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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가족이다(God Is Family)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2609 추천 수 0 2011.11.30 16:39:06
.........
성경본문 : 요17:20-26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0년 7월 18일 설교 <내 영혼의 오두막> 열번째
“하나님은 가족이다”(God Is Family)
--요한복음 17:20-26

 

1.

전도자들 가운데 가가 호호 방문하여 <파수대>(Watchtower)라는 책을 전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에서는 이 교단을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혹시, 그 전도자들과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들은 기존 신자들의 약점을 공략하여 넘어뜨리는 일에 아주 잘 훈련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도자들이 기존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기 위해 가장 자주 문제 삼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그들은 자주 이렇게 질문합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에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질문에 놀라게 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당연히 성경 안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에게서 당황하는 빛이 보이면, 그 전도자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후대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정치적인 세력 다툼의 결과로 정통 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에 없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삼위일체에 대한 명시적인 설명이나 가르침도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와 교리는 후대에 서서히 발전되다가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에서 투표로 결정되었고,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역시 투표로 재확인 되었습니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사실에 기초한 말입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명시적인 가르침이 성경에 없지만, 그 교리의 근거가 될만한 본문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함께 일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성경 본문으로서 세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바울 사도의 말씀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마 28:19)

바울 사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고후 13:13).

베드로 사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미리 아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셔서, 여러분은 순종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더욱 가득 차기를 빕니다.” (벧전 1:2)

 

2.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 교인들의 신앙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약성경도 대부분 초대 교인들의 신앙 체험을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인들 대부분은 유대인들이거나 유대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유대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일신 신앙’(monotheism)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모두 참된 신은 창조주 하나님, 오직 한 분이라는 유대교 신앙의 토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예배하는가 하면,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초대 교인들 자신들도 헷갈렸을 것입니다. 분명히, 참된 하나님은 한 분 뿐이라고 배웠는데,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체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수 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성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그분의 뜻을 더 깊이 순종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령을 체험했는데, 그 체험으로 인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영적 체험이 쌓여 가면서 서서히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대상은 성부 하나님일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일 수도 있으며, 성령일 수도 있는데, 그 체험의 결과는 모두 같았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며,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충만해집니다. 서로 다른 세 분의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그 경험의 결과는 늘 같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출발점입니다.

이렇게, 수 많은 신앙인들의 영적 체험을 두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종합한 결과,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앙 고백(Creed)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하나님 그 자체이시며, 빛 그 자체이고, 참 하나님 그 자체이시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셨지,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실체를 가지셨다. …… 그리고 우리는 주이시며 생명의 공여자이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셨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이 교리는 분명히 성경적인 믿음에 뿌리를 둔 것이며, 지난 2천년 동안에 일어난 진정성 있는 영적 체험들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설명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지만, 이것만이 성경적인 신앙 고백과 우리 자신의 영적 체험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스스로 기독교의 한 파라고 주장하는 교파들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교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Jehova’s Witness)이 그 예이고, 유니테리언 교회(Uniterian Church)가 또 다른 예입니다. 그들의 교리를 들어 보면 삼위일체 교리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설명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리들은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영적 체험의 복잡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 체험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을 줍니다. 우리가 믿는 삼위의 하나님이 인간의 창작품이 아니라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되지도 않는 교리를 아직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은 정통 기독교가 그만큼 정직하다는 뜻도 됩니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해 가능한 정도로 교리를 축소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그것이 아니고는 우리의 영적 경험을 담아낼 방법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3.

삼위일체 교리를 말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주 비유가 사용되곤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비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물의 비유’입니다. 물이 때로는 액체로, 때로는 고체(얼음)로, 또 때로는 기체(수증기)로 바뀌는 것처럼, 하나님도 때로 성부로, 때로 성자로, 또 때로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비유입니다. 또 다른 비유는 ‘태양의 비유’입니다. 태양의 본체가 있다면, 거기서 열이 나오기도 하고 빛이 나오기도 하는 것처럼, 신성의 본체이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빛과 같은 성자 예수님이 나오기도 하고, 열과 같은 성령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아, 그것 참 좋은 비유일세!”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두 가지의 오해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기독교 교파 중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도 있지만, 삼위일체를 오해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오해한 이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의 이단은 ‘삼신론’(tritheism)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이 서로 별개로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세 종류의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참된 신은 한 분 밖에 없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신으로 활동하신다고 믿습니다.

