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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부활

고린도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899 추천 수 0 2011.11.29 15: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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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5:12-5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죽은 사람의 부활
고전15:12-58

이천여 년 전,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나 요즘 사람들이나 다를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 가운데는 교우이면서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2절). 그들은 이른바 열광주의자라고 하는 열성 교우들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부활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바울이 그들을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과학적인 태도를 취해서가 아니라, 역사의식이 없어서입니다. 그들은, 다가올 종말에 죽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살아나는 것에 대한 꿈을 갖는 대신, 개개인이 내면적으로 심령적으로 구원을 받아서, 지금 여기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열광주의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로, 좀 후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그들의 구호로 삼았지요(딤후 2:18).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은, 역사 끝에 올 부활, 곧 종말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역사의식과 종말 의식 가운데서 부활을 말하였지만,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역사가 없는, 심령적, 무역사적 부활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바울은 그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파격적인 말을 합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13, 16절).

바울이 이 말을 얼마나 힘주어서 하는지는 똑같은 내용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는 데서 알 수 있어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핍박을 받고 죽은 사람, 지금 고난 당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그는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똑같은 지평에서 봅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기에 그리스도도 부활할 수 있었고, 반대로 그리스도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종말론이 갖는 파격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신원되고, 보상받고, 권리를 회복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죽은 사람 가운데 살아난 첫 번째 사람(첫 열매)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며, 그 다음에 하나님이 통치하는 마지막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종말론을 철저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근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근거하여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확증하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므로, 그 고난도 죽음도 헛되지 않음을 확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종말 의식은 현실을 보는 투철한 역사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을 문제 삼는 다른 이유는 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정할 뿐 아니라, ‘몸의 부활’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몸의 부활을 부정한 것은, 몸은 썩어질 천한 것이지만, 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리스의 영혼불멸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썩어질 육체를 벗어나서 영혼만이 ‘빛’과 합일한다는 것이 2세기 영지주의의 가르침입니다.

어느 해, 타임지와 CNN이 공동으로 조사기관에 의뢰해 미국의 성인 1천 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천국에서 영혼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66%인 반면, 육체와 영혼이 공존할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고작 26%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 성인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에서 이런 조사를 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바울이 그토록 반대한 그리스의 이원론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인 양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몸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씨앗의 비유를 듭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하며, 우리는 씨앗을 뿌릴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36-38절). 이 비유로써 바울은 중요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곧 심기는 씨와 나는 열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씨를 심으면 좋은 싹이 나지만 병든 씨를 심으면 제대로 된 것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은 살아 있는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 어떠한 연속성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몸은 죽어서 썩고 살아나는 것은 영일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비유로써 부활의 삶은 오늘 여기에서의 삶이 심겨서 나는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는 죽음이 단절시킬 수 없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이 몸을, 썩어서 없어질 천한 것이나 함부로 다루어도 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소중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몸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면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까지 하였겠어요?(6:19).

바울은 부활의 몸을 씨앗에서 피어난 것에 비유합니다. 그것은,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고,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나고,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나고, 자연의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42-44절). 현세의 몸이 까맣고 작은 씨앗이라면, 부활의 몸은 화려하고 향기 나는 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몸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의 변화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혹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 자연의 몸과 신령한 몸 사이의 대조가 그리스의 이원론의 구조와 같은 것으로 비칠까봐, 즉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에 속한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46절).

아무리 부활의 몸이 신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수도 있는, 이 세상의 몸이 없이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그것은 작고 볼품없는 씨에서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에게서 종말의 소망은, 현실의 삶을 무의미하게 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을 의미 있게 해 주고, 지향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32절). 이 말은, 본래 이사야서 22:13에 나오는 것인데, 열광주의자들이 이것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구호처럼 사용한 것이죠. 부활은 이미 지나갔고, 다가올 종말도 심판도 없으니, 남은 것은 현세의 삶을 즐기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바울은 열광주의자들의 이런 허무함을 알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속지 말라”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합니다(34절).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그리하여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정면으로 대면합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있는 죽음을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라고 합니다(26절). 여기서 마지막은 종말의 때이죠. 종말이 오기 전에는, 살아 있는 자는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회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원수’라고 명시함으로써 그것과의 투쟁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죽거나, 고난을 받아서 죽는 것은, 죽음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무기를 ‘죽음의 독침’이라는 섬뜩한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죽음만도 무서운데 그것의 독침이라니, 과연 그렇게 무서운 무기는 무엇인가요? 바울은 그것은 바로 죄라고 합니다(56절).

사람을 진정으로 망하게 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잘못 살았다는 의식입니다. 짐승은 죽음을 두려워할지언정, 존재 전체가 파멸되는 그런 죽음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만이 완전한 파멸을 경험하는 죽음, 곧 영원한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죠.

앞에서 언급한 타임지와 CNN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3%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절반 이상이,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누구도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원수인 죽음에 대하여 승리를 선언합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54-55절)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리라는 것과, 그때 지금까지 고난 받고 죽임 당한 사람들이 살아나서 함께 통치하리라는 종말의 소망은, 현실의 하루하루의 삶을 긍정하게 합니다. 비록 그것이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고난의 삶이라 할지라도(30절), 그런 삶에는 죽음이 그림자도 드리우지 못합니다. 그런 삶에는 허무주의나 죄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 살고 있다는 죄책감과 심판의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이룩하고 완성해가는 역사에 참여하는 기쁨 가운데 삽니다. 그들에게서는 죄가 그 권세를 떨치지 못하므로, 독침을 잃은 죽음은 이미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이런 종말의 소망 가운데서 살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말하죠.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58절).

성도 여러분!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와 ‘지금’의 삶을 빛나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무엇을 하며 살던지, 어떤 모습으로 살던지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최고의 은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씨앗으로 다음 생애가 준비되어 있다는 믿음을 이번 부활절에 지니게 되길 기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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