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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客(율법학자와 예수의)

요나 허태수 목사............... 조회 수 3380 추천 수 0 2011.11.29 15: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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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4:1-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食客(율법학자와 예수의)
욘4:1-4 막 2:13-17


구정 연휴동안 어떤 제목으로 묵상에 들어야 하는지 기도하고 있는데, 홍혁수 목사가 한국영화 [食客]을 보라고 하면서 화요일 아침에 CD를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 주간에는 주로 먹는 것으로 말씀을 하시려는가 보다. 구정 명절이니 이 또한 음식과 뗄 수 없는 때가 아닌가?’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성서적인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가복음서 기자는 다윗의 도성 예루살렘이 무너지자 실의에 차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서 그가 이해한 예수의 삶을 기록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이란 앞으로 반복해서 이룩될 하나님나라 운동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의 제목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시작”이라고 붙입니다.(막 1:1) 그는 이야기를 하나님나라가 문전에 도달했으니 가던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라고 외치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막 1:15) 그리고 그를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가담하려는 자들에게 “너희들이 이때까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합니다.(막 1:18)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 권위가 있어서 온갖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고 악마들의 세력이 뒤로 몰리게 됨을 종언합니다.(막:1:27) 그리고 이런 기적의 생성에는 새것을 바라는 억눌린 무리들의 간절함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런 간절함을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합니다.(막 2:5)

이렇게 되자 악마들의 세력은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 나름의 공격을 시도해 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가에서 가르치시다가 길가에 앉아서 세금을 받는 세리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릅니다. 이 세리는 틀림없이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통관세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 세리의 사회적인 위치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의 세금 착취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일년에 600 탈란트의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한 탈란트란 6000 데나리온인데 한 데나리온이란 한 사람의 하루 임금에 해당합니다. 그러고 보면 3 백 60만 명의 노동에 해당되는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죠. 이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로마는 이를 도매금으로 그들이 믿을만한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그는 이것을 여러 단계의 하청업자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이 하청업자들은 자기의 이득을 부과해서 세금을 받기에 이것이 세금을 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큰 부담이 됩니다. 예수님이 부른 이 레위는 이런 제도의 말단 세리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되니 유대인들이 세리를 미워하는 것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첫째로 이방인을 위해서 세금을 받으니 죄인 취급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가진 수단으로 세금을 짜내니 그 미워함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들은 세리를 강도, 살인자라고 까지 불렀답니다. 저들은 완전히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자이지요. 그러니 그런 직업을 누가 하고 싶어서 하겠습니까? 아무리 찾아 봐도 목구멍에 풀칠을 할 일 자리가 없어서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레위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집이 누구의 집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어중이 떠중이와 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식탁에 앉았다는 말의 원어 "카타케스타이"는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니라 식탁을 중심으로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풍속에 의하면 본격적인 찬연은 이렇게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누어서 먹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저들과 같이 가진 이 식탁이란 본격적인 연찬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나라의 잔치를 연상시키는 찬연입니다. 그런 잔치에 죄인으로 소외당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죄인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범법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유대인들 중에 너무 가난해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할 때 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사람들을 모두 이런 죄인이라는 개념에 포함이 됩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들과 신나게 식사를 같이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와서 항의합니다. “너희들의 선생은 어찌 저런 죄인들과 같이 신나게 잔치를 하느냐?”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자들에게는 필요하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 왔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물론 바리새파 사람들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말도 의인이라는 말도 아니죠. 그들이 죄인시하는 무리들이야말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뻐기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는 자들이 오히려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더 있다는 것이죠.

이 이야기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면서 예수를 비판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대한 무서운 심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들과 같지 않다고 비판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서 못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문학 작품이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요나라는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지시가 내립니다. 느네외라는 이방인들의 도시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말입니다. 요나는 이방인을 눈의 가시처럼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는 느네외와는 반대방향이 되는 다시스로 도망을 치다가 풍랑을 만나서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잘못을 회개한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토함을 받아 느네외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랬더니 느네외 사람들은 임금부터 노예까지 모두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합니다. 이것을 본 요나는 화가 상투 끝까지 났습니다. 그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화풀이를 합니다. 이방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나님에게 떼를 쓰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닙니까?

