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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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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구 (교사)
지난해 11월 중순경, 친척집 결혼식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랑 신부 양가 모두 기독교 가정이기 때문에 주례를 두 목사님이 섰는데, 한 목사님은 끝 순서인 ‘축도’만 맡았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예배 끝에 시행하는 축도에 성경 ‘고린도 후서’ 13:13절을 활용하듯이, 이 결혼식에서 축도한 목사님 역시, ‘고린도후서’의 그 ‘축도 성구’를 활용해 다음과 같이 축도했습니다.
(1) 결혼식에서 들은 축도
“지금은,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여기 서있는 ㉱ 신랑, 신부 위에와, 바쁜 일 제치고 참석하신 모든 하객 위에 영원히 함께 ㉲ 할지어다.” (㉮, ㉯, … 기호와 밑줄은 설명 편의상 글쓴이가 넣은 것.)
이 축도를 듣고 나는 매우 언짢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축도 맨 끝의 씨끝(어미) “㉲ 할지어다”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에 관한 사리를 ‘축도’라는 말에서 한 번 알아봅니다. 한자 ‘祝’ 자와 ‘禱’ 자는 모두 ‘빌다’(움직씨=동사)란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특수한 형편의 사람이나 신에게, 어떤 것을 바라거나 빌어 주는 행동’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1)에서 ‘비는 행동의 주인공’은 사람이고, ‘빎의 대상’이 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축도에서 비는 이는 ‘목사’이고, ‘빎의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및 성령’이시며, (축도하여) ‘신의 은총을 입힐 상대’는 ‘신랑 신부와 여러 하객’입니다. 이러함에도 축도하는 이(목사)가 결혼식장에서 “…이 …할지어다”라고 한 말이, 누가 누구에게 내리는 명령인지 대단히 아리송합니다.
목사님들은 ‘성경은 모두 하나님 말씀’이며, 이 축도는 ‘고린도 후서’ 제13장 13절을 응용 확장한 것이니 이 축도의 “…할지어다”를 당연한 말로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축도의 씨끝 ‘ㄹ지어다’는,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엄히 내리는 ‘명령어’인바(『겨레말 용례 사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967쪽./ 『엣센스 국어사전』, 민중서관, 783쪽 참조), 이 축도의 모체가 되는 개역 성경 ‘고후13:13’의 ‘글의 짜임’을 검토해 보거나, 이 글을 영문 성경(NIV) ‘고후 13:14’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 명령(말씀)’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 생각됩니다. (개역 성경 ‘고후 13:13’은, NIV 영어 성경으로는 ‘고후 13:14’와 같음.)
앞 (1)에서 보인 축도의 근원인 한글 개역 성경 ‘고린도 후서’ 제13장 13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한 개역 성경은 2003년에 아가페출판사가 발행한 『한영 대역 성경』)
(2) ‘개역’ 고후 13:13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하나님의 사랑과, ㉰ 성령의 교통하심이, ㉱ 너희 무리와 함께 ㉲ 있을지어다.”
또, 한글 개역 성경의 대본인 ‘영문 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 Bible; 아래부터는 NIV라 함)은 아래와 같습니다.
(3) ‘NIV’ 고후 13:14
“May ⓐ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 the love of God, and ⓒ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 you all.”
먼저, 한글 개역 성경을 살펴봅니다. (2)의 ‘㉲ 있을지어다’는 ‘명령어’인바, 글의 구조면으로 볼 때, 이 글을 ‘하나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ㄱ) 사람(기독교인)은 ‘예수님’을 ㉮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일컬을 수 있지만, 하느님은 예수님에게 “주, 그리스도” 등의 경칭을 붙일 수 없습니다. 사람 사회에서, 아들이 대통령의 직위에 있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을 “나의 아드님 대통령 각하.”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존경하는, ‘사람 (입장)의 말’이기 때문에 “주, 그리스도” 등의 ‘경칭’이 붙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반드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하나님을 예수님 아래로’ 격하하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ㄴ) ㉰ “성령의 교통하심” 역시, ‘하나님 말씀’이라고 상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활동을 “…하심“이라고 존대할 수 없습니다. ‘신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교통하심”이란 ‘경어’가 붙었습니다.
