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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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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평화shalom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
마5:9
*6월 한 달은 스위스로 프랑스로 태국으로 머물렀던 기간이 학곡리에 있었던 날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가슴에 소용돌이처럼 맴돌았던 것이 [평화]입니다. 스위스에서도 그랬고 태국에서도 그랬습니다. 그 만큼 우리 나라는 바쁘고 소란하고 갈등의 용광로입니다. 어떻게 하면 [평화]스러울까, 누가 뭘 어찌하면 [평화]가 될까, 언제쯤 저토록 평화스러운 나라가 될까 뭐 그런 거 말입니다. 그러다가 [샬롬]의 말씀이 가슴에 닿았습니다. 저들도 그토록 [평화]가 간절했던 모양입니다. 메마른 사막의 나라에 [아라비안 나이트]이야기가 필요 하듯이 말입니다. 평화의 사람으로 사는 거, 그게 각자 우리가 할 일이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겁니다. 주일에 말씀과 더불어 뵙겠습니다.
산상설교의 팔복선언 가운데 첫째와 마지막 여덟째는 바야흐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주민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둘째에서 여섯째까지는 현재의 비참한 처지가 역전되거나(슬픔 → 위로; 주리고 목마름 → 배부름), 마땅한 보상을 받음으로써(온유함 → 땅을 차지함; 자비함 → 자비를 받음; 마음이 깨끗함 → 하나님을 봄)하나님의 백성이 개인적으로 누릴 복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지요. 일곱째 복 선언은 하나님 나라 주민이 될 사람의 의무/사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복 선언에 제시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이 낱말은 ‘에이레네’(=평화)와 ‘포이오이’(=만드는 사람들)의 합성어입니다.
신약성서의 에이레네eirene는 구약성서의 히브리어 ‘샬롬’(shalom)을 번역한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샬롬’은 일상생활에서 서로 만나거나 헤어질 때에 안부를 묻거나 안녕을 기원하는 인사말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신약성서에서도 eirene라는 낱말이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합니다(막 5:34; 눅 2:29; 7:50; 8:48; 행 16:36; 고전 16:11; 약 2:16). 이 밖에 eirene가 세속적인 일상적 용어로 사용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전’(눅 11:21; 살전 5:3), ‘화친’(눅 14:32), ‘평안/안정’(행 9:31), ‘화해’(행 7:26), ‘화평’(히 12:14; 벧전 3:11; 계 6:4), ‘태평’(행 24;2), ‘화목/화친’(행 12:20) 등등이죠.
그러나 신약성서의 eirene를 번역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일상용어로서의 의미보다는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종말적 구원의 내용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군 천사의 입을 빌어서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탄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 예수의 탄생을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사건으로 선포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서기 1세기는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구가하던 시기입니다. 예수의 탄생을 평화의 사건으로 선포하는 것은 ‘로마의 평화’라는 것이 거짓 평화임을 폭로하는 셈이 되는 거죠. 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뒤따르던 제자의 무리가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눅 19:38)이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눅 2:14와 한 짝을 이루는 것인데 바야흐로 예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으로 등극하심으로써 종말적 구원의 내용인 그 평화가 실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에는 평화”라는 말은 하나님이 하늘에 예비해 두신 바로 그 평화를 바야흐로 인간에게 부어주시리라는 기대를 나타내는 겁니다.
