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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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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구원을 온전케 하는 감사
2007.10.27
엊그제 저는 감명 깊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듣고 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삶인데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착실한 그리스도인이고 남편은 회사원입니다. 그런데 그 집엔 [이웃사랑 통장]이라고 이름 붙인 저금통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봉급 외에 가욋돈으로 들어오는 것들, 이를 테면 아이들 세배 돈이라든지, 뜻밖에 생긴 것들은 온 식구가 여기에 모아 둔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이웃과 함께 써야 할 일이 생기면 가족들이 의논해서 사용을 한다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아주 평범하지만 아주 잔잔한 감동이 일어나지요? 영혼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지요? 그러나 여러분! 간단한 일 같기는 하지만 [이웃을 위한 통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랑의 에너지가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비껴 서서 [너]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나]중심에서 [너]로 생각과 마음이 옮겨 가지 않으면 하기 힘들어 집니다. 이렇게 [나]에게서 [너]로 옮겨가는 마음이나 시선은 어디서 비롯되나요? 그렇습니다. 감사입니다. 감사는 나에게서 시작되어 내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에게서 시작되어 너에게서 실행되는 [마음]입니다.
저는 [이웃 사랑 통장]을 만들어 놓고 사는 교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금년 추수감사주일, 그러니까 다음 주일에 우리가 추수 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각자 이런 통장 하나씩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생각을 했습니다. 뭐 시작은 천원부터 시작해도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이 점점 나에게서 너에게로 옮겨지고 마침내 하나님이 바라는 세상이 되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감사를 실행하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감사하며 산다]는 것이 왜 이리 중요한지 생각해 봅시다. 교회만 잘 다니면 되었지 뭘 또 하라고 하느냐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감사 할 일이생기면 그때 하면 되지 않느냐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 우리에게 [감사]할 것을 요구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나병환자 열 명이 깨끗함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감사가 어떤 것인지 말해 주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서니, 한센씨병을 앓고 있는 환우 열 명이 예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이 멀리 서서 그래야 하는 이유를 여러분도 짐작하시죠?
뭐라고 소리 질렀나요?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에 예수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소리만 지른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댈 수 있었던 혈루증 앓던 여인은 이들에 비하면 행복한 경우입니다. 그만큼 이분들은 불행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호칭 다음에 선생님 이라는 호칭이 나란히 나오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여기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여기 사용된 ‘선생님 epistata’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선생님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우리가 아무나 보고 ‘선생님’하는 거 하고 각별한 스승에게 ’선생님‘하는 거 하고 다른 거와 같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외침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단어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에게 가서 안수를 하거나 병 고침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 주어라”하셨습니다. 당시의 법은 이런 병을 앓던 사람이 병을 고치게 되면, 다시 사회가 받아 주기 위해서,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나은 것을 확인 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를테면 보건소장일을 목사가 하는 것이죠. 예수는 이 말로 그들이 이미 낫게 될 것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몸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 가서 보이라고 했을 때 당황하지 않았을까요? 가다가 낫게 된다고 예수님이 말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갔다고 합니다. 열 명 모두 그랬다고 합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런 상황에서 믿음이 생겼을까요? 그들의 믿음대로 그들은 가는 동안 깨끗함을 받게 되었다지요? 여기까지는 다른 기적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런데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15절과 16절을 보세요.
열 사람이 모두 믿고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가다가 말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홉 사람은 그대로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사실 열 사람 모두 예수의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 점에서는 열 사람이 모두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에게 어찌 감사한 마음이 없었겠어요. 애초에 아홉 사람은 마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면서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홉 사람의 감사는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하는, 자기중심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몸이 달라졌다는, [나]외에는 보이지도 느끼지도 않는, 우리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그런 감사였습니다. 그들의 감사는 [나]였습니다.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홉 사람과 함께 제사장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몸의 병이 나은 그 순간, 그는 [나]가 아니라 [예수]가 생각났습니다.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가 아니라 나를 이렇게 변화시킨 그가 생각났습니다. 나는 없고 그가 그의 생에에 등장한 것입니다. 한 사람, 그는 자기를 버리고 예수에게로 왔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제사장에게로 달려간 아홉 사람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제사장에게로 가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시킨 대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보이고 난 다음에 선물이라도 사 들고 예수를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보다 더 신중하고 현명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제사장에게로 간 아홉 사람보다 예수에게로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에게로 가라고 했지만, 그는 가는 도중에 예수를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생각났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을 그렇게 깨끗하게 해준 예수에 대한 마음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는 제사장에게 가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찾아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 경계가 보이십니까? 느껴지십니까? 제사장에게로 가는 마음과 그 순간 예수가 먼저 생각나는 그 마음의 경계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 경계에서 진정한 감사를 선택했습니다. [나]가 아닌 [너]를 생각했습니다. 감사란, 이렇게 내가 아니라 너를 기억하고 하는 행위이며 마음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감사입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문둥병을 고친 아홉 사람처럼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게 [나] 중심입니다. 너에게로 건너뛰어야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합니다.
