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봄이 어디 있습니까?

갈라디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972 추천 수 0 2011.11.29 15:08:37
.........
성경본문 : 갈2:2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봄이 어디 있습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뜻)
갈 2:20  
              *엠마오 영성훈련 21기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짬짬이 연수원 컨퍼런스 밖에서 쬐던 햇살에 담뿍
                봄 기운이 담겨 있었습니다.
                담장 밑에 앉아 햇볕을 쬐는데,
                노랗게 마른 잔디의 주검들 틈새로 파란 싹이 돋고 있었죠.
                그 때 화살처럼 말씀이 날아와 박혔습니다.

                "봄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느냐?
                 바람 속에, 햇살 속에, 민들레 꽃 속에, 파란 새싹 속에서
                 봄을 보고 있지 않느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즉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좀 더 질문을 좁혀서 [나]는 어떤 게 난가요? 여러분의 마음인가요, 몸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감정인가요? 주위의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인가요? 업무인가, 직업인가, 가족인가요? 혹은 과거의 체험인가요? 그러나 여러분, 내가 [나]라고 말하는 정신, 육체, 감정, 주위의 여러 가지 일들은 ‘나’가 사용하고 체험하는 것이지 ‘나’ 자신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몸을 가지고 있다. 나는 몸을 쓴다’ 하는 말을 하기 때문이죠. 수술할 때 마취를 하면 몸은 그대로 살아 있지만 나는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때 나는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감정이 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즉 사랑, 미움, 두려움, 믿음 같은 것이 자기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감정의 명령 아래에 있으며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이런 말이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는 솔직한 것인 양 취급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의 노예임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고요.

어떤 사람은 인간은 지적인 존재라고 믿고, 정신 또는 이성이 가장 고귀한 것이고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신이 육체라는 도구를 움직이고 지배한다고 생각하고 지적인 자아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것의 고대적 형태는 지식이 자기를 구원한다고 믿은 영지주의이고, 오늘날의 형태는 지적인 것만 최우선시하는 주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할아버지 재력/아버지 능력/어머니 정보력)이런 사람들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뛰어난 어떤 존재라는 사실은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지능이 차이가 있고 인간의 지식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자꾸 바뀌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나’가 체험하는 것이지 ‘나’ 자신이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많은 사람이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대개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라거나 종교적인 존재라는 좁은 의미예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영적이라는 의미를 비물질적이라는 의미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리스철학에서 의미하는 영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천한 물질과 분리되는 고상한 천상의 본질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인간은 아주 세상에 대해서 비관적이 되고 영적인 비전은 피안적이고 타계적인 것이 됩니다. 이런 사고는 잘못되면 열광주의나 광신주의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서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나요? 예, 영적인 존재라는 거죠.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존재나 종교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의 감옥의 비참한 삶 속에서도 그를 붙들어 주고 힘을 불어 넣어준 시구를 소개합니다.
“그대가 체험한 바는 이 세상의 어떠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대로부터 그 경험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아우슈비츠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많은 고통을 체험하는 자기 자신만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의 경험 속에서 의미를 찾았고, 그것은 그가 생존 확률이 거의 희박한 그 상황에서 살아남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은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비참한 인간일 뿐이라고 자포자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또 다른 의미를 추구하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파하고 소리를 지르고 절망하는 자신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자아는 그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을 초월하여 의미를 추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비전을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위대한 자아를 찾은 대표적 인물은 바울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비참한 존재요 죄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죄 속에서도 그 죄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러한 초월은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초월과 다릅니다. 프랭클이 자기 스스로 한계 상황을 초월하는 영웅적인 모습이라면 바울은 혼자서는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절망적 상황 속에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19-21)

도덕주의도 영웅주의도 여지없이 깨지고 맙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다음에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롬 7:25).

금방 모든 게 끝난 것 같이 절망적이었는데, 한순간에 그것이 뒤집히고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180도로 방향전환이 되었습니다. 탄식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바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셨다”는 말을 할 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바로 앞에서 바울은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롬 6:3-9).

이것은 세례의 의미, 즉 그리스도인으로 입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부활하심과도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가 같이 죽음으로써 옛 자아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아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자기가 죽는 것으로 의식합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자기 몸과 의식을 초월하는 자아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자기 초월입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의미의 초월입니다. 이것은 영웅적 초월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옛 자아로부터,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의 초월입니다. 바로 이런 신학을 가장 분명하게 결정적으로 집약한 것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바울이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어도 그의 외모나 생각이나 성품은 전과 다름이 없었죠. 하지만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한 그는 이제 어느 가문의 유대교 신자 바울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려고 하는 삶을 대신해서 사는, 그리스도가 삶의 목표가 되고 의미가 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노력해서는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죄 된 자기 자신이라도 예수와 함께 죽고 이제 자신이 아니라 예수가 그 안에서 살기 때문에 이제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똑같은 세례를 받았고 바울의 고백은 곧 우리 자신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그리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가?

사실 이것은 엄청난 은혜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신체나 감정 이성 같은 어떤 체험할 수 있는 것을 자기 자신으로 착각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아를 의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초월은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심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비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떠난 어떤 몽환적인 상태에서 그렇게 느낀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현실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살고 우리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인간은 육체만도, 감정이나 정신만도 영적인 존재만도 아닌, 그것을 훨씬 더 뛰어넘는 신적인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뱀의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 신과 같이 위대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의식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혔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예수를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고 하셨다”(요 10:34-35).

