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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전1: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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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자화상(自畵像)을 그리는 시간
* 해의 마지막 주일에 섰습니다.
뭐 마지막 주일이 별건가 싶지만, 사실 시.공의 흐름이 정지된듯 한
이런 정점에는 모든 걸 멈추고 '제 모습 보기'에 집중해야 됩니다.
그래서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입니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는 마지막 구절이 찡하게 가슴을 울립니다. 인생이 이런 거려니 어렴풋이나마 느껴집니다. 그래도 시인은 자기를 이렇게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니 복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 전 존경받는 신앙인중 한 분인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얼굴을 연필로 둥그렇게 그린 다음에 그 밑에다가 ‘바보야’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씀 하시기를, 잘난 척 한 거, 우쭐 댄 거, 대접받으려고 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바보야’하고 놀려 주었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은 바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두서너 줄 썼지만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그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고백과 기도로 자화상을 그립니다. 아마 이것이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각자 그려야 할 자화상일 겁니다.
뭔가 마디 있게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게 시던지 노래 던지 그림이던지, 고백이던지 말입니다. 그럼 그분들이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자화상이란 뭡니까? 자기를 자기가 그리는 거죠. 자기 자신을 감추지 않고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자화상이란 말(프로트라헤레 protrahere)이 그런 뜻이랍니다. 좀 더 자세히는 “끄집어내다. 발견하다. 밝히다”라는군요. 그러니 자화상을 그린다는 말은 속이지 말고 자기를 밝혀 보는 겁니다. 이것저것 덧칠하고 가리고 포장해서 살았지만,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면서 살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솔직하게 스스로를 스스로가 따져 보는 것입니다. 본래의 제 마음을 얼굴이나 시나 노래나 기도로 표현해 보는 겁니다.
그런데요. 사실 우리는 겉치레가 많고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동네에 살아서 그런지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또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질 않아요.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자기를 그리는 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아주 치욕스럽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이름난 화가들이 많았지만 [자화상]이란 게 없어요. 뭐 있다고 해야 초상화 정도예요. 그것도 자기 얼굴을 사실대로 그리기 보다는 분위기를 바꿔요. 점잖게 그린다든지, 근엄하게 그린다든지, 품위 있는 것처럼 꾸며서 그려요. 그러니 한 인간의 참됨을 “끄집어내거나, 발견하거나, 밝히는”일은 어려운 거죠. 그런데 서양의 화가들은 달라요. 그들은 대부분 자화상이란 걸 그려요. ‘내가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그게 궁금한 거예요. 우선 자기부터 알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반 고흐도 27~37세까지, 10년 동안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화상을 40 점이나 그렸어요. 많이도 그렸지요? 제 얼굴을 뭐하려고 이렇게 그릴까요?
지금은 남 이야기 하는 시간이 아니에요. 나를 말해야 하는 시간이에요. 내 본래의 얼굴을 보려는 신실한 시간이에요. 이렇게 자신을 똑바로 봐야 내일이 내 몫의 날이 될 수 있어요. 이 정도는 해야 새로 뜨는 해를 맞을 자격이 되는 것이고, 새 각오와 삶을 축복하시라고 하나님께 빌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이것도 하지 않고 새해를 맞을 수는, 숨을 거둘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먼저 제 얼굴을 그려 보았어요. 다 그려놓고 한 참을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태수, 너의 진짜 이름이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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