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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받아먹으세요.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906 추천 수 0 2011.11.21 18: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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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3-16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 
이 말씀을 받아먹으세요.
마5:13-16

*바삐 돌아다니다가 교회에 돌아 왔더니 '어느 교우가 요즘 용한 기도처를 찾아 다닌다'고 누군가 귀뜸합니다. 그 연약하고 딱한 심정이야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목사로서, 언제나 예수님의 펄펄 끓는 가슴을 퍼 나른다고 자만(?)하는 목사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괘씸하기도 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떻게 속내를 다 드러낼 수 있나요? 성경을 열고 예수님은 어떻게 이기라고 말씀 하셨나, 그걸  다시 말해 주는 수 밖에요! 누군가 말했을 거고, 언젠가 나도 했을 이  성서 본문을 다시 들춘 이유입니다. 제발, 예수님이 가르치는방법으로 세상을 이기고, 잃어버린  자기를 찾게 되길 비는 마음을 담아 한 그릇 담습니다. 말씀을!!!!!!!!!!  


오늘 본문 말씀은 산상설교의 맨 처음에 나오는 행복선언에 이어서 나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의 소금이며 또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 때문에 사람들은,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하나의 짝처럼 여기며, 크리스천의 삶에 지침이 되는 것으로 여기지요. 이를테면,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며, 하나님이나 예수님 또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을 비추는 삶은 대개 착한 일을 하는 것이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관점으로는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요 필수 영양소이므로, 크리스천은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런 해석이나 설교는 소위 은혜롭기는 하지만, 상투적인 도덕이나 교리 설교로 떨어질 수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빛에 관한 말을 봅시다.
마태 마가 누가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은, 등불은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는 것입니다(15절; 막 4:21; 눅 8:16). 마가와 누가에서는 이 구절 다음에,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내용이 나오죠. 그리하여 전체적으로는 등불―흔히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은 지금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곧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마태 기자는, ‘숨겨진 것이 드러난다’는 구절 대신에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는 구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15절 앞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구절을 첨가하였죠. 그리하여 전체적인 주제는 ‘등불’에서 ‘사람들이 내는 빛’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한 예들은 많지만, 사람을 빛이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특히 ‘빛을 비추어라’(lampsato)고 하는 명령형은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 독특한 것입니다. 마태의 본문을 해석할 때는 이런 표현들에서 나타나는 독특함이나 파격성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니, 살린다기보다는 이 부분을 아주 명심해야합니다.

하지만 주석가들은 대개 이러한 표현들에서도 윤리적 교훈을 끌어내기에 급급하죠. 이를테면, 해그너(D.A. Hagner)는,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WBC주석). 그는 이런 결론은, 본문의 맨 끝에 나오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구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고 보는 거예요.

하지만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너희의 착한 행실’은 ‘너희의 그(ta) 착한 행실’이며, 절의 맨 앞에는 hopos(그리하여)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리하여 전체 문장은 이렇게 됩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그리하여, 그들이 너희의 그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이런 문장 구조에서, ‘그 착한 행실’의 의미는 ‘빛을 비추는 것’의 의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그 반대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빛을 비추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밝히기도 전에 ‘착한 행실’을 어떤 종교적 또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죠.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크게 소금에 관한 말과 빛에 관한 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두 가지가 따로 나오는 것을 보면, 본래는 따로 떨어진 것인데, 마태 기자가 어떤 의도에서 결합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소금에 관한 말을 결합시킴으로써, 빛에 관한 말이 지니는 모호함을 좀 더 분명하게 하려는 것이죠.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는 구절의 본래적 의미를 밝히려면, 그것이 소금에 관한 말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유의해야 합니다.

소금과 빛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습니까? 어울리긴 하나요?
소금에 관한 말에서 그 핵심은 짠맛에 있지요? 짠맛은 소금만이 갖고 있는 특징, 고유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유함>이라는 단어를 유의하세요.
마찬가지로 “너희의 빛”이라는 말에서 핵심은 그들만이 낼 수 있는 어떤 특징이나 고유함, 곧 그들의 ‘빛깔’일 수 있겠죠?
마태 기자는, 소금에 관한 말과 빛에 관한 말을 결합시킴으로써, “너희의 빛”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의미의 빛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고유한 빛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소금에서 나는 것이 그 고유한 ‘맛’이라면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빛은 그 고유한 ‘멋’이라 하겠지요. 그만의 멋, 그만의 빛깔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이 ‘그들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보면 다 좋은 사람들, 좋아할 만한 구석이 하나씩은 있다고 말하죠. 그게 그 사람의 <빛>인 거예요. 그런 개개인의 빛깔, 그걸 두고 “너희는 개개인이 남들과는 다른 빛깔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걸 세상에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왜 이 말을 하는 것입니까?
바로 앞의 행복선언에서는 가난하고, 슬퍼하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위로를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최대한으로 격려하는 말이었죠. 그런 다음에 이제 그들에게, ‘여러분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세상의 빛이다’고 하면서, 위축되지 말고,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당당하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빛을 비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의 선언을 실천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찌그러진 인생을 펴는 방법인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인 것입니다. ‘그 착한 행실’(ta kala erga)은 ‘그 좋은 일’이라는 뜻도 되는데, 그것은 이제 자기의 빛을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만의 멋과 특징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나 교만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찌그러진 인생이 펴진다는 것입니다. 어때요. 아주 예수님다운 말씀이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다는 거예요. 무슨 아리송하고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말입니다. 거기 모인 형편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치고 계신 거예요.

