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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9: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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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나의 노래 나의 기도
*2007년 11월 18일 주일 설교 원고 전문입니다.
정리는 하겠지만 줄거리는 바꾸지 않습니다.
햇살이 좋아서 금방 기도와 생각의 터널을 빠져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말씀은 어느 신앙인이 가을에 불렀던 노래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올렸던 가을의 기도입니다.
이 노래는 3등 분 할 수 있는데, 처음은 1-6절이고, 그 다음은 7-10절이고, 그 다음은 11-14절입니다. 먼저 시인은 1-6절에서 말없이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는 자연을 소개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하나님의 손의 솜씨를 나타내며,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시를 지었습니다. 시인은 자연 전체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늘과 창공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단이 되고 낮과 밤은 그분을 드러내 주는 계시의 매체가 됩니다. 즉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알려주는 계시의 운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자연을 둘러보는 나에게도 이런 시와 노래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까? 이건 아무나 깨닫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3절을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로 되어 있습니다. '없다'는 이 세 번에 걸친 부정은 자연의 언어라는 것이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식할 수만 있는 특성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자연의 언어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이며 말이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와 말은 이미 온 땅끝까지 퍼져있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연의 찬양은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끊일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 자연이 발하고 있는 그 풍성한 메시지를 들을 수 없는 걸까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연이 달리 보이고 자연이 발하는 그 언어와 말씀과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인은 믿음으로 자연이 토해내는 엄청난 찬양을 듣습니다. 믿음의 귀를 열고 들어보니 하나님의 창조의 최고 업적인 태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태양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 곧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다'고 노래합니다. 태양신이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집을 지은 게 아니라 그 집을 하나님이 지어주었다는 겁니다. 즉 태양은 독립적인 힘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신격화되던 그 시대에 그 신성이 박탈당하고 인격화되어 태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 그분의 증인으로 격하됩니다.
5절에서 태양이 동쪽에 떠오르는 모습을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에 비유합니다. 일출이 단순히 객관적인 시간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돈의 영역인 어둠과 심판과 죽음을 이겨내고 질서의 세계인 밝음과 구원과 생명으로 향한 승리의 진입을 의미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태양은 낮 동안에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통과하면서 그 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따사롭게 품어준다는 것입니다. 태양은 그 따스한 온기로 하여금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립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시인과 같은 통찰과 안목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가을에 자연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저 높고 푸른 하늘과 물들어가는 산과 들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그 소리와 언어와 말씀이 들리십니까?
그런데 시인은 태양의 온기가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듯이 인간의 삶에 생명을 주고 삶을 증진시키는 또 하나의 선물이 있다고 7-10절에서 노래합니다. 자연에서 이제 점진적으로 사람, 나에게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통해 나를 살피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토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입니다.
시인은 1-6절에서 자연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7-10절에서는 토라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토라를 여섯 가지 단어로 열거하면서 그것이 갖고 있는 특성과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하나하나 소개해 나갑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롭게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율법이 인간에게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자연에게 태양이 있어야 하듯이, 사람에게, 나에게 뭐가 꼭 있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생명이 됩니다.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한 삶의 원칙을 제공하고 인생을 현명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참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게 바로 가을의 노래 가을의 기도입니다.
시인은 토라의 가치를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송이 꿀보다 더 단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정금은 최고의 순도를 자랑하는 금이고 송이 꿀은 꿀 중에서 가장 단 꿀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정금은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보물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치'를 상징했고, 송이 꿀은 모든 인간들이 먹고 싶어 하는 달콤한 음식을 대표하면서 '최고의 즐거움'을 상징했습니다. 즉 시인은 토라를 지상에 있는 모든 가치와 그 어떤 즐거움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말씀이 최고의 가치요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정금 같고 송이 꿀 같습니까? 인생의 최고의 가치와 즐거움을 이 말씀 속에서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말씀이 내 삶에 생기를 주고 지혜를 주고, 기쁨을 주고, 내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하며 내 인생을 맑고 깨끗하게 하고, 의롭게 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말씀으로 인해 내 인생이 풍성한 나날입니까?
이 가을에 꼭 이 두 가지 책을 펼쳐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연이라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성경이라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왜 믿음을 갖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놀라운 선물을 소홀히 여기고 메마르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믿음 없는 사람들보다 더 무감각하게 이 가을을 지낸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여기까지 노래한 시인은 이제 11-14절의 마지막 3절로 넘어가는데 시인은 여기서 또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1, 2절의 찬양의 어조가 갑자기 애가의 어조로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경쾌하고 밝아서 기쁨이 넘쳐나던 장조의 음악이 갑자기 어둡고 애절하고 슬픔이 깃든 단조의 음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시인은 자연과 토라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찬양하다가 갑자기 자기 자신의 부족을 본 것입니다. 좀 더 깊은 나를 보게 된 겁니다. 여러분! 이게 신앙입니다.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자기 자신과 만나는 일이 온전하게 신앙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습을 보며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네 자신을 위해 울라’고 말입니다. 그것입니다.
이 세 번째 부분의 주제어는 바로 '내 허물과 죄'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절절하게 자기의 죄를 토설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보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달고 오묘한 송이 꿀 같고 정금같이 말씀을 대하며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깨닫게 되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 태양 앞에 자신의 삶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완전하고 의로운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더러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어느 가을날 발견한 자신의 진솔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가을에 여러분이 갖는 상념은 무엇입니까? 저 탐스럽게 영근 열매 앞에서, 저 붉게 물든 단풍 앞에서, 저 푸근한 낙엽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매 주일마다 들었던 말씀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얼마나 내가 헛살았는지, 얼마나 내가 생각 없이 살았는지 후회스럽고 안타깝습니까?
이 가을에 우리에게 이런 자극과 도전이 있어져야 합니다. 김도향이라는 가수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를 저는 가끔 흥얼거려봅니다. 거기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난 낙엽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러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흘러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낙엽처럼 살 수 있다면 잘 산 것이지요. 잎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나서 자기 몸에 있는 양분을 나무 몸체에 몽땅 다 내어주고 자기를 비워 말라 죽어가는 것이 낙엽인데 그런 낙엽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시인은 자연과 말씀 앞에서 너무도 부실한 자기 인생을 본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가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보호를 구합니다.
여러분은 이 기도를 아십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의 시입니다. 왜 하필 까마귀입니까? 내가 그 미운 까마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못나고 미운 구석 많은 까마귀가 [나]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의 시인은 이제 14절에서 이렇게 다짐하며 노래를 맺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겠으니 제발 받아 달라고 청원합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 가을을 그냥 보내시렵니까? 가을이라는 계절과 저 푸른 하늘과 태양 그리고 저 산하가 전해주는 저 언어, 저 말씀, 저 소리에 귀 막고 눈 감고 사시겠습니까? 이 가을에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거기에 인생 최고의 보물이 있고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 있다는데 찾고 누려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무들이 여름내 키운 이파리를 아까워하지 않고 대지에 바치듯이,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바칠 테니 제발 받아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까? ‘나를 받아 주세요’ 라고 찬송하고 싶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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