행 10:36에서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가 선포하신 내용을 ‘평화’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 10:3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눅 12:51) 이 두 말씀은 똑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평화를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값싼 하찮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평화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칼 또는 분열의 아픔을 겪고서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여기서 ‘칼’은 낡은 것 또는 잘못된 것을 제거하거나 단절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분열’은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을 두고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도 갈라지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요.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선교 여행에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다니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들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마 10:7-8) 제자들의 활동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과 질병이나 귀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또 다시 하나로 묶어 요약하면 뭐가 되나요? 이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마 10:11-13) “평화를 빈다고 인사 하여라”는 원문에는 “그 집에 인사 하여라”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샬롬” 하고 인사를 했으니까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 하여라” 라고 인사말의 내용을 보충하여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다음 줄에 ‘평화’라는 낱말이 두 번 연달아 나오는 것과도 일치합니다(평행절인 눅 10:5에는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라고 지시하셨다). 사람을 만날 때에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것은 유치원 입학 이전 어린이도 다 알고 있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 중의 상식에 속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교여행에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지시하시기를 어느 집에 들어갈 때에 그 집에 인사할 것을 명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기초적인 예절 교육을 시켰다는 것을 뜻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건네는 인사말은 유대 사람의 관례대로 “(당신에게) 평화(를 빕니다.)”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이 건네는 이 인사말은 단순히 상대편의 고막을 한 번 울리고 사라져버리는 겉치레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평화를 가져오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가 베푸시는 평화를 나누어주는 바로 그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인사말은 의사 전달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 말의 내용이 현실이 되게 하는 언어사건(Wortereignis)을 실행하는 행위입니다. 제자의 입에서 나온 그 ‘평화’라는 말은 단지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 내용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말은 공기 중에 음파를 한 번 일으키고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이 그 평화를 받아들일 자격을 갖추었으면 그 사람의 소유물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말한 사람이 그것을 도로 거두어들여야 하는 그러한 것입니다. ‘평화’는 예수께서 주시는 종말적 구원의 내용을 지칭합니다.
에베소서는 예수께서 하신 일의 내용과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평화’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가장 적확하게 표현했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17. 그분은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엡 2:14-19)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오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 속에는 ‘로마의 평화’를 내세우는 로마 황제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장본인이 아니라는 비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세상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담이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둘 사이를 가르는 바로 이 담을 허물어 버리고 그 둘을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신 분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각각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똑 같이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이 양쪽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 것입니다. 화해는 소외, 차별, 원수된 것을 철폐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소외와 차별의 철폐는 기득권이나 특권의 포기를 뜻합니다. 평화는 갈라져서 서로 원수로 대립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하나로 묶는 것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평화를 가져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장차 출현할 메시야 왕이 ‘평화의 왕’으로 불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9:6). 스가랴는 메시야 왕이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슥 9:10).
요한복음 기자는 다른 어느 복음서 기자보다도 더 생생하게 예수를 평화 수여자로 그렸지요.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 14:27) 예수가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가 다르다는 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물질적, 육신적인 것이고 예수가 주시는 평화는 정신적, 심적인 것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일시적인 것으로 가짜 평화이고 예수가 주시는 평화는 궁극적인 참된 평화라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5:33) 우리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박해와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평화를 얻는다는 것을 담보해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을 만나실 때에 평화의 인사말을 건네셨습니다(눅 24:36; 요 20:19,21,26). 요한복음에는 이것이 특별히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모든 일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대하소설이라 하더라도 주인공이 일상적인 인사말을 건넨 것을 일일이 기술하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인사말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는 이제 평화를 직접 수여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는 단순히 평화의 인사말을 하신 것이 아니라 평화라는 실물을 실제로 나누어 주셨던 것입니다.
신약성서 서신의 서두에는 발신인이 수신인에게 보내는 인사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간단히 요약하면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서신 결미에 이와 비슷한 인사말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 인사말은 히브리 식 인사말과 헬라 식 인사말을 혼합하여 새로운 그리스도교 식 인사말로 정착된 것입니다. 은혜와 평화의 출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명시되었습니다. 이 은혜와 평화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립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은혜와 평화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은혜와 평화는 종말적, 신적 선물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얻을 이 선물을 맛보기로 지금 부분적으로 선취하는 거예요.
