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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182 추천 수 0 2011.11.21 18:41:53
.........
성경본문 : 마18:18-2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마18:18-20

2007.10.7

*식혜를 먹을 때, 단물위에 동동뜨는 잣 알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게 식혜를 식혜되게 하는 줄 압니다.
  단물을 다 빨고 나면 그 밑에,
  컵 밑바닥에 형체없이 문드러져 볼품없는 밥 알이 보입니다.
  달게 마시고서도 사람들은 그 문드러진 밥알에 경의를 표하지 않습니다.

  지금 껏 목사노릇을 해 보니,
  교회란 [식혜]같다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단물,
  그걸 빨면서,
  물위에 동동 뜨는 잣 알만 고르는 입술,
  그리고 처참하게 나뒹그러진 밥알!

  생명은 항상 그렇게 버림을 당하고 하찮게 여김을 받지만
  그래도 단물 내기를 쉬지 않습니다.
  지방 부흥회(정용치 목사 강사)끝나고 나서
  10월의 첫 번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자꾸 [식혜] 생각납니다.
  왜그런지 누구 아는 사람 있습니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고백을 했을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며 말씀하시기를,“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마 16:19). 우리는 베드로니까 그런 권한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권한은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너희”즉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주님의 자녀요 제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매고 푸는 권세는 토라 즉 율법을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포함하여 가르치는 권세, 나아가 죄의 용서와 구원의 결정까지 포함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런 엄청난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지내는 것은 신앙의 겸손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19절에서 두 번이나 거듭해서 강조된 것이“땅에서(epi tes ges) ...하면, 하늘에서도(en ourano) ...할 것이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는“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하는데, 이와는 순서가 반대로 되었습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죠. 하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자신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하늘의 천사들이 와서 일을 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땅에서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의 일들을 이루게 되고 결국은 하늘 일들이 이루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19절).

흔히 유대교 공동체에서는 공동기도를 위해서 최소한 열 명의 남자가 필요했어요. 그러나 예수는 이런 규정을 폐지하고 두 사람만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무엇이든 하늘에서 이루어 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의 삶의 주요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둘만 모여도 합심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합심하다’ (symphonein)라는 단어는 발음이 심포니(symphony)와 비슷하죠?. 그렇습니다. 실제로 심포니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sym은‘함께’라는 뜻이고 phoneo는‘소리를 내다’는 뜻이랍니다. 그러니까‘함께 소리를 낸다’‘한 목소리로 소리를 낸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이 화음을 맞추는 의미도 되지만, 우렁차게 기도를 하는 의미도 됩니다. 두 사람이라도 땅위에서 하나님께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면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주신다는 귀한 약속입니다.
이는 출애굽 공동체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때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고난을 돌아보셨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여기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늘 예배에서 성가대 찬양이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로 조화를 이루고 소리를 내는 심포니의 의미와 기도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심포네인은 그 자체가 찬양이요 기도인 것입니다. 성가대가 찬양할 때 우리는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한 마음이 되어 서로 한 목소리로 화음을 맞추고, 한 목소리로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최소한 몇 명이 모여야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오늘의 구절에 따르면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교회가 됩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들 모인 수가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합심하여’(symponesosin)이죠.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라도 합심하여 기도할 수 없으면 그것은 수퍼마켓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단 열 명이 모여도 합심하여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기도는 익숙하지만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는 것은 어색하게 느낍니다. 합심하는 기도, 합심하는 기도의 공동체가 있어야 모두 삽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기도는 합심하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그것은 별나거나 야단스런 것이 아닙니다. 성가대가 찬양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던 것이고, 주님의 약속이 깃든 것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벽이 무너지고 아집이 무너지고 화해하게 되고 그런 화목한 공동체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놀라운 일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한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지 들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20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예수 이름으로”입니다. 어느 유대교 랍비도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두 사람이 함께 모여 율법의 말씀이 그들 사이에 있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이는 20절 말씀과 아주 비슷합니다. 다만 율법 대신에“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둘만 모여도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지만, 크리스천들은 두세 사람만 모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때“예수 이름으로”는“예수의 능력으로”와 같은 의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하는 자들은“너희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병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느냐고 물었죠. 이 때“누구의 이름으로”는“누구의 권세로”와 같은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이“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한 것이라고 대답합니다(행 4:10). 크리스천은 예수 이름으로 예수의 권능에 의지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합심하여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예수 이름으로“모이는 것”(synagein)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집회에 대해서“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함께 모일(synagein) 때에”라고 말합니다(고전 5:4). 모이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들은“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라고 합니다(행 2:46). 교회를 말할 때 항상“……에서 모이는 교회”라고 합니다. 모이는 곳은 교회와 동의어입니다.“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롬 16:5)“그 집에 모이는 교회”(고전 16:19)“여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골 4:15)“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몬 1:2). 이런 식으로 말하면 우리 교회는“학곡리 [안박순 장로 댁]에서 모이는 성암교회”가 될 것입니다.

