. 중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께 순종하든가, 거부하든가, 결정을 해야 해." "프랭클린, 네 엄마와 내가 너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네가 무엇을 하든, 네가 어디로 가든,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 우리의 집의 문은 항상 열려 있고, 언제든 너를 환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선택은 네가 해야 한다." 그는 아버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그 사랑을 맛보면서 점차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빠져 나와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었답니다. 세상의 사랑이 우리의 모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의 모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진정 사랑의 경쟁력이 있습니다.

3. 거룩한 성도로 사랑 경쟁력을 가지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했던 방식으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았다면 이제 하나님 사랑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도로 새생활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경쟁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경쟁력이 없습니다. 이 사랑의 경쟁력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습니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째, 그리스도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끌어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비열하고, 추하고, 어리석고, 그릇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2:1-3; 4:17-20)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조건을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의 경쟁력을 가지려면 조건을 보지 말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기브 엔드 테이크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사랑 잘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6)”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고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사랑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신적인 특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비웠습니다. 체면을 버렸습니다. 이런 사랑이 진정 경쟁력이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하늘나라를 버리셨고 하나님의 지위도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습니까? 조그마한 자존심만 상해도 우리는 사랑을 접고 있지 않습니까? 말 한마디에 사랑을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가장 고귀한 생명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 대신 서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진정 경쟁력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지금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바울은 이 사랑을 에베소서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엡1:15; 3:18; 4:2 4:15; 5:2) 그들은 정말 당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아가페적 사랑을 하였습니다. 바울과 이별할 때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전송하는 모습을 봅니다.(행 20:37) 바울 사도는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며 목회하였고 그 사랑은 전염되어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경쟁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에베소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 첫 번째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냈습니다. 갖가지 환난과 핍박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이단 니골라 당을 배격하였습니다. 니골라당이란 초대교회 7집사 가운데 니골라 집사(행6:5)가 타락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사람의 육신은 영원히 악한 것인 데 선한 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만 믿으면 영혼은 정결케 되기 때문에 육신으로는 성결한 삶을 살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영지주의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구원파의 교리와 비슷합니다. 이런 이단과 싸우다 보니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어디에서 첫 사랑이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회복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높은 말씀의 분별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이단을 경계하고 정통 신앙에 섰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이 결핍되었습니다. 사랑이 제일인데(고전13:13) 사랑을 버렸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하였지만 시간 지나자 그 사랑은 진부한 것이 되었고 기독교 사업에만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가슴으로 하는 주님과의 영적교제는 식어졌고 머리와 귀만 커졌습니다. 남은 것은 머릿속의 교리뿐입니다. 생명력이 약화되어 버렸습니다. 성령으로 활활 타오르던 성도와 교회들의 사랑은 점점 식어지고 능력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식어 지면 인위적 감성으로 그 사랑을 대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 주후 33년 - 100년 가까이의 교회 시대를 대표한 교회였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주후 330년 5월 11일 신 로마를 만들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라 호칭하면서 대 주교의 권한이 에베소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습니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의 영광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1세기에는 감독권마저 폐지되었으며 1308년에는 터어키 군에 의하여 점령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날의 에베소는 볼품없는 철도와 왜소한 정거장, 허름한 여관과 빈민가만 보일 뿐 바울 당시 아시아 제일의 항구도시였던 사실은 추억 속의 그림자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살아짐과 동시에 그 화려한 문명도 부도 살아져 버렸습니다. 아가페 사랑이 경쟁력입니다. 사랑할 때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그 사랑이 가정을 점령할 때 가정은 행복해 지고 그 사랑이 세상을 점령할 때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오늘 본문 다시 한 번 크게 읽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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