(ㄷ) 글 (2)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본다면, 이 글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명령하는(하나님의 사랑이 … ㉲ 있을지어다.) 형태의 글입니다.
(ㄹ) (바울의 편지임을 감안할 때) 글 (2)는 수신자를 “너희 무리”라 칭했는데, 역시 예절에 어긋납니다.
(2)의 ㉮, ㉯, ㉰는 ‘신의 역사(役事)’를 영적으로 느낀 <사람의 말>임에 반하여, “㉱ 너희 무리와 함께 ㉲ 있을지어다.”는 <사람을 향한 ‘신의 말씨’(명령)>입니다. 이 글은 <(신에게 향한) 사람의 말+(사람에게 향한) ‘신의 말’(명령)>로 구성되었습니다. (임자말 부분-사람의 말, 풀이말 부분-신의 말) 한 문장을 ‘표현하는 주체’(말하는 이)는 이렇게 둘이 될 수 없습니다.
(2)에는 ㈎ 말하는 이(바울→1인칭), ㈏ 듣는(들을) 이(고린도교회 사람들→2인칭), ㈐ 1인칭의 말에 나오는 이(예수, 하나님, 성령→3인칭)가 있습니다. 이 축도를 ‘하나님의 명령’(있을지어다)으로 본다면, 이 글은 3인칭이 3인칭(자신)과 2인칭에게 명령하는 글입니다. (그러나, 명령은 1인칭이 2인칭에게만 가능합니다.)
이 글이 이와 같이 국어의 어법을 크게 벗어나게 된 근본은, 우리 나라 기독교 전래 초기에 외국 성경을 우리말로 옮긴이(번역자)들이, <교우들을 위한 바울의 기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담은 ‘바울의 말’>로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각종 희곡에서 ‘작가의 뜻’은 배우의 ‘연기’에 의해 관중에게 전해짐과 같다는 비유입니다. 작가의 뜻이 희곡에 들어있지만, 배우의 연기(언어, 동작, 표정) 없이는, 작가의 뜻이 관중에게 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배우의 말과 연기’에 의해 작가의 의도가 관중에게 이어집니다. 바울 같은 선각자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도 신도들에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고매한 작가의 뜻’도 배우의 ‘연기’에 따라 빛날 수도 있고 빛이 바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퍼진 바울의 서신(원문)과 ‘번역문’의 성격(표현이 바르냐 그르냐)에 따라, 사람들(신도)이 ‘하나님의 뜻’을 ‘영접’할 수도 있고 ‘손사래칠’ 수도 있습니다.
번역자들이 (3)에 보인 영문 성경을 <하나님의 뜻을 담은 ‘바울의 말’>로 보았다면, “… 너희 무리 …ㄹ지어다”라고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은 ‘바울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뜻)>이, 내용은 같은 것이겠지만 표현(사용 어휘)은 같을 수 없습니다. 그 차이를, 뒤에 오는 ‘영호의 말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2)를 더 알아 보기 위하여 (3)의 영어 성경을 살펴봅니다. 이 ‘영어 성경’에는 맨 앞에 ‘may’를 썼습니다. 『엘리트 영한사전』(시사영어사, 2004)은 ‘may의 용법’에 관하여, ① 기원ㆍ저주, ② 추측, ③ 용인, ④ 허가, ⑤ 가능성, ⑥ 불확실성, ⑦ 명사절, ⑧ 부사절, 이렇게 8종으로 나누어, <뜻과 보기>를 설명했는데, ‘may’가 ‘명령문’에 이용된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개역 성경은 ‘명령문’으로 썼지만, ‘NIV’는 ‘기원문’으로 썼습니다.
기독교 전래 초기의 성경 번역자들이 ‘하나님을 우러르는 태도’를 높이려는 뜻에서 이렇게 썼거나, 영어의 명령문에서는 움직씨를 머리에 두므로, “ⓐ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를 ‘명령문’으로 오해하여 이렇게 쓴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may’는 ‘도움움직씨’(조동사)이지 본움직씨가 아니므로, (3)은 명령문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글(3)은 <신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은총 베풀기를 바라는’> 바울의 기원입니다. 물론 이 축도는, 바울이 ‘성령의 부림[使役]을 받고 쓴 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 ‘사전’은 ‘may’를 사용하는 ① <기원ㆍ저주>의 ‘글 형식’을, <May+주어+동사>라고 쓰고, ‘보기’를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 May you live long. (오래오래 사시옵소서.)
