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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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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nosuchjesus.com/ |
인류 역사상 오직 두번 뿐인 사건
롬12:1-2)
2005.3.1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몸의 산 제사
로마서는 11장까지 인간의 공적과 선행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12장부터는 1절에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가 어떻게 그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신자에게 가장 먼저, (첫번째라는 것은 언제나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무엇을 권면하고 있는가?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가? 이삭이나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 실제적인 희생제물로 바쳐져야 하는가?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세상의 핍박 앞에 순교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몸을 아끼지 않고 교회 봉사나 이웃 섬기는 일에 앞장 서야 하는가? 혹은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몸을 더럽힐 수 있는 모든 죄악을 제거해서 몸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가꿔야 하는가?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니까 자꾸 육신적 신체와 연관된 측면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절 마지막에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과 영적예배를 동일시 한 것만 보아도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뜻은 2절에서 세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이 세대를 본 받지 말아야 하고, 둘째 마음을 새롭게 변화 받고, 셋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의 본을 받지 말고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이 세대의 특징이 무엇인지 정확히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더욱 추해진(?) 이 세대
오늘날 이 세대의 특징은 무엇인가? 얼마 전 한국의 한 광고 회사에서 한국의 현 젊은 세대를 “P”세대라 이름 지었다. 그 이유로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참여하며(Participation), 열정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며(Passion), 기존의 사고 체계를 바꾸어 무엇이든 할 수 있는(Paradigm Shift) 세대라는 것이다. 현 세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잘 지적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기 위해 어떤 일에도 참여 하지 않고 방관하고, 무슨 일에도 열정을 죽이며, 고리타분한 사고 방식을 끝까지 고집해야 하는가? 본문에서 세대라는 말은 20 대, 30대 연령으로 나누는 세대(Generation)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전반에 흐르고 있는 세태(世態)를 말한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람과 복음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 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사조, 사상, 흐름, 유행, 경향 등을 의미한다.
그럼 21세기 현 세대 불신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죄악이 만연하고, 물질에 탐욕적이며, 극도로 이기적이고, 쾌락을 추구함에 갈 데까지 간 것인가? 모든 사람들은 세상이 갈수록 더 부패해져 간다고 생각하는 데 이는 착각이다.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탄식 했듯이 인간이 사는 곳에는 시대와 장소와 인종과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항상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온갖 추잡한 이야기가 많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악이 망라되어 있다.
근래 들어 더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매스컴이 발달해 이라크 전쟁에서처럼 일선 전투 장면도 TV로 샅샅이 중계되듯이 어떤 범죄든 전 세계에 순간적으로 적나라하게 보도되니까 더 죄악이 만연해진 것처럼 착각한 것 뿐이다.
지난 2003년 6월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텍사스 주에서 시행하고 있는 Sodomy 법의 적용을 금지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미국은 현재13개 주에서 동성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Sodomy 법을 시행하고 있다. 몇 달 전에 텍사스 주의 한 게이 커플이 이성간의 성행위는 금지 하지 않으면서 동성간의 그것만 금지한다면 불공평하며 개인 사생활의 자유를 보장하는 연방 헌법에 위반된다는 헌법소원 (憲法所願)을 냈었다.
1986년에 조지아 주의 게이 카플이 동일한 소원을 내었을 때는 총 9명의 연방 대법원 판사가 5:4로 소도미 법을 인정해주는 판결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런데 이 번에는 6:3으로 이전의 판결은 부적절하며 게이의 사생활도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정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세대의 특징이 있다. 성도덕이 타락하여 갈 데까지 갔고 동 성애가 공공연히 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추해진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의 추하고 더러운 짓거리는 언제나 있었다. 정작 문제는 무감각해진 것이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한 성공회 신부
오해는 말아야 할 것은 동성 애자는 불쌍히 여겨야 한다. 동등한 인간으로서 공평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더 큰 사랑으로 섬겨 그들의 영혼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 들어가야 한다. 그들도 십자가 앞에 나와 변화를 받아야 그 불쌍하고도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동 성애에는 두 종류가 있다. 동성 애자 스스로 타락하여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다 한계를 넘어 변태로 가는 동 성애가 그 한 종류다. 둘째는 한국의 유명 연예인 하 모양과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이상 성향을 갖고 나오는 경우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수천년간 인류의 더러운 죄악의 씨앗이 유전자를 바꾸어 버린 결과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성 애를 하는 행위 자체는 분명한 죄다.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과 죄 자체를 인정해주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도저히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성향을 태어 났으면 동 성애를 하느니 차라리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도 어려서부터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자기 영혼과 육신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 맡기면 그런 성향도 얼마든지 고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동성 애 행위 자체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큰 일이다. 자기들이 동의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된다는 논리 만으로는 청소년들의 포르노 중독, 부부교환, 일부다처제 등을 막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근친상간까지도 가버릴 수 있다. 사람이 아니라 개가 되어버린다.
