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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5:3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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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나비 같은 삶을!
마 25:31-46
*이 원고는 5월 21일 덕산 스파케슬에서 있을 '전국 감리교 웨슬리 컨퍼런스'둘 째날 아침에 할 설교 원고의 전문입니다. 5월1일이 원고 마감입니다. 아울러 이번 주 성암 예배당 2부 설교 이기도 합니다. 본래 이 설교는 수 년 전 지방 여선교 계삭회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했었습니다. 유치환의 [나비]시만 응용했던 기억이 나는데, 얼마전에 다른 교회의 어느 여자 교우가 그 때 그 설교를 기억하고 내게 인사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과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조명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흥부처럼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말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복을 받기 위한 모델이나 공식은 아닙니다. 놀부가 흥부처럼 잘되기 위해서 이른바 착한 일을 했다면 그것은 이미 변질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흥부는 그저 측은한 마음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제비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 일의 결과로 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놀부는 흥부가 받은 복을 목적으로 하여 억지로 흥부가 한 일을 따라서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특히 어른들이 자녀에게 ‘흥부처럼 복을 받으려면 착한 일을 하라’고 한다고 합시다. 그 말은 놀부처럼 살아라하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이것은 마음 착한 흥부의 얘기를 해놓고 끝에 가서 놀부가 되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흥부 놀부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으로 삼은 최후의 심판 이야기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최후의 심판 때에 인자는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갈라서 한 쪽에는 상을 주고 한 쪽에는 벌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 앞에 선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의외라는 표정입니다. 칭찬을 듣게 된 사람들도 놀랍니다. 벌을 받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언제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느냐면서 펄쩍 뜁니다. 그 때 인자는 그들에게,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딱히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한 어떤 행위를 말하려고 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는 놀부의 악행이 묘사가 되지만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는 어떤 악행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왕이 심판하는 말을 듣고 나서,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하고 펄쩍 뛰는 장면만이 나올 뿐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자기들 나름대로는 주님을 섬기느라고 했다는 말이겠죠. 그들은 성전에 가서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헌신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전 안에서 칭송받는 높은 지위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이게 아닙니다. 자신들의 이와 같은 신앙행위에 대해서 이미 어떤 보상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대가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염두에 두고 행동했다는 점에서 놀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은 하지 않았겠죠. 그 일이 주위의 작은 사람들, 작고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의 죄였습니다(42-43절). 반대로 의인들은,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찾아갔습니까?”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라 보상 따위는 애시 당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겠죠. 그것이 어떤 선행이거나 상을 받을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마치 흥부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복이었습니다.
앞선 <흥부 놀부>의 이야기와 본문으로 삼은 마태복음의 교훈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세 유형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거미형, 개미형 그리고 나비형이 그것인데요, 거미는 공들여 그물을 치고는 가만히 앉아 그물에 걸려드는 것을 기다리며 걸린 것을 먹고 삽니다. 그것이 그의 ‘영역’입니다. 늙은 세대는 젊은 날에 얻은 지식, 경험, 지위 또는 명성들을 거미줄처럼 쳐놓고 가만히 앉아 그것에 걸리는 것을 먹고 삽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 그물을 이리 치고 저리 옮기는 정도일 뿐, 이미 생산적이거나 창조적 노력은 정지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개미는 그저 부지런히 먹을 것을 수집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현실참여 계층과 같습니다. 기존 가치관, 기존 질서의 요청에 끌려서 분주하며 그 안에 자기 자리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딸린 가족, 사업체 등을 유지하기 위해 급급할 뿐입니다. 그의 목표는 거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비는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습니다. 그는 꽃에서 꽃으로 전전하며, 쉬지 않습니다. 