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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5: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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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빛의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
엡5:8-14
지난 화요일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섬겼던 박의택 집사님께서 주무시다가 천국에 갔습니다. 성가대에서 봉사하시는 박이기(김경민) 집사님의 아버님이십니다. 지난주일 우리와 함께 아내인 최명자 권사님과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식당에서 같이 식사도 하였습니다. 목요일 소망마을에서 가을 소풍 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듣기에는 소풍 가려고 입고갈 옷도 사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영원한 천국으로 소풍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4)”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참으로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한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5)”라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풀의 꽃과 같습니다. 들이 마신 공기 내 놓지 않으면, 흐르는 피 한 순간 정지하면 순식간에 몸은 식어집니다. 얼마전 전집사님 이야기 들었는데 친구가 대학병원에 검사하러 들어간다고 자신의 차 타고 갔는데 그냥 그 길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너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호흡 한숨 차이입니다. 들어간 숨 나오지 않으면 그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호흡 멈추면 사랑했던 사람들, 애착을 가지고 살았던 모든 것들을 놓고 떠나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죽음은 순서가 없습니다. 예고하고 오지 않습니다. 언제 누구에게 죽음이 다가 올지 모릅니다. 통계청 2010년 사망원인통계 결과에 의하면 작년 사망자수는 25만 5천 403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루에 699.7명 씩 세상을 떠납니다. 한 시간에 27.9명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한 시간에도 우리나라 어디에서 30여명이 세상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을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 후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눈물도, 고통도, 걱정도, 질병도 없는 영원한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죽음이란 천국가는 과정이고 잠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죽음이란 어떤 것이어요?” 그 할머니가 “응 죽음이란 네가 밖에서 열심히 놀다가 지쳐 집에 와 마루에 자고 있었지? 그 때 너 눈을 떠 보면 침대에 있지? 네가 마루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엄마가 침대에 옮겨 뉘어 놓은 거야. 바로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라고 알려 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 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신도 신령한 몸,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곁을 떠난 박의택 집사님도 지금 영원한 천국에 가신 줄 믿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3)” 믿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잠깐 왔다가는 나그네 인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성경은 빛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성경 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를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것을 문학적으로 은유법이라고 말하지요. 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배운 것들입니다. 보조관념, 원관념이라는 말을 배웠지요. 본래 말하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원관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잘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사용하는 말을 보고 관념이라고 말합니다. 원관념은 숨기고 보조관념만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그 특질을 묘사하는 표현법을 은유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가을은 선물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것과 같은 표현법입니다. “~같은, ~처럼, ~인 양” 등의 연결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을 직유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빛이라고 말씀하고 바로 이어 빛의 자녀들처럼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직유법에 속합니다. “선물같은 가을, 호수같은 내 마음” 등과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빛과 같은 속성을 가진 신분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그리고 예수 믿는 우리를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4)” 다른 표현으로 빛의 아들이라고 합니다(요12:36; 살전 5:5). 이 말은 빛 그 자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같은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빛에 어떤 속성이 있습니까?
밑은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빛은 어둠을 물리칩니다. 빛은 세상을 따뜻하게 합니다. 빛은 아름답게 합니다. 빛은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세상에 생명을 주어야 할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할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싸늘한 세상에 따뜻함을 주어야 할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할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직장이, 우리가 사는 가정이,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우리로 인하여 밝아지고 아름다워지고 따뜻해지고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흔적을 통해 어둠의 문화를 거두어 내고 빛의 문화가 만들어야 할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빛이 되었으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둠으로 지칭되는 세상에서 살지만 어떻게 하여 이 어둠을 거두어내고 빛의 자녀처럼 살며 빛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1. 우리가 빛의 문화를 만들어 내려면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14)