이 이야기는 주전 500년경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주전 586년에 유대나라가 망하고 그 중 귀족층은 바벨론으로 잡혀갑니다. 이렇게 되자 저들은 이것을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율법을 세분화해서 자기들의 삶의 모든 국면에 적응하게 하고 이것을 지킴으로 다시 다윗 왕국을 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엄금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자기들만이 성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주전 500년 경 저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수축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근방에 방치되었던 밑바닥 유대인들이 문제가 됩니다. 그동안 이방인들과 서로 결혼을 하면서 섞여서 살았기 때문에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마음으로는 여호와를 늘 경외하고 있었기에 예배 드리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매정하게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정 예배를 드리고 싶거든 이방 여인들을 내어쫓고 오라는 것입니다. 정말 매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 없이 많은 가정들이 일대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본 이 요나서 작가는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냐 하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편견에 사로 잡힌 유대인들을 매정하기 그지없는 요나의 행동을 통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의 마음이 요나의 그것과 꼭 같았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라고 본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저들을 향해서 “하늘에 오를 줄 아느냐? 음부에 떨어지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잔치에 참여할 자들은 오히려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사실 마가복음서가 기록이 되었을  주후 70년경에는 저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이방인들이 훨씬 더 하나님나라 잔치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이란 흔히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만이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부르면서도 그렇게 많은 교파가 생겼습니다.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같은 종교를 믿으면서도 문화가 다르면 경원합니다. 그들의 언어표현, 의식, 행태를 다 틀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쉽게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좀체로 따뜻하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이런 편견이 있습니다. 남자는 여성들을 눈물이 많고 생각이 얕은 자라고 평가 절하를 합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을 힘만을 믿고 허풍을 떠는 자라고 속으로 웃습니다. 그래서 성 사이에 알지 못하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만을 옳다고 하는 자를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자라고 합니다.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하시면서 껴안아 주셨습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삶의 자세에서 해방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런 그릇된 자세에서 해방이 되려면 그런 삶에 열리는 열매를 주시해야 합니다. 그 열매가 생명을 죽이는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살리는 역할을 하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삶이란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의사로 비유한 것 역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살리려 오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자세가 우리 공동체를 어떻게 만드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을 어떻게 만들고 내 이웃에게 어떤 해를 끼치느냐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율법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유대인들의 삶의 열매를 보십시오. 저들은 간 곳마다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예수 운동이 지중해 연변에 확장이 될 때 이 유대교 주의자들이 뒤를 따라다니면서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율법을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바울 편지를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도 유대교도들은 간 곳마다 사회에 기름처럼 떠돌아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그런 분열이 그들에게 준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사회는 저들을 백안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회를 분열시키는 자라고 하면서 각가지 박해를 했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렇게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무리들이란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할 무리로 보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점점 심화될 때 우리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랄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의 기가 통하지 않을 때엔 상대방이 악마적인 존재로 보이게 되는 법입니다. 폭군 네로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그 좋은 예입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 서로를 악마시 한 것도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사람들 사이의 투쟁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적인 확신을 가진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싸움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이런 불미스러운 느낌이 감돈다면 우리는 경계하여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령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싸움이란 다 “내가 옳다”라는 자기 절대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가정 싸움도 그렇고 사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도 그렇게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도 그렇습니다. 물론 종교간의 싸움, 같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내가 옳다고 확신할 때 서로 사랑과 이해의 기가 통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상대방은 날로 더 악하게 보입니다. 서로를 악마시 합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파괴되고 너와 나는 날로 더 악마적이 되어 갑니다. 이런 관계에서 열리는 열매란 죽음입니다. 너도나도 그리고 공동체도 죽어갑니다. 이런 죽음의 그림자가 보이면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남을 지탄하기 전에 먼저 나부터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내 행동을 절대화하지 않았는가? 내가 얼마나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 서로 사랑과 이해의 기를 통하게 하려고 애써보았는가? 화해를 해야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되새겨 봤는가? 얼마나 마음을 비우고 겸허하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 정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서로 껴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정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니 얼마나 좋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맛나게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흥미진진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차별 없는 천국의 식탁을 장만하시고 거기 우리를 불러 앉히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그 하나님의 밥상에 둘러앉은 식객들입니다. 천국 밥상의 식객 말입니다. 그런 자세로 서로서로 위무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구정은 일 년에 한 번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이 모여 나누는 식탁은 매 주일, 매일 하는 것입니다. 이걸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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