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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장 1~14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비유를 사용하여 설교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당신의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 중단되어진 것과,
그럼으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다.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14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인 “예복”에 대한 공부를 해보자.
이 비유에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쫓겨남을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순결한 품성을 표상한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하늘 왕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표상된 교회와 혼인 예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요한계시록 19:7,8 (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이제 “예복”이 상징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마태복음 22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혼인예식에 참석한 손님들로 비유되었지만,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순결한 교회를 상징하는 신부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입고 있는 “예복”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신부가 입고 있는
“흰 세마포”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복 = 흰세마포)
그렇다면 예복, 곧 흰 세마포는 무엇인가?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옳은 행실)라”
(요한계시록 19:8).
성경은 흰 세마포를 성도들의 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세번째 초청을 받고
하늘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의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할 것을 뜻한다.
(예복 = 흰세마포 = 성도들의 의)
성도들의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순결한 흰 세마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옷이다.
그 옷을 입은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애정과 충성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애를 살았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살았다면,
그들이 입었던 의의 세마포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둘러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자, 그들과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고,
저희를 둘러쌌던 빛의 옷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서 몸을 가리움으로 하늘의 옷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입고 있지 않는 의의 옷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한 행위나 자선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가리우려고 한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공로나 행위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성도들의 의”를 대신할 수 없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천사들과 함께 참석할 사람은
무화과 나무의 잎이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이사야 64:6).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여 주시는 예복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 왕인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이 예복은 진실로 회개하고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입혀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역사의 마지막 교회로 표상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권고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쓰신 상태에서
모든 율법에 일치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모든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나누어 받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성도들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에 굴복되며,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 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율법에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로서,
경건의 비밀을 설명하였던 것이다(빌립보서 2:5).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자들만이
성품과 생애가 변화된 삶을 살므로서,
율법의 높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의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와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죄이다.
그런데 죄는 무엇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가장 명백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4).
죄가 법을 범하는 것이므로, 의는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하였던 것이다(롬 6:6).
물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순종이란,
바리새인이 하는 것과 같은 외식적 순종이 아니라,
순결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성품은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순종하는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고,
악한 성품은 율법을 범하고 진리를 거절하는 악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줄 것이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계22:12).
우리가 오직 예수의 이름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그분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 속에 품음으로써,
변화된 성품을 가지고 거룩한 생애를 살지 않는 한, 구원과 영생은 보장될 수 없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요일 3:2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마지막 절에서 가장 두렵고 슬픈 말씀을 대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금의 초청을 받아서 혼인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잔치에 끝까지 남아 있도록 허락되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손님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채 잔치에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가라지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단지 인간적인 도덕가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를 세상에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의 생애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의 생애와 별다른 차이점을 나타내지 못한다.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가 높이는 율법을 보고서 교회로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율법을 무시함으로써 세상으로 기울어 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발자취를 따라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영생의 면류관은 바라보지만, 좁은 길 위에 놓여져 있는 십자가는 싫어한다.
비유 가운데 임금이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라는 물음에 그 사람이 “유구무언”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큰 심판날에도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런 핑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진리와 율법을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지만, 그 날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게는 놀라운 은혜의 빛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영생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은 두번 반복되지 않는다.
세상 끝이 마쳐지려는 이 때,
예복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지고 있다.
누가 그 부르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응할 것인가? 조심하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유의하라.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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