우리가 빛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둠 가운데 머물면 우리를 통해 빛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드는 문화, 죽음을 물리치는 생명의 문화, 더러움을 추방하는 아름다움의 문화, 차가움을 씻어 버리는 따뜻함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잠자는 자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저녁에 잠자는 것을 말씀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할 때 잠자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하기 때문에 잠자는 자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합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를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이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면 죽은 것입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입이 있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살려면 먼저 영적 죽음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빛이 되어야 세상을 따뜻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세상에 생기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음의 문화를 만들 뿐입니다. 당시 에베소시의 인구는 20-25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삶의 문화는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한 문화입니다. 에베소에 사는 모든 시민들은 그 아데미 신전의 신전지기가 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의 많은 순례객들이 들어와 아데미 여신에게 경배도하였고 돈을 맡겨 은행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파괴되지 않는 가장 안전한 곳이 신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신전이 그들 생활의 중심이 되다 보니까 이교문화권에 속해 있었는데 온갖 도덕적 타락과 부정이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예배의식으로 매춘을 하고 살인자들, 도적들, 강도들이 피난하는 자유로운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에게는 착함보다는 악함이, 의로움 보다는 부패함이, 진실함보다는 거짓과 속임수와 가증스런 탐욕이 횡행하는 도시기 된 것입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죽은 자의 문화, 어둠의 문화는 휴머니즘을 내걸고 음란의 문화, 폭력의 문화, 허위의 문화가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건강하지 못합니다. 결국 죽이고 죽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문화가 아닙니다. 오늘날 죽은 자들이 이끄는 영화나 연극, 문학, 드라마, 게임 등을 보십시오. 이곳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여 3년 가까이 목회를 했습니다. 이제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인원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들이 그 시대 죽음의 문화, 어둠의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영적 생명을 얻으면 달라집니다. 어둠의 문화를 빛의 문화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빛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자신도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죽음의 자리에거 일어나게 합니다. 자신도 패배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상대도 패배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합니다. 자신도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고 타인도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나인성에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인을 보십시오. 아들 하나 있는데 아들 마저 죽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성 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 삶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행렬입니다. 예수님 만나 소망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동정을 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앉은 뱅이가 일어납니다. 38년 동안 질병 가운데 인생을 포기하던 사람도 일어나게 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슬픔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주보에 의료법인 인애가한방병원그룹 김덕호 이사장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5개의 인애가 한방병원과 시립노인전문병원, 사회복지법인 장수마을의 3개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며 50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경영한다고 합니다. 3대째 한의사를 하고 있는 집안에서 30만 명을 무료 진료하였다고 합니다. 목사를 8명 배출하고 30명의 장로가 있는 기독교 집안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 어둠의 자식이었을 때는 그는 상처 투성이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한의사였는데 경북 영주시에 있는 성곡교회 장로였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갔는데 어머니가 어떤 아주머니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답니다. 할머니께 여쭤보았답니다. "할매, 저 아지매 누군데 엄마하고 저래쌌니껴?" 그 때 할머니는 "덕호야, 아지매가 아니고 저 여자도 니 엄마데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졸지에 어머니가 둘이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 병들어 친정에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가 결혼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2명의 아내가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답니다. 남들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하고 본받으라고 했지만 코웃음을 쳤답니다. 교회를 가도 설교는 고리타분하기만 했답니다. 새벽기도를 억지로 끌고 가면 잠만 자고 왔다고 합니다. 갈수록 비뚤어져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했답니다. 같이 살면서 일하던 고모를 발로 걷어차거나 부지깽이로 치마를 들치곤 했답니다. 초등학교 앞에서 숙부님이 문방구와 기름가게에 가서 돈을 훔쳤답니다. 등록금을 떼어 먹은 적도 여러 번이었답니다. 할아버지 책상 위에 치료비도 훔쳤다고 합니다.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시한폭탄으로 살았답니다.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패거리를 만들고 담배도 피웠답니다. 중학교 3학년 때쯤 두 어머니가 가위를 들고 싸우는 것을 보고 두 어머니 사이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답니다. "내가 칵 디지삐면 그만 싸울랍니껴!" 죽으려고 마당에 뒹굴던 새끼줄을 집어 들고 뒷산으로 달려갔지만 죽지 못했고 마을 저수지로 들어가 죽으려 했는데 얼어서 죽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그 때 류성우라는 같은 또래 여학생이 겨울마다 여는 부흥회에 초대했답니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완전히 변호가 되었답니다. 기도가 나왔고, 내 마음속에 있던 의심이 어느새 사라졌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회개하고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답니다. 얼굴도 화끈거리고 심장이 뛰었답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 위를 바라보는데 마치 전기 치료를 받듯이 짜르르 전율이 왔답니다. 불덩이가 가슴과 등을 뚫어 놓는 듯했답니다. 그날 이후 내 인생이 바뀌었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와 기쁨, 소망이 솟아올랐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어른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소년 김덕호는 사라졌답니다.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도둑질한 것 찾아가 회개하고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회개했답니다.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끼리도 용서하고 화해하며 사는 가정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분은 경희대 한의대를 들어가 오늘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세주로 영접하면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고 우리를 통해 빛의 문화가 만들어 집니다.