㉡ May he rest in peace. (고이 잠드시기를 <빕니다>)
㉢ May they all be damned.(모두가 저주받기를 …./ 괘씸한 놈들.)
위 예문(㉠, ㉡, ㉢)과, ‘NIV’ 성경(3)의 ‘글 형식’은 100% 일치하고, 이 세 개의 ‘영어 예문’에 대한 우리말 해석도 문법에 정확합니다.
또한, 영문 성경과 번역문이 이렇게 다른 원인을 다른 각도에서 찾아봅니다. 어휘 ‘ㄹ지어다’의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축도(개역 성경)에 알맞은 말은 ‘…ㄹ지어다’가 아니고 ‘…ㄹ지니라’입니다. 여러 국어 사전을 보면 ‘…ㄹ지어다’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즉 ‘명령’으로 풀이했고, ‘…ㄹ지니라’는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 즉 ‘강한 추측’으로 풀이했습니다. 사람이 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ㄹ지니라’(마땅히 그러할 것이다)로 번역함이 옳습니다. 개역 성경의 번역 뼈대는 19세기 말에 형성된 것인바, 이때는 우리 국어 사전의 황무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의 ‘정의 파악’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축도(글 (1), (2))에 대하여, 신학적ㆍ어학적으로 조예가 깊은 분들이 기독교 단체에 건의한 결과,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에서는 이 번역의 잘못됨을 시인하여, ‘개역 성경 고후 13:13’을 시정하여 ‘축도’할 것을 소속 기관(교회)에 전달한 바 있다는 말을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상의 고찰로 볼 때 ‘고후 13:13’에 관한 ‘개역 성경’은 잘못된 번역이며, 이를 모체로 삼은 ‘결혼식장의 축도’ 역시 큰 결례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과거(1996년 이전?)에는 목사님들이 ‘고린도 후서’의 그 ‘축도 성구’(…할<을>지어다)를 그대로 활용해 축도했었지만, ‘총회의 시달 후’로는 이를 시정하여,
(4) 앞 (2)를 수정 응용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중략)…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중략)… 모든 성도들 위에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축원하옵나이다.”
라고 축도합니다.
이 축도는, ㉠누가 ㉡누구를 위하여 ㉢누구에게 기원하는 것인지 분명합니다. ㉠목사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성부 성자 성령께 비는 말’입니다. 이 축도는 삼위일체의 신에게 경건하고, 성도들이 듣기에도 은혜로운 축도입니다. ‘듣는 그 순간이 은혜롭게’ 들립니다. 이 글은 논란의 여지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렇게 글을 바로잡은 축도(4)와, 글머리에서 본 결혼식장 축도(1)는 그 느낌이 크게 다릅니다. (4)는 <신을 향한 인간의 경건한 애원>이고, (1), (2)는 축도로 보기 어려운 <고압적 명령>입니다. 이것은 축도하는 분들의, <성경과 자신에 대한 인식>에 각각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앞의 예문 (2) ‘고린도서’는, 사도 바울이 ‘성령의 부림’을 받고 쓴 편지인바, 겸손한 그 분이 (2)처럼 ㉱ “너희 무리, ……을 지어다”와 같이, 교우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말투로 썼을 리 없습니다. 전래 과정상 헬라어→라틴어→독일어ㆍ불어를 거쳐 영어권에 이른 ‘영문 성경’(NIV)도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명령’이 아닌 ‘기원’으로 썼습니다. 개역 성경 ‘고후 13:13‘은 영문 성경과 대조해 볼 때, 그것은 잘못된 번역이고 수십만 자 속의 아주 적은 분량이지만, 삼위일체의 신에 대하여도 결례이며, 기독교인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한글 성경 중 『표준 새 번역 성경』(대한성서공회, 1993)은 영어 성경처럼 각종 문장부호도 세밀히 넣었거니와, 각 문장의 끝에 오는 ‘풀이말’을, 현대인의 정서와 어법에 맞게 썼습니다. 몇몇 사례를 보면:
① 1인칭의 위치에서 하는 명령이나 반말. (예) ‘출 3:5’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
② 제3인칭 입장에서, 들어야 할 특정 대상 없이, 자기 견문을 전하는 형태(신문기사 같은 형식). (예) ‘창 19:15’ 동틀 무렵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여 말하였다.