다른 하나의 이단은 ‘양태론’(modalism)이라고 불립니다. 신학 전문 용어이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감을 잡기 어렵습니다. 그 핵심은 이렇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때로는 성부로, 때로는 성자로, 또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는 것입니다. 삼신론은 세 분의 독립성을 너무 강조한 것에 문제가 있는데, 양태론은 세 분의 동질성을 너무 강조한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위에서 예로 든 ‘물의 비유’와 ‘태양의 비유’는 모두 양태론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부부 일심동체’(夫婦 一心同體)라는 개념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분명히 구별되는 개별적인 인격입니다. 하지만 부부가 함께 살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가 되면, 분명히 구별되는 개별 인격이지만,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는 것이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의 제도를 마련하시고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창 2:24)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일심동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마음과 생각과 뜻과 정서까지 하나가 된 부부, 아내가 뜻하는 것이 곧 남편의 뜻이요, 남편이 뜻하는 것이 곧 아내의 뜻이 되는 관계, 아내에게 말하는 것이나 남편에게 말하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부부, 서로 얼굴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부부, 그리하여 그 삶의 방향이 동일한 부부—바로 이것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가장 근사한(nearest)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소설 <오두막>이 이 점에서 독자들에게 아주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 소설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저자가 이 소설에서 양태론을 주장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옳지 못한 비판입니다. 우리 말 번역을 보면, 분명하게 양태론을 말하는 것 같은 대목이 한 군데 있습니다. 파파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 신이 아니라, 세 속성을 가진 하나의 신이죠.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직장인인 한 사람처럼 말이예요. 나는 하나의 하나님이고 또한 세 인격이며, 이 셋은 전적으로 하나죠. (156쪽)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오역입니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파파의 입을 통해 삼신론과 양태론을 모두 부정하고 있는데, 번역자가 거꾸로 번역한 것입니다. 제대로 번역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세 신이 아닙니다. 또한, 한 사람이 남편도 되고 아버지도 되고 직장인도 되는 것처럼, 하나의 신이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의 하나님이고, 나는 또한 세 인격이며, 이 셋은 완전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하나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두 가지의 이단, 즉 삼신론과 양태론을 모두 배격하고, 균형 잡힌, 바른 이해를 도우려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상징하는 파파와 예수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사라유는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는 인격체들이지만, 이 셋은 일심동체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위해 그리고 한 마음으로 일합니다.
오두막에서 파파와 예수와 사라유를 모두 만나고 나서 맥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 중 누가 하나님일까? 이들은 환상이나 천사일 뿐이고, 나중에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참으로 당혹스러운 노릇일 터였다. ‘모두 셋이니 삼위일체 같은 것일까? 하지만 두 여자와 한 남자 중에 백인은 아무도 없다니? 그건 그렇고, 그동안 왜 하나님을 당연히 백인이라고 생각해 왔을까?’ 그는 몰려드는 상념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가장 대답을 듣고 싶은 질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맥이 간신히 물었다.
“그러면 당신들 중 누가 하나님이죠?”
“나예요.”
세 사람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맥은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고 듣는 것을 전부 파악할 순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이 믿어졌다. (132쪽)
 
맥은 파파와 예수와 사라유를 함께 그리고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셋이 어떻게 따로이면서 하나인지, 삼위일체의 신비를 어느 정도 느껴 알게 됩니다. 셋은 각각 서로 다른 일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행하지만, 그 모든 일은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고, 또한 서로의 행동은 서로를 위해 섬기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신비하고 감탄스럽습니다. 이 아름다운 조화를 지켜 보는 맥에게는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맥이 묻습니다.

“당신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법이 맘에 들어요. 정녕 하나님이 그러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어요.”
“무슨 뜻인가요?”
“음, 나는 당신이 하나이자 전부이며, 당신은 또한 모두 셋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서로에게 너무나 상냥하게 대하죠. 당신 중 하나가 다른 둘보다 지위가 더 높은 것이 아니었나요?”
셋은 그런 질문은 생각도 못 해봤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맥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대장이고 예수는 명령을 따르는 자, 다시 말해서 복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성령은 그 위치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는…… 아니 …… 그녀는 …… 그러니까 내 말은……” (189-190쪽)

 

5.      