2. 우리가 빛의 문화를 만들어 내려면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해야 합니다.(11)
첫 번째가 우리 자신의 변화라면 두 번째는 변화된 우리 자신이 어둠의 문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만 변한다고 어둠의 문화가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의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숯을 가까이 하면 나도 모른 사이에 숯가루가 몸에 묻게 됩니다.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어두움의 일에 동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둠의 일에 관심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심리적 관심으로 부도덕을 즐기지 말고 마음과 상상으로 그것을 즐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인들 참 적습니다. 좋은 예배당도 없습니다. 거대한 세속의 물결에 거슬릴 수 없습니다. 그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살기에는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힌 바울 선생님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어둠의 일에 동참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데미 신상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주님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잃을 수 있고 직장에 쫓겨날 수 있고 가족으로부터 모든 사회로부터 추방당할 수도 있습니다. 소속된 집단으로부터 왕따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 자리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훈련을 받다 담배 일발 장진하면 혼자만 안 피우고 있으면 얼마나 어색합니까? 회식시간에 자신만 술을 먹지 않고 있으면 얼마나 힘듭니까?
어두움의 일이란 어둠의 자식들이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은 엡5:3,4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라고 말씀합니다. 엡4:25-32에는 거짓, 분냄, 도적질,악독, 노함, 훼방, 악의 등이라고 말씀합니다.
동참하지 말라는 말은 수도원 주의가 아닙니다. 온 종일 세속적인 삶에서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피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리웠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빛을 드러내 세상을 밝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과 함께 행하지 아니하면서도 그들과 사귐을 갖기는 어렵지만 해야 합니다. 그들의 인격에는 관심을 갖지만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혐오스런 죄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이 없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방법은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적극적으로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꾸짖고 정죄하고 비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흔히 책망하면 불쾌감을 보여 주고 기각하고 꾸짖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교훈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도리어 책망하라"라는 말씀은 증거를 방편으로 납득시켜라는 말입니다. 증거를 제시하여 수긍하고 따라 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술의 노예가 된 사람에게 있어서 그가 술을 마시므로 건강이 손상되고 사회적인 의미에서 폭주를 통해 그 결과가 악하게 나타나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엡 5:5)"
예수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로 우리는 이일을 위해 부름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과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 같이 우리들의 깨끗함과 우월감을 보여 주거나 우리들의 혐오감과 불쾌감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알게 하여야 합니다.
영화 도가니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얼마나 비난을 듣고 있습니까? 성폭행에 가담한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일부 대형 교회 목사들이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해 주고, 재정을 자신 마음대로 사용하여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물신 숭배, 자기 숭배에 빠진 기독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양극화는 세상보다 더하다는 것입니다. 일부 목사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기독교 정당을 만든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맘몬, 권력, 섹스에 휘청댄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성공 방식을 따라 거룩성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변화하여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다원주의, 물질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나르시시즘(이기주의)에 교회도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솔직하고 쿨(cool)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가 깊숙이 세속화되어 세상이 추구하는 속된 가치관이 교회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사장, 교수, 판사, 장관, 장성, 기타 부유층이면 교회에서도 금방 장로나 권사 그리고 집사가 됩니다. 귀족들이 대접을 받았던 중세 교회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중세교회에 있었던 성직 차별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 목사는 교황이나 주교처럼 고위 성직자로 군림하고, 장로나 집사나 신도들은 평민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금 횡령, 과도한 집회 사례비, 교회 세습, 성추행, 사기, 월권, 학위 세탁, 헌금 강요, 재단 운영, 정치 참여 등 온갖 속된 방법이 교회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도 소위 고위 성직자들은 사치스러운 부를 누린 반면에, 지방의 말단 사제들은 끼니를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혹독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와 미자립 교회 간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단장 선거에도 불의한 돈이나 뇌물을 뿌려야 당선된다면 교회는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로마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순교를 당하였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빛의 자녀로 목숨을 내놓고 믿음으로 살다가 로마의 어둠의 문화를 빛의 문화로 바꾸었습니다. 핍박받을 때 유능하고 높은 지위에 있던 로마의 여인 페리찌타타스라는 독실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경건한 그리스도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온 제국이 지진과 기근과 홍수로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이런 재난이 일어난 것은 크리스챤 때문이라고 하여 많은 크리스챤들이 비난을 받고 잡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페리치타타스 역시 그러한 비난을 받고 그녀의 가족들 모두가 붙잡히게 되었고 총독은 그녀에게 종교를 바꿀 것을 설복했지만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그녀의 아들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으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답니다. 로마의 총독은 그녀의 아들들을 따로따로 심문하였으나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나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귀한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신앙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장남이었는데 태형을 맞고 무거운 것으로 내리 눌려 죽임을 당하였고 둘째는 방망이로 머리를 맞아 죽었습니다. 네째는 벼랑에서 떠밀려 순교하였답니다. 나머지 아들은 모두 목베임을 당하였고 어머니는 결국 그녀의 세 아들의 생명을 앗아간 같은 칼로 목베이어 순교하였답니다. 하나님 대신 로마의 신들에게 경배하고 희생제물을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쥬피터 신상 앞에 나가 경배를 한다든가, 향을 피우든가 하면 되는 가벼운 일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흠이 가는 일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어떤 작은 행위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꽃은 보이지 않는 거름이 있기에 화려합니다.
