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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8:1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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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 |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는 성령
롬 8:18-27
*아프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어요.
목사란 늘 아픔과 기쁨을 번차례로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지난해 유방암 수술을 받고 건강하게 지내던 교우가 다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정문수 집사를 배웅한지 몇 날 되지 않았는데,
조양호 집사의 이식수술로 기뻐서 운지 지난준데 다시 목사의
마음에 고통이 일어납니다.
9월의 첫 날, 마음은 새로워지라고 출렁거리는데 뭘 전하라고
하시는지 한 주간을 내내 귀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드디어, 하나님이 내게 말하셨습니다.
"내 마음을 교우들에게 전해줘라. 그리고 새 힘을 얻게 하라!"
이번 주 우리가 듣게 될 음성은 이것입니다.
사는 게 고통스러워 신음소리라도 내고 싶은데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먼저 우리가 겪는 고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어요.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신음하고 있고, 첫 열매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에서부터 문제를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속량 받기 위해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나아가서 성령도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준다고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간절한 신음 소리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이 순서는 전통적인 교리나 신학, 또는 교회가 말하는 순서와 달라요. 거기서는 대개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교회―세계의 순서인데, 여기서는 오히려 반대로 전개되고 있지요?.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피조물의 절규, 그것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신음, 그들을 대신하여 간구하는 성령, 그들을 대신하여 간구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출애굽 사건도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종살이하던 히브리 노예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보시고, 그 현장으로 내려오시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과 부르짖음이 출애굽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위로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할 수 없는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을 자기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소원과 기도와 탄식은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넘어서는 성령의 뜻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꼭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소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모두 소중하며, 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탄식과 기도와 소원을 들을 줄 알고 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에요(26절).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 교회,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죠. 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기도의 방법이나 기술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하는 기도 자체가 중언부언하기도 하고 말로만 하고 지키지 못하기도 하는 크리스찬의 실존을 리얼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말도 할 줄 모르고 기도도 할 줄 모르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그들이야말로 뚜렷한 소원을 가지고 있고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가 기도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피조물들의 이런 신음과 해산의 고통과 소원을 “아는 것”(22절)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의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영성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아래로부터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자연의 탄식을 듣고, 아이들과 여인들의 탄식 소리를 듣고, 노점상과 실업자의 탄식 소리, 병들고 가난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극심한 고통에 있을 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과 친해지고 그 속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는 영성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대화할 수 있는 ‘너’로 대할 때, 삶을 세상의 논리에 두지 않고 모두 하나의 피조물로 대할 때 우리는 그들의 신음소리와 기도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언어를 꼭 인간의 말에만 국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은 언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신음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도 힘들면 신음소리를 냅니다. 그것 또한 기도입니다. 그때는 말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이쿠”, “아-!” 하고 탄식할 뿐입니다. 이런 탄식이 말보다 더 진실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 이하에 보면,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보다 세리의 탄식이 더 좋은 기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그겁니다.
우리도 때로 기도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큰 슬픔을 당하면 말문이 막힙니다. 그때에 바울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고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도 아시고 대신 기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 18:10)
이렇게 마태 기자는 작은 사람 하나라도 각 사람마다 하나님 앞에서 그를 위하여 말해주는 천사가 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수호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보혜사(paraketos)라고 하는데 이는 변호사, 대변자, 대신해서 말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자기 뜻을 우리에게 관철하려고 하기보다 우리의 소원과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아래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도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시는 분이라고 되어 있죠?(롬 8:34). 우리가 어떻게 할 줄 모를 때, 우리를 대변해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 이 사실보다 더 고맙고 은혜로운 것이 있겠어요?.