바로 이 지점에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하나가 되어 이심전심으로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하는데, 그것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에게 절대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를 위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만들어 가는 하나됨입니다.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파파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매켄지, 우리는 우리 가운데 누가 최종 권위자냐는 개념은 없고 통일성만 갖고 있어요. 우리는 관계의 원 안에 삽니다. 명령 계통이나 당신 조상들이 말하던 ‘존재의 대사슬’ 같은 것은 우리와 상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당신은 권력 구조가 없는 관계를 보고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군림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 사이에 서열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죠. 사실 서열은 당신들의 문제이지 우리 문제가 아니에요.”(191-200쪽)

아마도, 여러분에게도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성부 하나님이 제일 높고 성자 예수님과 성령은 성부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당연해 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대목에서 폴 영의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위계적인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그리곤 했습니다.
image1.jpg


이 그림에서 보듯, 성부 하나님은 삼각형의 꼭지점에 있고, 예수님과 성령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명령에 대해 복종함으로써 하나됨의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이해입니다. 하지만 이같은 위계 질서와 명령과 복종의 관계는 하나님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섬기고 사랑하고 위하고 받드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image2.jpg

소설 <오두막>에서 파파가 “우리는 관계의 원 안에 살지요”라고 말했는데, 바로 이것이 관계의 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이랄 것 없이,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 따질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섬기고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폴 영은 이 소설을 통해 이 ‘관계의 원’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그려 주었습니다.

 

6.

세 분 하나님이 활동하는 방법은 오늘 우리의 사고 방식이나 삶의 방식과 매우 다릅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하듯, 우리는 “너무나 파괴되고 훼손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조직을 장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하거나 살아간다는 것을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192쪽). 실제로 그렇습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학교든, 회사든, 어느 조직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명령 계통이 서지 않으면 위에 있는 사람도 불안해지고, 아래에 있는 사람도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이고, 군기를 세우고, 징벌을 내립니다.

명령 계통과 서열에 의존하지 않고는 불안해 하는 이 마음이 바로 타락성의 증거입니다.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고 위하시는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깊은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돌아감으로써 그 불안감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명령 계통과 서열 그리고 그 안에서 군림하거나 권력자에게 의존함으로써 해결하려 합니다. 권력을 잡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고 부리다 보면 불안감이 잠시 잠깐 사라집니다. 혹은 권력자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동안 그 불안감이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정부에서든, 직장에서든, 우리는 이 명령 계통과 서열을 중시하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처럼 타락한 우리에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누리고 있는 ‘관계의 원’과 ‘서로를 위하여 사는 방법’은 큰 충격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죄에 빠짐으로 인해 잃어버린 ‘낙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되찾아야 할 에덴은 바로 우리 내면에 있고 또한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사라유의 부드러운 손으로 치료 받고, 더 이상 군림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돌보는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열망해야 할 ‘낙원 회복’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은 우리가 이같은 ‘관계의 원’을 회복하고 그 안에 사는 것을 열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쓰기를 소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신비가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1-22절)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하나됨은 믿는 사람들의 하나됨의 모델이며 또한 그 하나됨을 만들어 주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기도하십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절)

 

이 말씀에 의하면, 낙원의 회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그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모셔 들여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머물러 사시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내 속에 있는 ‘권력에의 의지’가 치료되어야 합니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부리고, 더 커지려는 욕망을 치료 받아야 합니다. 권력을 소유하거나 권력자에게 의지하여 안정감을 찾으려는 부패한 마음을 치료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기를 즐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생길 것입니다.

나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도 치료 되어야만 낙원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하고 양육하는 일에 더욱 마음을 써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갈 때, 부부는 서로 섬기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이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 타락한 본성을 치료받을 때, ‘명령의 사슬’이 아니라 ‘관계의 원’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7.

