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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욥의 계절입니다.

욥기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184 추천 수 0 2011.11.21 18: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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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욥42:1-6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 

가을은 욥의 계절입니다.    
욥42:1-6  막 1:14-15

*나는 유난하게 '가을을 탑'니다.
나이 마흔 언저리의 가을은 늘 죽음을 사모하고, 멀리 떠나는 꿈을꾸곤 했습니다.
왜 이런 느낌이 몸과 마음을 방문 하는지 몰랐습니다.
이번 주 욥기서를 읽다가 알았습니다.
욥이 가을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욥의 가을]을 성찬으로 준비했습니다.
많이는 잡숫지 마시고 맛있고 즐겁게 하는 기쁜 식사 되길 원합니다. 

  
가을을 탄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까닭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침저녁으로 선들바람이 불어오면 높은 하늘을 쳐다보며 스스로에게 ‘산다는 게 뭐냐’고 물음을 뱉어내거나, 어디론가 휑하니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온 산하가 열매로 가득해지고, 들판은 또렷한 생명을 지닌 것들의 얼굴로 또렷해지는데 마음은 쓸쓸해지는 일체의 증후군을 ‘가을을 탄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득가득 채워지는 계절인데 왜 사람들은 이 가을 증후군에 드는 걸까요? 지난 한 주간 저는 이런 생물학적인 증상을 신학과 신앙으로 바꾸는데 많은 기도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전도사님의 질문을 받고 실타래 같이 얽혀있던 물음들이 순서를 따라 차례로 줄을 서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을은 욥의 계절입니다. 욥의 사람됨을 원초적으로 동경하는 유전인자가 우리들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보름달 같이 가득해지는 계절인데도 모든 걸 버리고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은 충동유혹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욥을 한 마디로 말해 보라면 그는 [회개]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가을이 욥의 계절이다]는 말은 [가을은 회개의 계절이다]라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가 하던 대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가을은, 욥의 계절입니다. 회개의 계절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하여 데려다가 아내를 삼고, 그 죄를 은폐하려고 하다가 우리아까지 죽이는 죄를 범하였지요(삼하 11). 왕권이 저지른 범죄였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죄는 흙이 눈에 덮이듯 덮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나단이 그의 죄를 고발하였을 때 다윗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나단 앞에서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삼하 12:13) 하고 고백을 하였어요. 시편 51편은 다윗이 이때 지은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내 반역죄를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내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시 51:1-3).

이렇게 다윗은 뒤늦게라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았고, 헷 사람 우리아의 사건 말고는, 그 생애 동안에 주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습니다(왕상 15:5).

*신약성서에 오면 세례 요한의 회개 운동이 두드러집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습니다(마 3:1). 그는 사람들에게 그러니 회개하라고 하면서 세례를 주었어요. 사람들에게 형식적인 회개에 그치지 말고 회개에 맞는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무리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 (세리들에게)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군인들에게)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을 하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해라.(눅 3:11-14)

세례 요한이 촉구한 회개 운동은, 그저 감정적으로 눈물 찔끔거리는 그런 형식적인 회개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는 실천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리와 군인들은 당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던 자들이죠. 그들에게 그런 죄악을 끊는 행동이 없으면, 성전에 와서 제물을 바치고 회개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는 실천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의 회개는 과거지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의 회개는 전혀 새로운 차원을 갖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의 선교와 선포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4-15)

예수의 선포는 세례 요한의 선포와 아주 비슷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회개와 예수의 회개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할 때는 심판을 강조하였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눅 3:7-9)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혼인 잔치나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에 비유하였습니다. 큰 잔치의 비유(눅 14장)에서 사람들의 과거의 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지금 주인의 초청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에서는 굳이 죄를 따진다면 그것은 도덕적 의미의 죄가 아닙니다. 주인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죄 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앞에서 죄의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의 의미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회개는 과거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어주신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자기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가 과거 지향적이라면, 예수의 회개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그것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초대 앞에서 우리가 자신을 새로운 세계에 개방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세례 요한의 회개가 참회로서 회개라면 예수의 회개는 방향전환, 곧 돌아섬으로서 회개입니다. 실제로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슈브(Shuv)나 그리스어 에피스트레포, 휘포스트레포(epistrepho, hypostrepho)는 모두 돌아서다(turn)를 의미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참회를 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와 가치 체계로 돌아가 정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것, 정착해서는 안 될 것에 정착하여 거기에서 안전 보장을 구하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회개는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을 동반합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식, 그리고 안전을 보장하는 기존의 것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하는 것은 역사의식 없이는 가능하지 않지요. 여기에서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기독교의 회개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회개에는 윤리적 참회만 있지 역사의식은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 회개와는 또 다른 차원의 회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욥기에 나타나는데 ‘자기 비움으로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회개라고 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벌(심판)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사고가 깔려 있지요?. 그런데 권선징악이나 <해피엔드>라고 하는 것은 동화나 드라마 속에서 이야기지 현실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서나 욥기 같은 데 이런 것이 자주 나옵니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전 8:10-12).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욥 21)