몇 년 전 뉴욕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갔을 때, 한 코너에서 고호, 모네 등의 그림을 만난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낯선 곳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사진으로만 보아 온 고호와 모네의 그림 앞에 서는 순간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같이 피로감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건 그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이와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 방에서 나오니까 아까 본 고호의 그림보다 열 배는 커 보이는 웅장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고전적인 기법으로 아주 정교하고 세련되게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그 그림들은 고호의 시대에 아주 잘 나가던, 무슨 미술학원 원장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호는 그 당시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그림도 한 점밖에 못 팔았다고 하죠. 그건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풍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당시에 그렇게 유명하고 성공한 화가들의 100호짜리 그림 앞에는 한산한 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고호의 20호짜리 그림 앞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드는 것은 어떤 이윤가요? 어찌 보면, 고호의 그림은 자유분방하고 거칠고 서투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그것을 그린 이와 만나게 해 주는 어떤 신비한 매력이 있어요. 그것은 그의 그림에서 그가 느낀 아름다움과 그만의 빛깔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 아닌가요? 고흐가 세상을 이기는 방식이었던 거예요. 그야말로,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하는 예수의 말씀을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따른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에게서 자기의 빛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 라파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긍정적인 이유가 있어서네. 예술은 우리의 기술, 지식, 교육보다 더 위대하고 고차원적인 것이라는 인식 말일세. 예술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단지 손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네. 더 깊은 원천으로부터, 바로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솟아나온 것 아닌가.”

자신의 작품이, 자기 재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더 깊은 원천, 어떤 영원한 것에서부터 솟아나온 것이라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당당하게 자기 느낌과 색깔을 드러내게 했을 것이 아니겠어요? 또 그림이 안 팔려서 타협하고 싶을 때도 참고 견디며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가게 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느낌과 색깔을 포기하고 그저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면, 좀 더 편하게 살았을지는 모르나, 그 아름다운 작품들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느낌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의 빛을 깊이 드러낸 만큼 그는 또한 어떤 영원한 빛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나 교회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자기 느낌을 억제하게 훈련하고 자기 빛깔을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흔히 ‘끼’라고 하는 것, ‘끼를 발산하는 것’은 사람들이 받은 자기 느낌과 자기 빛깔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하여, 학교는 ‘날라리 짓’으로 매도하여 공부나 하라고 하고, 교회는 방탕한 것으로 간주하여 회개하라고 하곤 합니다. 또 교회는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욕심’으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자기 속에서 자기 느낌 자기 색깔이 드러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회개하고 기도하며 그것들을 억누르려고 하죠. 그래서 대개 그들은 고분고분하고 개성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이상한 길로 가요. ‘빛과 소금’을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해석하고 이해시킴으로 좀 더 명백한 은사 이른바, 신령하고 용한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 알아맞히는 일, 인간사의 문제에 대한 명료한 가르침 같은 것을 가르치는 지하실을 찾아 갑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의 빛을 버려두고 엉뚱한 빛을 찾아 나서는 일이 되며, 자기 인생을 남에게 먹이로 던져주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자기 빛이 없는 사람 아니, 자기 빛을 비추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자기만의 빛을 외면하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만물은 오직 그가 가지고 온 특성들만을 따라 살아 남는 것입니다. 꽃도 곤충도 동물도 그 만의 빛을 나타날 때 그다워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긴 자들이 아름다운 우주를 꾸미고 있잖아요. 그만의 맛과 빛갈을 잃은 것들은 시들고 말라서 자취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빛을 죽이고 부정하고 나서 무슨 영원한 빛을 반사하여 비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산상설교를 듣는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가난하고 슬퍼하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열등감과 죄의식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승리하는 방법은 뭘까요? 그렇습니다.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더러 태양이 되거나 밤거리의 가로등이 되라고 하지 않는 겁니다. 태양을 반사하는 별이나 달이 되라고도 하지 않죠. 작고 은은하지만 자기 빛을 내는 반딧불이처럼, 자기의 빛을 내라고 합니다. 그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하고 합니다. 그게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며, 소외되고 병든 세상을 탈출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싶습니까?
그러면 지금 당신 속에 있는 당신만의 빛깔로 사세요. 무슨 처방전을 다시 받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의 처방전, <소금과 빛으로 살아라.>이 말씀을 받아먹으세요. 그러면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거지로, 가난한 사람으로, 열등자로, 소외자로, 병든 세상의 병든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아라>이 말씀을 받아 지금, 잡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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