‘복음’은 예수의 선포를 요약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평화’는 다시 이 복음의 내용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평화의 복음’(엡 6:15)이라는 표현은 평화가 복음의 내용임을 나타냅니다. 즉 그것은 ‘평화를 이루는/수여하는 복음’을 뜻하지요. 엡 2:17과 행 10:36에 ‘평화’라는 낱말이 ‘복음을 전하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평화’가 복음 선포의 내용임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구약성서의 ‘언약’(=계약)은 신약성서 ‘복음’에 대응합니다. 구약성서에 ‘평화의 언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평화가 언약이 지향하는 내용임을 나타냈습니다(사 54:10; 겔 37:26; 말 2:5). 이사야와 나훔은 ‘복음(=기쁜 소식, 좋은 소식, 복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과 ‘평화를 전하는 것’을 병행대구 형식에서 동일시했습니다(사 52:7; 나 1:15).
하나님은 종말적 구원을 이루시는 주동자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평화’라는 용어가 여러 번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롬 15:33; 16:20; 빌 4:9; 살전 5:20; 살후 3:16; 히 13:20). 이 표현은 하나님은 평화를 이루시는/수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성서에는 “여호와 샬롬”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삿 6:24) 그것은 “여호와는 평화이시다”를 뜻합니다.
발로리는 프랑스 남부의 이름 없는 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이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졌습니다. 이 마을의 성당 벽에 피카소가 그려준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이 성당 내부의 삼면 벽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왼쪽 벽에는 전쟁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고, 오른쪽 벽과 정면 벽에는 각각 평화와 세계 평화를 주제로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오른쪽 벽의 그림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 하늘에 노란색 태양이 떠 있습니다. 태양은 검정, 빨강, 노랑, 파랑, 하양의 여러 가지 색들을 들러 싸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태양은 빛과 열과 생명의 원천입니다. 태양이 빛과 열과 생명을 발할 때에 무색(無色)입니다. 그러나 그 무색은 아무 색깔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갖가지 모든 색들을 포섭하여 자기 안에 간직한 통일체로서의 무색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가치’‘사상’‘이념’들이 혼재하면서도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때에 생명력이 충일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정원에는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린 과일 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주의 풍요로움은 평화로운 삶의 필수조건임을 상징합니다. 안방에는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물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이 아기가 만끽하는 평화보다 더 큰 평화가 어디 있겠어요? 마당에서는 여인들이 알몸으로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 제약 없이 삶의 기쁨을 구가합니다. 말의 양어깨 죽지에는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환상의 세계가 무한대로 펼쳐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이는 어항 속에서 새들이 헤엄쳐 다니며 새장 속에서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고정 관념에도 얽매임 없이,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은 종말론적입니다. 역사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은 현재의 역사를 끝장내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새롭게 변혁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종말론적 역사관은 기존의 어떠한 것에도, 그것이 아무리 고귀한 것일지라도 절대로 거기에 궁극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 소망의 빛에 비추어서 현재의 모든 것을 상대화 하고 비평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냉소주의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평화운동을 벌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어항에 금붕어를 기르는 사람에게서 그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금붕어를 살리려면 반드시 묵은 물을 갈아주어야 하죠. 묵은 물을 갈아야 하는 경우에도 묵은 물을 몽땅 쏟아버리고 새물로 채워 넣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묵은 물을 다 빼고 난 뒤에 새물이 채워지기 전까지 금붕어가 물이 없기 때문에 숨을 못 쉬고 죽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고 금붕어가 갑자기 새로운 환경(=새물)에 적응할 수 없어서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물을 갈아주는 방법은 묵은 물을 1/3 정도는 남겨 두고 2/3의 묵은 물만 갈아야 한다고 합니다. 물을 갈아야 할 때가 언제인지, 얼마 분량의 물을 갈아야 할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오랜 경험에서 얻은 지혜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평화운동의 원칙은 첫째로 ‘질서유지/평화유지’라는 명목으로 기존의 불의한 제도나 사회적 관계의 현상을 유지하는 것을 종말론적 소망에 비추어서 단호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현재 내려주신 은총을 소중하게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금붕어 기르는 사람이 고도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실현해야 할 평화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지혜에도 귀를 기울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복음의 내용에 대한 성서의 메시지에 부단하게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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