한때 신학자들이 대형교회를 비판하면서 이제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여서 자체 성장만 하고 일하지 않는 교회를 비판하면서 선교적 의미에서 흩어져서 일할 것을 강조한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 잘못하면 초대교회의 이“모이는”특징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부르려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 10:25)

이미 그때부터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도 모이는 일을 그만두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자꾸 모이는 일을 소홀히 여기고, 교회가 썩었다고 비판하면서 갈 필요가 없다고 하고, 헌금해 봐야 자체 유지에만 쓰이지 않느냐면서 차라리 시민단체에 기부금 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시민단체에 기부하거나 기여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기자 말대로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더욱 힘써 모이는 사람이 교회를 살릴 뿐 아니라 시민단체에서도 활약하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보곤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모이는 일을 폐지하거나 소홀히 하지 말고, 늘 예수 이름으로 모이기 힘쓰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20절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바로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바로 그 현장에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ekei eimi! 이건 미래 시제가 아닙니다.‘거기에 있겠다’가 아닙니다.‘내가 거기 있다’입니다. 예수의 현재적 임재입니다. 예수께서 계시는 곳은 죽은 다음에 가는 어떤 피안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입니다.‘에케이 에이미!’예수는 바로 이곳에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 사상은 이사야 예언자의 임마누엘 예언에서 나온 것이에요. 그는 유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희망을 주기 위해“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사 7:14). 마태복음 기자는 이 임마누엘 사상을 받아들여 그의 복음서의 틀로 삼았습니다. 마태복음서는 처음에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아기 예수의 이름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 자체가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의 마지막 구절은“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은 바로 이 약속이 그들이 모인 가운데서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았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이루어진 임마누엘 신앙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 극치를 이루었으며, 이제 초대교회는 임마누엘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가 임마누엘 그 자체였지만, 이제는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극히 적은 자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세상 끝까지 교회가 전파된 원리이자 신학입니다. 한두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이 임마누엘 신앙이 교회론의 핵심이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임마누엘 사건은 이제 먼 미래에 있는 것도, 저 많이 배운 율법학자들에게나 화려한 왕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여기 작은 갈릴리 사람들 한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데서 일어나고,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데서 일어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위대하고도 혁명적인 역사 인식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 오합지졸 같은 무리들인데,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역사의 중심으로 보는 인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이후의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왕궁이 아니라 마구간 구유 위에 누인 아기가 바로 임마누엘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가난하고 소외된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의 현장에서 이제는 또한 그런 작은 사람들이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임마누엘 신앙이 어느 정도 민족적 비전을 갖고 있었다면 초대교회의 임마누엘 신앙은 그런 것을 넘어섭니다. 이제 바로 이 지극히 작은 사람 한 둘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 두셋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예수는 에케이 에이미! 임마누엘 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그 주님은 우리와 같이 적은 수가 모인 바로 이곳에 에케이 에이미 임마누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오늘 부유하고 운 좋고 잘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적은 무리들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함께하십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하는,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요 성도인 것입니다. 주님이 함게 하지 않는 성도가 무슨 성도겠으며, 주님이 함께하지 않는 교회가 무슨 교회겠어요. 자기만의 이익을 따라 각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관용하고 용납하여 받아들여서 함께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합심하여 기도할 때 그 가운데 예수님이 임마누엘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겐 다른 필요가 아니라, 이제 우리교회는 다른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건 몇 가지 종교적인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혹독하셨을 예수님이 아니죠.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합심하여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아닙니까? 그거 없으면 껍데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합심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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