3. 우리가 빛의 문화를 만들어 내려면 빛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9-10)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면 당연히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빛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착함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악한 열매가 맺혀서는 안됩니다.
착함은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선한이라는 것이 무엇이가를 아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요 10:11)”린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에게 선을 베풀었습니다(눅23:34) 예수님을 따르던 스데반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합니다(행7:60)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살후 3:13)”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을 받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 (신 12:28)”
둘째는 모든 의로움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의로운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불의한 열매가 맺혀서는 안됩니다.
의란 법적으로 준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선함보다 좁은 의미입니다. 의는 율법의 요구들 계명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데 공정해야 하고 법칙이나 법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는 모든 진실함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거짓의 열매가 맺혀서는 안됩니다.
속임이는 것, 감추인 것, 숨길 것, 거짓, 위선적 의식적인 것의 반대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의 특징은 공개적으로 열려 있으며 사실 그대로 이며, 투명하고, 명료하는 것입니다. 빛이 빛이는 곳에는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빛이 하루 아침에 무르 익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면 시간이 되면 빛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10절과 관계된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10절 말씀이 시금석입니다. 선함 의로움 진실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에 관심이 없으면 이방종교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은 될 수 있어도 진정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당시 철학자들도 주장했듯이 오늘날도 윤리적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윤리적 삶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덕주의 자입니다. 선인 군자이야기가 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필요성에 의하여 지배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동기는 나나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덕행을 모범적으로 보이기 위해, 명성얻기 위해, 유명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1808년, 하이든(Franz J Haydn)이 작곡한 유명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천지창조)가 연주되었습니다. 그 연주회장에는 하이든도 참석했답니다. 연주가 모두 끝난 후 사회자는 이곡을 작곡한 하이든 선생이이 자리에 참석하였다고 소개하였답니다. 모든 청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든에게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답니다. 그때에 하이든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작품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내 혼자의 힘이 미미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제외해 놓고 타인만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빛의 문화로 변화됩니다. 우리 나라도 부족한 것 같지만 예전에 비하면 많이 빛의 문화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은 빛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빛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신 토마스 선교사를 보십시오. 목사의 아들로 런던대학의 뉴칼리지를 졸업하고 23살 때 아내와 함께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왔지만 아내 캐롤라인이 병으로 먼저 천국에 갔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 때 낙심하여 선교회를 떠나 청나라 세관에서 통역 연수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한국인 두 명을 만나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고 합니다.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제너럴 셔먼 호는 평양감사 박규수에 의해 불에 타버렸고 토마스 선교사는 포박되어 1866년 9월 2일 27세 젊은 나이로 모래사장에서 박춘권에게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2년 6개월만에 자신도 한국 땅의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는 터툴리안의 말대로 그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은 나중에 변화되어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구경나왔던 12세 소년 하나는 토마스 목사가 던져 준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었는데, 몰래 숨겨 갖고 있다가 그 중 한 권을 박영식이라는 지방 관리에게 주었답니다. 박영식은 성경을 다 뜯어서 방에 벽지로 발랐고 그의 조카가 집에 놀러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답니다.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서 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박영식이란 사람의 집은 후에 널다리 교회가 되어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장소가 되었답니다.
그가 순교한 이후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피가 뿌려진 대동강 주변 평양은 1907년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 한국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칭까지 얻게 됩니다.
우리가 단호하게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우리의 삶의 증거로 어둠에 있는 자들을 빛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납니다. 나타나는 것마다 빛이 됩니다.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어둠의 문화를 빛의 문화로 바꾸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바다는 2-3% 소금만 있어도 정화하고 부패를 방지하는데 기독교인 20%가 됩니다. 선교 제 2 대국이 되고 성경을 가장 많이 발행하고 가장 많이 기도하고 가장 많이 예배드리는데도 세상을 밝게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빛의 사람이 되었으니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신앙인들이 빛의 열매인 착함, 의로움, 진실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어둠의 문화는 빛의 문화로 바뀌어 집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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