자 이제 다시 [이웃사랑 통장]을 말해 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웃사랑 통장]이지만 우리는 쉽게 실행하지 못합니다. 아니 마음이 이웃에게까지 건너가지 못합니다. 늘 나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한 사람, [이웃 사랑 통장]을 만들어 놓고 사는 그 교우는 [나]를 넘어서 [너]를 생각하며 삽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 아닐까요? 왜냐하면 그는 자기 외에 누구든지 고마운 대상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주변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깊은 감사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이런 작은 차이에서 시작되는 거 아닙니까? 누구나 마음의 경계에서 삽니다. 제사장에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예수에게로 먼저 갈 것인지의 경계 말입니다. [박영주 목사의 돈 이야기/ 장로 체육대회 격려금]사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선물 보따리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나를 건너뛰어서 너에게로 넘어가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게 아주 큰 감사였던 것입니다. 감사란 이런 거 아닙니까?
예수께 돌아오지 않고 제사장에게로 직행을 한 아홉 사람의 마음에는 이런 감사의 마음이 아닌 다른 감사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 진 것을 아는 순간 너무 기쁘고 들뜨고 흥분했을 것입니다. 이제 돌아가 자기를 내다버린 가족들을 만나고,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던 이웃 사람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사회에 복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몸의 병이 나은 순간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점령한 게 있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보이지 않고 그를 고쳐준 [예수]가 보였습니다. 이것입니다.
17-18을 보세요.
이례적으로 예수님은 세 마디의 질문을 쉬지 않고 쏟아놓습니다. 그만큼 긴장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어느 특정인을 향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와서 감사하며 엎드린 사람에게 “이 이방 사람 한 명 밖에 없느냐?”하고 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명 밖에 없는 거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확인하듯이 묻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질문을 설의법이라고 합니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 사마리아 사람 혼자 감사하러 돌아온 현실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강조하기 위한 어법입니다. 감사하러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에 대해서 서운해 하시거나 책망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책망을 하려고 했다면,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 대신에, “나에게 감사를 하러 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고 말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몸이 나았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이 깨끗해 진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선물은 모든 사람이 [나]를 벗어나서 [너]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타인을 인식하고 함께 살아 갈 마음으로 가던 길을 돌아설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간은 진정으로 깨끗해진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인생의 가던 길을 전환한 사람을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돌아와 감사하다고 인사 하지 않아서 섭섭한 게 아닙니다. 인생의 가치와 목표를 바꾸지 않고 일차원적인 문제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전혀 다른 삶의 가치관과 목표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안타까움 때문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셨던 겁니다.
예수는 돌아와서 감사하는 그 사람에게 ,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 하십니다(20).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오늘 날 우리가 생각하는 교리적이거나 이상적인 그 무엇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 말은 아주 또렷하고 분명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너의 인생은 이전 인생과 완전히 다르다”는 선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병을 고쳤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라졌습니다. 그의 인생관, 가치관,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이 주신 이 선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는 말씀은 오직 한 사람, 예수에게 돌아온 사람에게만 주는 선물이 아닙니까?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은 것보다 더 위대하고 근원적인 선물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감사란 이런 겁니다. 그때그때 좋은 일이 생긴 것에 대한 보답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선물로 받은 구원을 거듭거듭 확인하는 장치인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며, 이미 받은 구원을 또렷하게 하고 확실하게 해줍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분들은 아홉 명과 같이 세상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경계에 있을 때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나]를 버리고 [예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스스로의 확인을 위해 [이웃 사랑 통장]을 만들어 놓고 사는 것도 그 한 가지 방법입니다. 금년에는 일생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감사의 장치 하나씩을 지니십시오. 그래서 그와 같은 감사의 삶으로 인해 매일매일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사십시오. 이를 위해 [나]를 멈추고 [예수]께로 돌아오십시오. 예수님이 이런 성도들에게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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