오래 전에 미국 TV 아침 토크쇼에 동성 애자로 한 교회를 담임하게 된 성공회 신부가 출연했다. 그는 “자기를 담임으로 선출해 준 소속 교회와 교단을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프로리다의 한 소녀로부터 자기는 성공회 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세례를 받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는 마치 강도가 밤에는 강도 짓 하다가 낮에는 멀쩡하게 목사로 시무하는 것과 같다. 매일 저녁 집에 돌아가면 동성 애라는 분명한 죄를 지으면서도 그 다음 날 교회에 나와 하나님과 예수님의 고귀한 이름을 부르고 거룩한 의를 실천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될 법이나 한가? 성직자도 이렇게까지 뻔뻔해졌는데 일반인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물론 강도였던 자, 살인자였던 자, 동 성애였던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 죄를 완전히 씻은 후라면 얼마든지 목사가 될 수도 있다. 모세, 다윗, 바울 모두 살인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자신은 실수하고 넘어질지라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놓친 적이 없고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나갔던 적은 없다. 그 죄를 뼈를 깎듯 회개하고 씻은 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다. 어떤 거룩한 사역자라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중에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과 죄를 짓고 나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 자복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럴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만약 여러분의 교회에 알코올 중독자 목사와 동 성애 목사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둘 다 택할 수 없다. 현행범으로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매일 밤 의적 일지매 같이 완전 범죄로 도적질하고 그 훔친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숨어서 도와주는 목사가 있다 해도 그 사람을 목사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는가?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죄가 아니고 남의 사생활을 간섭해선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인류 역사 초유의 일
동성 애를 죄로 여기지 않는 이 문제는 정말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단순히 인류 지성이 깨이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의 한 풍조로 여겨선 안 된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고 법을 만들어 국가를 통치한 이래 즉 인류가 생긴 유사이래로 간음과 동성 애를 죄라고 여기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류 역사 4-5천년 동안 간음을 죄가 아니라고 한 것은 불과 몇 십년 전의 일이다. 이젠 동 성애 마저 죄가 아니라고 한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도 여러분이 꿈을 안고 이민 와 살고 있고 앞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터를 닦고 살아야 할 바로 이 미국 땅에서부터 그 일이 시작되었다.
저들이 간음과 동 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미 자기들도 모르게 사단의 자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세대의 죄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가?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들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끼리의 공존과 번영이다. 잘 먹고 잘 사는데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자기들 끼리 남 모르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간섭하고 통제 해선 안 된다고 믿는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무엇이든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세상 만사를 주관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하며 부패된 존재인가 하는 인식은 눈곱 만큼도 없고 하나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 보려는 사고와 행위는 완전히 낡아 빠진 패러다임으로 생각한다. 어디 가서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믿는다고 하면 아직도 저런 고리타분한 신념체계를 버리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믿는가 이상한 듯 쳐다본다. 심지어 교회 마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말을 하기 싫어 한다. 영원한 세계가 있으며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흘린 보혈로 그 죄를 씻는 길 밖에 없다는 설교를 하면 아예 우습게 여기는 풍조마저 생겼다. 단순한 인격적 훈화나 듣기 좋은 처세술 같은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목사들마저 십자가는 쉬쉬하며 감추고 있다.
동성 애는 분명히 죄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큰 죄다. 동성 애를 해도 될 것 같으면 하나님이 남녀 양성을 창조하셨을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저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교회 안에 동 성애 목사를 용납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창조주를 부인하면서 하나님에 관한 설교를 하겠다고 덤빈다. 동 성애나 간음이 얼마나 죄인 줄은 구태여 성경 공부를 안 해도, 복음의 진리를 몰라도 상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못 믿겠다면 실제 한 번 그 범죄를 저질러 보라.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워지며 싫어지고 까닭 모르게 두려워지는지 그것도 아무도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되는지 확인해보라.