물론 유대인에게 대응하는 맥락에서 강조법을 쓰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을 그 누구도 해칠 수 없고 침범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로 확립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시편 82편에 나오는데, 여기서 ‘너희’가 인간 통치자들을 의미하는지 천사들을 의미하는지 논란이 분분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고 한 것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산다고 할 때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바로 이런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영혼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의 신 이해는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신들”이라고 불러주신 우리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비하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자꾸만 열등하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무슨 거창한 이름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고 하셨는데 히브리어로는 “나는 나다”라는 의미입니다(출 3:14). 이것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지 않은 채 단지 하나님의 주체성만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름 대신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그 안에서 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을 통하여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막 12:26-27).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 “허태수의 하나님”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아무개의 하나님” 이렇게 불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이름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봄에 아지랑이를 보고, 원추리 파란 새싹을 보고, 개나리를 보고, 양지쪽에서 어미닭과 함께 땅을 파는 병아리를 볼 때 ‘야! 봄이다’하지 않습니까? [봄]이 그 어떤 식물의 생장 속에, 동물의 움직임 속에 또는 처녀의 옷차림 속에 들어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뜻을 이해 할 수 있겠죠?    

여러분들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할 때에 여러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자신에게 말해주면서 자신감을 갖고 하고 그 일을 더 소중하게 하다보면 진정으로 자기가 생각한 이상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겉 사람, 여러분의 옛 자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 여러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은혜롭고도 위대한 생애를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6072 요한복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요11:1-4  하용조 목사  2011-12-03 2328
6071 창세기 땅은 하늘로 가득하다(Earth Is Crammed with Heaven) 창28:10-22  김영봉 목사  2011-11-30 2367
6070 요한계시 지옥은 비어있는가?(Is Hell Empty?) file 계14:9-11  김영봉 목사  2011-11-30 2005
6069 요한복음 하나님은 가족이다(God Is Family) file 요17:20-26  김영봉 목사  2011-11-30 2609
6068 골로새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가? 골1:15-20  허태수 목사  2011-11-29 1730
6067 마태복음 평화shalom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 마5:9  허태수 목사  2011-11-29 2139
6066 마가복음 이런 죄는 짓지 마세요 [1] 막3:20-30  허태수 목사  2011-11-29 2105
6065 고린도전 그날을 기다리며 고전13:8-13  허태수 목사  2011-11-29 1876
6064 누가복음 물구나무를 서면 눅18:1-8  허태수 목사  2011-11-29 1765
6063 로마서 선취先取하는 믿음 롬4:13-25  허태수 목사  2011-11-29 1935
6062 로마서 세 번째 물음과 11계명 롬8:19-22  허태수 목사  2011-11-29 1554
6061 마태복음 믿음에 대한 환상을 벗고 마14:22-33  허태수 목사  2011-11-29 1772
6060 마태복음 나비 같은 삶을! 마25:31-46  허태수 목사  2011-11-29 5733
6059 요한복음 성령의 날숨 삶의 들숨 요20:19-23  허태수 목사  2011-11-29 4430
6058 마태복음 밝고 유능한 사람이 받는 복 마1:1-6  허태수 목사  2011-11-29 3207
6057 히브리서 우리가 아니면 히11:39-40  허태수 목사  2011-11-29 2882
6056 고린도전 부활, 그 이후(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고전15:20-26  허태수 목사  2011-11-29 3540
6055 고린도전 죽은 사람의 부활 고전15:12-58  허태수 목사  2011-11-29 2899
6054 고린도후 고난이 넘치는 복을 받으시라! 고후1:3-7  허태수 목사  2011-11-29 4765
» 갈라디아 봄이 어디 있습니까? 갈2:20  허태수 목사  2011-11-29 2972
6052 로마서 만물이 봄 볕 속에 들듯 롬5:1-11  허태수 목사  2011-11-29 4156
6051 요나 食客(율법학자와 예수의) 욘4:1-4  허태수 목사  2011-11-29 3380
6050 이사야 염치없어도 주님을 부르라! 사7:1-9  허태수 목사  2011-11-29 3035
6049 빌립보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빌3:12-21  허태수 목사  2011-11-29 2773
6048 디모데전 자화상(自畵像)을 그리는 시간 딤전1:12-14  허태수 목사  2011-11-29 7269
6047 창세기 복을 짓는 사람 창35:18  허태수 목사  2011-11-29 3332
6046 누가복음 영혼의 집짓기 눅11:23-28  허태수 목사  2011-11-29 3075
6045 요한복음 아기 예수를 맞는 마음 요2:1-11  허태수 목사  2011-11-29 1885
6044 누가복음 천국으로 건너가는 다리 눅16:19-25  허태수 목사  2011-11-29 1977
6043 고린도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고후8:1-9  허태수 목사  2011-11-29 1835
6042 요한복음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라! 요3:1-8  허태수 목사  2011-11-29 2558
6041 시편 나의 노래 나의 기도 시19:1-14  허태수 목사  2011-11-29 1848
6040 누가복음 구원을 온전케 하는 감사 눅17:11-19  허태수 목사  2011-11-29 2209
6039 요한일서 옛날 하나님 요즘 하나님 요일4:7-12  허태수 목사  2011-11-29 2254
6038 야고보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약2:1-13  허태수 목사  2011-11-29 2611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