③ 제1인칭 입장에서 2인칭을 존중하는 편지글 형태. (예) ‘롬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누어, 상황에 맞는 말로 기록하였습니다. ‘지엄한 느낌’을 위주로 삼는 개역 성경의 ‘번역관’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앞에 예시한 축도(1)를 보면, 목사님들 중에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는 생각으로 축도하는 분이 지금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대언자는 대언자’입니다. 대언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과 똑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한 집에 삼대가 함께 사는 사람의 언어 생활에 비유하면, 그 이치가 더 명확합니다.
〈영호의 말씨〉
영호네 집에서는, 저녁에 마을 아저씨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호 아버지도 있습니다. 2층에 계신 영호 할아버지는 그때 잠이 왔으나, 시끄러운 회의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영호를 불러,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으니, 아래에 가서 ‘회의를 조용히 하라’고 말해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래층에 내려간 영호는 아버지와 아저씨들이 회의하는 자리에 가, “할아버지께서 주무실 수 없다 하시니, 아저씨들은 회의를 조용히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뜻’을 실제로 이렇게 전할 아이는 없겠지만, “…ㄹ지어다” 하는 축도는, 할아버지의 뜻을 전하는 ‘영호의 말씨’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영호의 말은 <할아버지의 ‘뜻을 담은’ 말>이지만, 그 말씨는 “할아버지 말씀”(직접 화법으로 쓴 할아버지 말씀)과는 달라야 되고, 목사님의 축도도, 내용에 ‘하나님의 뜻(성령의 사역)이 담긴 말’이라 해도 그 말씨는 “하나님 말씀”과는 달라야 됩니다. ‘대언자의 말=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에서 공통 인자가 되는 ‘말’을 뺄 때 ‘대언자=하나님’이라는 있을 수 없는 참칭이 이루어집니다. 개역 성경도 앞의 성경들(‘표준 새번역’)처럼, 현대인의 정서와 문법에 맞게 또 다시 개역될 때에, 기독교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개역 성경 ‘고후 13:13’을, 현재의 개역 성경 틀이나, ‘고후 13:13’의 앞에 나온 글들과 어울리게 고친다면, 다음과 같이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 좋은 표현으로 고칠 수도 있으나, 성경(66권)을 다 고치지 않는 한, ‘고린도서 전체’와의 불균형 때문에, 더 좋게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5) ‘고후 13:13’을 고친 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 그대들에게 ㉯ 있을지니라.” (*㉮, ㉯는 고친 곳임.)
그러나 이 글도, “… ㉮ 그대들에게 ㉯ 있을지니라.”를 생각할 때, 이를 교회나 결혼식장 등에서 사용할 경우에는 ㉮, ㉯ 부분을 경어로 고쳐서 사용해야 됨은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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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린도후서13:13 각 성경버전
개역/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개정/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표준/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공동/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현대어/모든 성도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현대인의성경/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쉬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킹제임스/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댓글 '3'
이진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부터 시작하여 고대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자손들에게 직접 축복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창 27:25-29). 조상이 자손에게 축복하면 복이 그대로 후손에게 임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자손에대한 축복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종(목사)은 믿음의 아들들인 성도들에게 축복할 권한을 하나님으로 부터 위임받아 직접 축복하는 것이 축도임을 알기 바랍니다.
푸른하늘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입니다. 핵심은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예배 순서지에도 “축복선언”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에서는 축도를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봉사로 이해합니다.
즉 축도를 기도가 아닌, 설교의 한 형태로 이해한 것입니다.
축도는 복을 간구하는 축복기도(祝福祈禱)가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복을 선언하는 축도(禱道)입니다.
축도의 시간은 설교자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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