지난 주말, 저는 28명의 교우들과 함께 ‘치유를 위한 영성 수양회’를 다녀 왔습니다. 수양회를 인도하느라 주일 강단을 비우는 것에 대해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그렇게 하여 부목사님들이 강단에 서는 기회를 만들어 드리는 것도 필요하고, 또한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믿기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양회는 특히 우리의 상처들을 서로 나누며 함께 기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둘째 날 밤, 저희 모두는 약 세 시간 동안, 서로의 상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게 시작했는데, 머지 않아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상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아파하며 심하게 깨어져 통곡했습니다. 서로 부둥켜 안고 기도했습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쓰고 있던 모든 가면이 벗겨졌고, 겹겹이 두르고 있던 무장이 해제되었으며, 두텁게 쌓았던 마음의 벽이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낙원이회복된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모두 안에 머물 때 우리가 진실로 하나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체험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받은 치유와 회복의 은혜는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가 되어 ‘따로 또 같이’ 하나의 목적으로 위해 서로 섬기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실 때 그 본성에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 본성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관계의 원’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 관계의 원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관계의 원’이 아니라 ‘관계의 사슬’ 혹은 ‘관계의 피라미드’ 혹은 ‘관계의 사다리’ 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비정한 계층 구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비틀어졌으며, 우리는 두터운 가면을 쓰고 겹겹이 무장을 하고 잠시도 안심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낙원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낙원을 회복하는 길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습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 돌아가 그분과 함께 거할 때,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치료되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며, ‘관계의 사다리’가 무너져 ‘관계의 원’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주말에 매릴랜드의 한 산 골짜기에서 우리가 경험한 사건입니다. 그것이 매일 매일의 일상 생활 속에 일어나야 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직장에, 우리 사회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간절히 기도하신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낙원 회복의 사건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안에 그리고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모든 조직 안에 이루어지도록,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더욱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저희에게 당신의 그 놀라운 신비를 알게 하셨습니다.
다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지만
삼위일체의 신비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신비를 더 깊이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도 그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소서.
죄로 물든 저희 마음을 치료하시어
서로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게 하소서.
잃어버린 낙원을
우리의 모든 관계 안에 회복시켜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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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6 마가복음 이런 죄는 짓지 마세요 [1] 막3:20-30  허태수 목사  2011-11-29 2105
6065 고린도전 그날을 기다리며 고전13:8-13  허태수 목사  2011-11-29 1876
6064 누가복음 물구나무를 서면 눅18:1-8  허태수 목사  2011-11-29 1765
6063 로마서 선취先取하는 믿음 롬4:13-25  허태수 목사  2011-11-29 1935
6062 로마서 세 번째 물음과 11계명 롬8:19-22  허태수 목사  2011-11-29 1554
6061 마태복음 믿음에 대한 환상을 벗고 마14:22-33  허태수 목사  2011-11-29 1772
6060 마태복음 나비 같은 삶을! 마25:31-46  허태수 목사  2011-11-29 5733
6059 요한복음 성령의 날숨 삶의 들숨 요20:19-23  허태수 목사  2011-11-29 4430
6058 마태복음 밝고 유능한 사람이 받는 복 마1:1-6  허태수 목사  2011-11-29 3207
6057 히브리서 우리가 아니면 히11:39-40  허태수 목사  2011-11-29 2882
6056 고린도전 부활, 그 이후(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고전15:20-26  허태수 목사  2011-11-29 3540
6055 고린도전 죽은 사람의 부활 고전15:12-58  허태수 목사  2011-11-29 2899
6054 고린도후 고난이 넘치는 복을 받으시라! 고후1:3-7  허태수 목사  2011-11-29 4765
6053 갈라디아 봄이 어디 있습니까? 갈2:20  허태수 목사  2011-11-29 2972
6052 로마서 만물이 봄 볕 속에 들듯 롬5:1-11  허태수 목사  2011-11-29 4156
6051 요나 食客(율법학자와 예수의) 욘4:1-4  허태수 목사  2011-11-29 3380
6050 이사야 염치없어도 주님을 부르라! 사7:1-9  허태수 목사  2011-11-29 3035
6049 빌립보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빌3:12-21  허태수 목사  2011-11-29 2773
6048 디모데전 자화상(自畵像)을 그리는 시간 딤전1:12-14  허태수 목사  2011-11-29 7269
6047 창세기 복을 짓는 사람 창35:18  허태수 목사  2011-11-29 3332
6046 누가복음 영혼의 집짓기 눅11:23-28  허태수 목사  2011-11-29 3075
6045 요한복음 아기 예수를 맞는 마음 요2:1-11  허태수 목사  2011-11-29 1885
6044 누가복음 천국으로 건너가는 다리 눅16:19-25  허태수 목사  2011-11-29 1977
6043 고린도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고후8:1-9  허태수 목사  2011-11-29 1835
6042 요한복음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라! 요3:1-8  허태수 목사  2011-11-29 2558
6041 시편 나의 노래 나의 기도 시19:1-14  허태수 목사  2011-11-29 1848
6040 누가복음 구원을 온전케 하는 감사 눅17:11-19  허태수 목사  2011-11-29 2209
6039 요한일서 옛날 하나님 요즘 하나님 요일4:7-12  허태수 목사  2011-11-29 2254
6038 야고보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약2:1-13  허태수 목사  2011-11-29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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