바울은 성령은 이런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우리 힘으로는 되지 않을 때, 성령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유창한 말을 하는 것이나 내가 꼭 몸부림을 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음을 느끼는 것,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도 나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분이 있음을 알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은 또 하나의 진정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에게 한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또 그 노인은 초심자의 행운에 대해 말하죠. 처음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은 꼭 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은 대개 자기가 원한 것들이며, 주위의 자연과 운명 행운 신의 섭리는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가공의 픽션이요 문학일 뿐이겠지만, 우리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구하는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이 계시니, 그분을 향한 푸근한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9월의 첫 주일입니다.
바람이 선들선들해지니 마음도 새로워집니다. 뭔가를 새롭게 해야 할 것 같은 요구가 자꾸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저 길거나 짧은 신음만 터집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을 위해 뭘 어떻게, 내 삶을 위해 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슨 일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내 가정과 가족과 삶을 위해서, 나를 대신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또 내가 계획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기도한 것이 응답이 되지 않는 것같이 보일 때,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풀이 죽지 맙시다. 내 속에 그런 소원을 주신 이가 주님이라고 생각하십시다. 수능고사장 밖의 어머니처럼, 그보다 더한 심정으로,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면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분이 있음을, 내가 슬퍼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으로 나를 위해서 호소하고 대신해서 간청하는 보혜사 성령이 있음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께 맡기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연금술사를 말할 때 우리는 신앙의 연금술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연금술사가 여러 재료들을 녹여서 금을 만들듯이, 우리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신음을 들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내 속에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 속의 성령께서 간절히 구하시는 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내 속의 소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자연이 신음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성령이 나를 위해 탄식하는 것을 알아갈 때 우리는 나 자신의 삶을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소원, 나 자신의 고통, 나 자신의 기쁨, 나 자신의 슬픔에서 내 것만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분이 주시는 선물을 연단해내고 녹여내고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주 멋진 신앙의 연금술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9월의 첫날 입니다. 신음소리 가득했던 날들을 통과하고 고개 숙이기 시작한 벼 이삭 가득한 들판으로 나갑시다. 거기서, 우리를 위해 나보다 더 신음하고 탄원하고 소원하고 계시는 성령과 만납시다. 그리고 내 인생의 멋진 황금 들판을 바라보십시다.
롬 8:18-27
*아프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어요.
목사란 늘 아픔과 기쁨을 번차례로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지난해 유방암 수술을 받고 건강하게 지내던 교우가 다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정문수 집사를 배웅한지 몇 날 되지 않았는데,
조양호 집사의 이식수술로 기뻐서 운지 지난준데 다시 목사의
마음에 고통이 일어납니다.
9월의 첫 날, 마음은 새로워지라고 출렁거리는데 뭘 전하라고
하시는지 한 주간을 내내 귀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드디어, 하나님이 내게 말하셨습니다.
"내 마음을 교우들에게 전해줘라. 그리고 새 힘을 얻게 하라!"
이번 주 우리가 듣게 될 음성은 이것입니다.
사는 게 고통스러워 신음소리라도 내고 싶은데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먼저 우리가 겪는 고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어요.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신음하고 있고, 첫 열매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에서부터 문제를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속량 받기 위해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나아가서 성령도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준다고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간절한 신음 소리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이 순서는 전통적인 교리나 신학, 또는 교회가 말하는 순서와 달라요. 거기서는 대개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교회―세계의 순서인데, 여기서는 오히려 반대로 전개되고 있지요?.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피조물의 절규, 그것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신음, 그들을 대신하여 간구하는 성령, 그들을 대신하여 간구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출애굽 사건도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종살이하던 히브리 노예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보시고, 그 현장으로 내려오시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과 부르짖음이 출애굽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위로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할 수 없는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을 자기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소원과 기도와 탄식은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넘어서는 성령의 뜻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꼭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소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모두 소중하며, 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탄식과 기도와 소원을 들을 줄 알고 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에요(26절).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 교회,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죠. 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기도의 방법이나 기술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하는 기도 자체가 중언부언하기도 하고 말로만 하고 지키지 못하기도 하는 크리스찬의 실존을 리얼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말도 할 줄 모르고 기도도 할 줄 모르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그들이야말로 뚜렷한 소원을 가지고 있고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가 기도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피조물들의 이런 신음과 해산의 고통과 소원을 “아는 것”(22절)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의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영성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아래로부터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자연의 탄식을 듣고, 아이들과 여인들의 탄식 소리를 듣고, 노점상과 실업자의 탄식 소리, 병들고 가난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극심한 고통에 있을 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과 친해지고 그 속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는 영성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대화할 수 있는 ‘너’로 대할 때, 삶을 세상의 논리에 두지 않고 모두 하나의 피조물로 대할 때 우리는 그들의 신음소리와 기도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언어를 꼭 인간의 말에만 국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은 언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신음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도 힘들면 신음소리를 냅니다. 그것 또한 기도입니다. 그때는 말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이쿠”, “아-!” 하고 탄식할 뿐입니다. 이런 탄식이 말보다 더 진실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 이하에 보면,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보다 세리의 탄식이 더 좋은 기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그겁니다.