이런 생각에서 사람들은 회의에 빠집니다. 삶이 헛되고, 회개니, 용서니, 역사니, 정의니 하는 것이 모두 다 헛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회개 무용론을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모태신앙으로, 평생 동안 착하게 살아왔고 누구에게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고, 처음에 입교할 때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요즘 와서는 그다지 회개할 만큼 죄에 빠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개방이요 돌아섬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님 나라 앞에서 살아왔고 좋은 방향으로 달려왔기에 후회도 회개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꼭 이런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욥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시험하여 그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건강까지도 잃게 하고, 겨우 목숨만 붙여 놓고 극심한 고통 속에 살게 하였을 때, 욥의 친구들은 뭔가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 게 아니냐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길게 변호하죠.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를 돌보았고, 고난 받는 사람과 함께 울었고,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았고,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았고, 재산을 믿고 거만하지도 않았고, 나그네를 잘 영접하였다고 합니다(30-31장).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 자신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고 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바닷물이 땅 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장).

놀랍게도 하나님은 욥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회개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그가 받는 벌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 그런 것을 따질 뜻이 없는 것 같지요?. 하나님은 욥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길게 말씀하십니다. 그건 이 세상의 창조, 바다와 육지의 창조, 바람과 구름과 천둥과 번개 그리고 별과 별자리들, 짐승들이 새끼를 낳게 하고 그것들을 먹이는 일, 심지어 말이 앞발길질을 하고 콧소리를 내는 것까지, 독수리가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까지 일일이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셔요.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욥 40:2)

이제 욥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여기에서 욥의 회개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참회로서 회개도 아니고, 새로운 세계로 돌아섬으로서 회개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나를 지으신 분 앞에서 나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태양 앞의 티끌과도 같은 것임을 느끼는 데서 오는 감동이요 두려움입니다.
악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앞의 전도서와 욥기의 구절들이 약간 허무주의적인 느낌을 준다면, 욥의 이러한 기도는 자기를 비우는 겸허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태까지 놓지 못했던 자기 의를 마침내 놓아버리고, 자기를 비워버리는 데서 찾는 새로운 자아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주님에 대해 귀로만 들었다고 합니다. 회개니 뭐니 하는 것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으로 뵙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계시나 환상을 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의에서 벗어나니까, 자기를 비우니까, 비로소 대자연 속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참회로서 회개도 좋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는 용서받았다는 안심, 회개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무시, 또 다시 죄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방향전환으로서 회개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전환하지 못하고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 후회가 끊이지 않고, 현실 타협에 대한 부끄러움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회‘해야 한다’거나 방향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회개를 하나의 의무로 만들어서 구속하고, 또 그런 회개의 필연성이 다른 사람을 구속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내가 의로워지겠다는 집착, 또는 누가 뭐래도 나는 의롭다고 하는 교만을 비울 때 비로소 “이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하는 욥의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자기 의로 자신을 가득 채워서 도무지 주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없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여름내 우리는 들판에 있었습니다. 수집하고 채집하여 소유하려는 욕망의 들판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막상 모든 걸 눈앞에 모아 둔 현재, 우리는 ‘가을을 타는 마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욥의 유전인자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득한 물질의 우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보고 듣고 아는 영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욥처럼 회개해야 합니다. 다윗과 같은 회개 말고, 세례 요한이나 예수의 회개 말고, 욥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회개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회개 할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 의로 자신을 가득 채워서 도무지 주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없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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