소돔과 고모라의 전야
그런데 정작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따로 있다. 아까 지금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간음과 동 성애를 죄로 여기지 않는 때라고 했는데 사실은 두 번째다. 그랬던 적이 이미 오래 전에 한 번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두고 보지 못해 멸하려 가던 두 천사가 중도에 아브라함을 만나 그의 조카 롯을 살려 주기로 했다. 롯의 집에 가 머물면서 임박한 심판을 전하고 롯의 가족만이라도 피신하라고 권했다. 바로 그날 밤에 소돔의 백성들이 전부 롯의 집으로 몰려와 두 천사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 불행하게도 천사는 남자였고 소돔 백성들이 그들을 동성 애의 희롱 대상으로 그것도 집단 윤간을 하려고 덤볐다.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 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19:4,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얼마나 세밀하고 정확한지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무론 남녀노소’라고 표현하지 않고 단지 ‘무론 노소’라고 했다. 남자들만 모였다는 뜻이지 않는가? 정상적인 이성 교제는 저들에게는 전혀 안 중에 없었고, 젊은 놈부터 늙은 이까지 갈 데까지 간 모습이다. 오죽하면 롯이 그 두 천사 대신에 아직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을 내어 주겠다는 데도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도리어 롯을 “이 놈이 들어 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9절)라고 야단쳤다. 무슨 뜻인가? 다른 말로 바꾸면 “감히 네가 지금 우리더러 동성 애를 죄라고 정죄하려 덤비는가? 어디서 그런 고리타분한 소리를 지껄이는가?”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도 순리대로 여인을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1:26,27) 레스비안, 게이가 성행하여 성병이 만연하고 오늘 날에는 AIDS라는 천벌을 받았는데도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생활의 문제니까 따지지 말라고 한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32)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토씨 한 자 틀리지 않고 2003년 6월 26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가장 정의롭고 사회의 소금 역할을 감당해야 할 연방 대법원에서 리바이벌이 일어났다. 영적인 리바이벌이 아니라 죄의 절정에 오르는 리바이벌이다.
이 사건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세대가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지기 직전과 같다는 뜻이다. 죄가 절정에 올라 때가 찻다. 얼마나 많은 죄를 참혹하게 저질렀는가 하는 질과 양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형으로 정하심을 알고도 아예 무시한 것이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라는 사람을 오히려 죄인 취급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지금 그 재림이 당장 일 이년 내, 혹은 10년 20년 내 아니면 100년 안에 이뤄진다고 정확한 때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또 다른 이단의 탄생이 된다.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우리는 모두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시절 이래로 지금이 예수님이 재림할 가능성이 가장 높고 최후의 심판이 가장 임박한 때인 것만은 틀림 없다는 진리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시겠는가? 하나님이 부인되고 예수님의 이름이 구원의 길로 불리워지지 않을 때다. 바로 지금 이 세대다.
마지막 때의 부활과 새 하늘 새 땅으로 바뀌는 것은 몰라도 최소한 하나님의 극적인 징계는 곧 드러날 것이다. 그것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 3차 대전일지, 사스 같은 전염병일지, 쯔나미 같은 자연의 대재앙일지, 환경 파괴로 인한 생존 불가능한 상황이 될지, 아니면 전 세계적인 대공황이 될지 모른다. 심지어 우주로부터 대형 운석이나 행성의 충돌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동성 애를 죄로 여기지 아니한 때는 인류 역사상 소돔의 때와 지금 오직 두 번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신자가 먼저 받는 징계
왜 찔리는 이야기를 하는가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자의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드리는 말씀이다. 꼭 해야 할 말이기에 하는 것 뿐이다. 목사가 가장 먼저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아프면 가서 기도해 주고, 개업하면 예배 드려 주고, 하나님 잘 믿으면 형통하고 복 받는다고 격려 해 주어야 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목사가 할 일의 극히 일부, 아주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다. 목사란 성도들이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도록 흘러가는 풍조와 사상과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바쳐지게 해야 한다.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가 그 중독을 끊고 새 사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는가? 도시락 싸 들고 중독자들을 찾아 다니면서 중독에서 헤어 나오라고 말리고 권면하고 섬기지 않겠는가? 바로 그 같은 심정으로 말씀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뜻이 아니다. 저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외면하며 죄 가운데 있었던 삶이 얼마나 허망했으며 주 안에 들어 온 새 인생이 얼마나 풍요한가를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에 자꾸 죄를 씻고 주께로 나오라고 당부 드리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면 희망이 없다. 오직 허망할 뿐이다. 죄를 제대로 죄로 알지 못한다. 남에게 피해만 안 주고 내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 삶은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고 기다리는 것은 썩어 없어지는 멸망이다.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 무릎 꿇는 길뿐이다.