우리도 때로 기도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큰 슬픔을 당하면 말문이 막힙니다. 그때에 바울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고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도 아시고 대신 기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 18:10)
이렇게 마태 기자는 작은 사람 하나라도 각 사람마다 하나님 앞에서 그를 위하여 말해주는 천사가 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수호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보혜사(paraketos)라고 하는데 이는 변호사, 대변자, 대신해서 말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자기 뜻을 우리에게 관철하려고 하기보다 우리의 소원과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아래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도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시는 분이라고 되어 있죠?(롬 8:34). 우리가 어떻게 할 줄 모를 때, 우리를 대변해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 이 사실보다 더 고맙고 은혜로운 것이 있겠어요?.
바울은 성령은 이런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우리 힘으로는 되지 않을 때, 성령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유창한 말을 하는 것이나 내가 꼭 몸부림을 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음을 느끼는 것,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도 나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분이 있음을 알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은 또 하나의 진정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에게 한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또 그 노인은 초심자의 행운에 대해 말하죠. 처음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은 꼭 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은 대개 자기가 원한 것들이며, 주위의 자연과 운명 행운 신의 섭리는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가공의 픽션이요 문학일 뿐이겠지만, 우리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구하는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이 계시니, 그분을 향한 푸근한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9월의 첫 주일입니다.
바람이 선들선들해지니 마음도 새로워집니다. 뭔가를 새롭게 해야 할 것 같은 요구가 자꾸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저 길거나 짧은 신음만 터집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을 위해 뭘 어떻게, 내 삶을 위해 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슨 일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내 가정과 가족과 삶을 위해서, 나를 대신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또 내가 계획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기도한 것이 응답이 되지 않는 것같이 보일 때,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풀이 죽지 맙시다. 내 속에 그런 소원을 주신 이가 주님이라고 생각하십시다. 수능고사장 밖의 어머니처럼, 그보다 더한 심정으로,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면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분이 있음을, 내가 슬퍼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으로 나를 위해서 호소하고 대신해서 간청하는 보혜사 성령이 있음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께 맡기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연금술사를 말할 때 우리는 신앙의 연금술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연금술사가 여러 재료들을 녹여서 금을 만들듯이, 우리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신음을 들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내 속에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 속의 성령께서 간절히 구하시는 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내 속의 소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자연이 신음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성령이 나를 위해 탄식하는 것을 알아갈 때 우리는 나 자신의 삶을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소원, 나 자신의 고통, 나 자신의 기쁨, 나 자신의 슬픔에서 내 것만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분이 주시는 선물을 연단해내고 녹여내고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주 멋진 신앙의 연금술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9월의 첫날 입니다. 신음소리 가득했던 날들을 통과하고 고개 숙이기 시작한 벼 이삭 가득한 들판으로 나갑시다. 거기서, 우리를 위해 나보다 더 신음하고 탄원하고 소원하고 계시는 성령과 만납시다. 그리고 내 인생의 멋진 황금 들판을 바라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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