화분(花粉)으로 살면서도 그것에 연연하여 거기에 보금자리를 꾸미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내 머물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저 하늘에라도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마태복음 본문에 나오는 ‘오른편의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비와 같은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자신의행위에 보상을 기대하는 욕망으로부터 가볍고, 꽃에서 꽃으로 생명을 이어주는 일을 하면서도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하면서 ‘하늘’에 삶의 처소를 두니까요. 하지만 오늘날 과연 나비의 삶을 살고 있는 크리스천이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거의 다 거미나 개미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생 끝에 어렵게 한 자리에 오르게 된, 이른바 성취를 한 사람들을 보면, 그의 성취 이전과 이후의 삶이 너무나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중팔구는 그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겸손하고 노력하고 친절했으나, 그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거만하고 노력하지 않고 쉬지 않고 누군가를 비방하면서 분노에 차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전도사나 개척교회 목사보다는 큰 교회 목사가 그렇고, 사원보다는 사장이 그렇고, 강사보다는 교수가 그렇고, 후보자보다는 당선자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나비의 시절을 잊고 거미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유명하다고 하고 성공했다고 하는 교회들은 거의 다 거미형이거나 개미형이기 십상입니다. 그들은 덩치가 너무 커져서 도저히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면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나비의 역할은 시민단체들에게 다 넘기고 있습니다. 세상이 다 썩어도 그래도 성직자들만은 바르고 청렴하다고 믿고 사는 것인데, 오늘날 유명하다는 교회 목사들 가운데는 이런 기대를 저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이 돈을 좋아하고 화려한 삶을 살 뿐 아니라, 무슨 부정에 관계되어 세상 법정에 서서 판사로부터 창피한 충고나 듣고 있습니다. 이러니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헌금하느니 차라리 사회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엇을 이루려는 것을 신앙의 목표나 결과’로 삼을 때, 심판자 앞에서 ‘악한 삶’을 살았다는 판결을 받고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지팡이 하나와 신은 신발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라고 하셨습니다(막 6:8-13). 그들의 모습 어디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여기는 내 영역이니 침범하지 마라’고 호령하는 거미나 개미의 삶을 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자유롭게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며,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나비의 삶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불안을 없애려고 또는 자신의 업적에 기대어 살기위해 많은 것으로 자신을 휘감아 버립니다. 겹겹이 감겨진 또는 포개진 그 속에서 우리는 때로 안심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겹겹으로 쌓인 자신의 공과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하시려는 말씀은 ‘마지막 날에 상을 받게 될 존재성’입니다. 그것은 막6:8-13의 말씀으로 거듭 조명됩니다.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와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신도 한 켤레면 족하지. 옷이 두 벌이면 입을 때마다 얼마나 곤란할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신뢰하게 하는 시 한 편을 5월의 가슴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또한
이 가비야운 가비야운
생명의 파편이여-
아니 무결한 그 전일이여,
한 점 바람 없음에도 팔랑팔랑 울타리를 넘어
화초밭을 지나 다시
지붕위를 스쳐
마치 이 눈부신 광명을 깁는 듯
하늘하늘 지나가노니,
그지없이 무심하므로 바람에 나부끼는
한 조각 종이쪽과 너의 다름을
나는 무엇으로 추리할 수 있으랴.
그의 거룩한 손길이 닿는 것마다
즐거운 생명을 하나씩 하나씩 눈 뜨임 입는,
그 신이 무료 하므로
하릴없이 든 화필로써 무상(無上)히 아름다운
아름다운 채색의 무늬를
찍어 밀치신 그대로를 누리어 살므로,
내일을 의혹치 않는 지극히 어진자여,
너의 생명의 반짝임을
내 오늘 마음 조이며 지켜보노니 보노니.
이 시는 유치환의 ‘나비’전문(全文)입니다. 시인은 꼭 필요한 긴절만을 갖추고서 기뻐하며 생을 누리고 있는 나비 한 마리에게서 문명의 첨단을 살고 있다는 현대인보다 더 곡진한 삶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손길이 닿는 것마다/즐거운 생명을 하나씩 하나씩 눈 뜨임 입는’ 위대한 나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나비는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 신이 무료 하므로/하릴없이 든 화필로써 무상(無上)히 아름다운/아름다운 채색의 무늬를/찍어 밀치신 그대로를 누리어’ 삽니다. 그러면서도 나비는 생명의 반짝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의 감각이 우리에게 쉽게 와 닿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직도 우리는 ‘긴절’만을 갖고는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요? 계속해서 뭔가를 보상 받아야 하는 욕망의 기대가 우리를 발목잡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니 ‘보상’이라는 가치를 지닌 행위만 하려는 게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때에 ‘왼편 사람들’의 당혹과 낭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잃을 만큼 잃어서 더 잃을 게 없다는 신념이 무의식의 차원까지 축축하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행위를 통한 보상을 목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통한 자유를, 하늘이 내려주는 평안을 누릴 있지 않을까요? 그게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웨슬리의 영성적 삶과 목회가 아닐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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