신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 값으로 사신 존재다. 우리 또한 죄를 저지르고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죽기보다 싫어 해야 한다. 제대로 십자가를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자라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제사장 나라요, 택하신 백성이요, 거룩한 족속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세상과 사단과 죄악 앞에 당당히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신자가 비록 연약해도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그럼에도 신자가 분별력을 가지고 말씀을 보며 기도하지 않고 신자마저 세상의 재미에 탐닉하고 죄에 무감각해져 이 세대에 물들어 가면 큰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세상으로 절대 먼저 안 간다. 신자를 통해 간다. 신자가 먼저 받는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축복도 신자가 먼저 받는다. 신자를 통해 세상이 은혜를 받는다.신자가 제대로 기도했으니 상 주고, 죄를 지었으니 벌 준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신자를 중심으로 섭리하신다. 세상의 역사를 오직 신자를 통해 이루신다.
신자는 그래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생명과 빛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싸워야 한다. 피 흘리기 까지 싸워야 한다. 매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중단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이 파멸로 정신 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권세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해서 세상 사람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해선 안 된다. 동성 애자를 찾아가 마치 완전히 별난 종자 취급해서 예수님의 심판이 너희들에게 곧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선 절대 안 된다. 그 앞에서 마치 우리는 너희와는 다른 신분으로 구원 받은 양 자랑해서도 안 된다. 오직 예수님의 권세를 들고 저들 앞에 나아가면 된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그 권세를 내 보여야 한다. 기도하면 병이 낫고, 박수 치고 찬양하면 은혜가 넘치는 권세인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가고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 권세인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믿는 자에게 주님이 동행하심을 나타내는 표적일 뿐이다.
권세란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어야 권세다. 동성 애자들 앞에 드러낼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순복하고 사랑하기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 하는 권세다. 이성간의 교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정상적인 결혼이 얼마나 풍성하고 신나고 재미있는가를 알게 해 주어야 한다. 세상에선 이혼이 밥 먹듯이 하더라도 신자간의 부부생활만은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깨가 쏟아져야 한다. 나아가 그들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고 십자가 안에서 그 영혼이 구원 받아야 할 불쌍한 죄인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더 안타깝게 여기고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신자가 갖는 예수님의 권세는 다른 것이 아니다. 본문 식으로 하면 이 세대를 본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조금만 깨어서 기도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앞에 세상의 유흥과 쾌락을 쫓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더 신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권세다. 성경말씀대로 살았더니 세상이 도저히 줄 수 없는 평강과 위로와 은혜와 능력이 흘러 넘침을 저들 앞에 보여 주어여 한다. 우리가 영원하고 거룩하며 저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을 세상이 보고 알 수 있어야 한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 육신에 관련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매일의 삶 속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하며 살아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 예배라고 했다. 교회에 나와 아무리 경건하고 엄숙하게 예배 드리고 간들 그렇게 살지 못하면 결국 예배드린 것이 허사란 말이다.
마지막으로 신자가 누리고 찾아 먹어야 할 가장 중요한 권세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 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며 가질 수 없는 권세다. 신자만이 갖는 권세다. 죄악으로 썩어져 내리는 이 땅을 끌어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권세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훼파된 성벽을 막아서는 권세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아 줄 마지막 의인 열명 안에 들어가는 권세다. 우리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지연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세다.
깨어 기도해야 한다. 정말 마지막 때임이 분명하다. 신통한 영력으로 알게 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은 것도 아니다. 이 세대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 해석해 볼 때 소름이 끼치도록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기에 알게 된 것 뿐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의 권세를 제대로 붙드는 신자가 많아져야 한다. 다시 한 번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간음과 동 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한 적이 인류 역사상 과연 언제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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