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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58&page=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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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
18세기를 뒤흔든 합리주의와 웨슬리의 복음적 부흥운동
18세기는 신보다는 인간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 사상과, 전 유럽을 뼈저린 통회로 하나님품으로 돌아오게 한 영적각성운동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공존했던 재미있는 시기였다. 인간들이 과학과 이성을 강조하며 자긍할 때 하나님은 당신만의 가장 강력한 무기, 비장의 카드를 꺼내셨다. 합리성과 지식을 좇아 쭉쭉 교회를 빠져나가는 지성인들, 잘 차려입고 세속을 탐하던 멋진 신사들조차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 안에 뒹굴며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힘과 이성으론 도저히 설명도 해명도 할 수 없는 이 은혜의 도가니속에서 전유럽과 미국은 두려워 떨며 통회할 뿐이었다. 이성과 과학적 증명을 자랑하던 지식인들조차 함구하고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다만 절대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권능앞에서 인간이성의 불완전을 몸소 체험하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노래했다.
이처럼 선명하게 대비되는 이성과 신비의 두 현장속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복음적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1) 합리주의(계몽주의)란 무엇인가
“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모토다. 계몽주의는 합리주의적인 증거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 어떤 신앙도 배격한다. 성경 또는 교회적 권위보다 이성에 의존할 것을 호소하였다. 중세 사고의 중심은 신이었다. 어거스틴은 “나는 하나님의 품 안에 들어와야 마음의 편안함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합리주의 사상에서는 사고의 중심이 인간으로 바뀌었으며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1744년에 볼테르는 “오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내와 아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합리주의자들은 조물주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그 존재를 성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 이성에 입각해서 접근하였다.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17세기 이후에 합리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신비주의가 출현한다. 합리주의는 17, 18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교단을 초월하여 화란, 영국, 불란서, 그리고 독일 등 유럽에서 형성된 기독교 운동이다. 30년 전쟁이 끝난 후 교회의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상실되면서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등장한 것이 계몽주의다. 이러한 계몽주의 등장에 대해 카톨릭은 개신교의 탓으로, 개신교 신학은 15-6세기의 휴머니즘에서 배경을 찾는데, 일반적으로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생겨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개신교 정통주의는 교리와 계시의 위치를 극대화시켜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의 역할을 극소화시켰는데, 이에 대한 반동이 계몽주의라는 것이다. 계몽주의에서 이성이 계시를 압도하게 되자, 신학이 현대 과학과 철학에 따라 조정하게 되고 당연히 신학이 세속화되어가는 위험을 맞았다.
계몽주의의 사상적 뿌리는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17세기의 자연신론, 소시니안주의,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로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계몽주의로 인해 종교가 인생의 중심이 아니라 자연과학과 같은 수준으로 하락하게 되었다.
2) 합리주의는 왜 생겨났는가?
(1) 종교전쟁에 대한 회의-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프랑스 위그노들에 대한 학살 등의 종교전쟁(1550-1650)으로 종교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나게 되었다. 감정적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한 집단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시키거나 일부 광신자들의 잔인성은 종교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과 환멸을 조장했다.
(2) 자연과학과 철학의 발달- 합리주의 발전 배경에는 자연과학의 발전이 있고, 이 자연과학의 발전의 결과로 우주관이 변화하였다. 프톨레미의 천동설이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발표로 변화하였다. 그의 저서 “천체의 운행에 대하여”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관한 새로운 사고 방식을 제기했고, 어떤 자료들을 경험적으로 조직하는데 수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 이론을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망원경을 이용한 관찰을 통하여 하나의 틀로 정착시켰다. 그는 우주 안에서의 생명이 대단히 복잡한 것인데, 그 복잡성 속에서 수학적인 규칙성을 증명하였다. 이 방법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다. 과학혁명에 대해 그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지적 권위는 인간의 이성뿐이라고 하였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귀납법을 주장하며, 실험과 혁신에서 경험적 지식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말에 대해 베이컨은 그런 말은 인간이 변화와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하도록 제한한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대중화시킨 것은 뉴톤(Iaisac Newton, 1642-1727)이다.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진다는 뉴톤의 법칙성의 원리는 과학적인 탐구와 기계적인 우주관을 정립시켰고, 성경의 초자연적인 요소인 계시, 기적 등을 거부하는 반기독교적인 방향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러한 과학의 발전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철학도 이성의 이름으로 전통적인 권위에 도전하였다.
(3) 정치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국가 이익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기독교 진리는 이차적인 목표가 되었다. 대표적인 합리주의자들은 데카르트, 스피노자(Baurch Spinoza, 1632-1677), 라이프니쯔(Leipniz, 1646-1710), 존 로크(John Locke) 등이다.
3) 이신론(Deism)
이신론은 합리주의와 종교를 결합시켰던 새로운 철학이다.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을 우주의 합리적 활동으로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가시적인 활동을 거부하였다.
1660년대 중반 영국에 케임브릿지에서 플라톤주의가 발전했고, 선하게 사는 모든 사람들을 천국에서 배제하지 않는다는 만인구원론이 대두되었다. 이 플라톤주의가 뉴톤에게 영향을 미쳤다. 뉴톤은 과학자이면서 신학자였다. 그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 정확한 세계 종말을 찾으려 했다. 태양계를 볼 때 이 태양계를 만든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교리의 구체적 내용인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자연신론자들은 자연의 존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인정하나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여러가지 계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계시는 인간 이성이 발전하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종교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라 간주했다. 레씽은 어떤 임금이 하나의 진짜 금반지와 두개의 위조 반지를 만들어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아버지조차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른다. 이 세개의 반지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자연주의가 좀더 발전한 것이 이신론이다. 이러한 이신론의 등장 이면에는 지나치게 성행했던 교리주의(Dogmatism)에 대한 반발이 있다. 이신론자들은 기적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적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자연법칙을 뛰어넘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결함을 인정하는 셈이다. 완전한 우주이므로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이런 하나님은 세계 모든 인류가 이성에 기초해 믿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철학적 사조로만 지탱되었고, 종교로서의 영향력이 확산되지는 못했다. 몇몇 지식인들에게는 인정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를 사모하는 진정한 크리스천들에게서는 외면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성경 사건들, 특히 성육신의 역사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2) 일체 계시를 무시해 버리면 기독교의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신론은 철학적 사조는 되었으나 일반적 종교운동은 되지 못했다. 이신론의 입장을 취한 사람은 영국의 뉴톤, 독일의 칸트, 프랑스의 볼테르(Francois Marie Arouet de Voltaire, 1694-1778) 등이다. 이러한 시기에 영적각성운동으로 인한 복음주의 불길이 솟은 것은 하나님의 기적, 절대적인 은혜였던 것이다.
2. 웨슬리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영국 상황
웨슬리의 시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였던 칼빈의 시기보다 2세기후인 18세기였다. 이때 상황은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했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조금씩 왜곡되어 구원은 이미 받았으니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도덕 폐기론자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합리주의와 이신론의 영향으로 성경, 기적, 회심, 기도, 그리스도의 신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주에 대한 믿음이 심하게 위협받았다. 그리고 18세기의 영국은 청교도 신앙의 쇠퇴와 산업혁명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 등으로 도덕적 침체를 가져왔다. 성직자들의 타락상과 세속화는 중세의 그것과 비슷하였다. 강단의 설교는 힘이 없고 맥빠진 도덕적 교훈에 불과하였다. 이 총체적 위기에 진젠도르프의 모라비안 같은 대륙의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 영적 각성 운동이었고 그 가운데 웨슬리가 있다.
1) 어머니 수잔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국교회 고교회파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종교적 무관심을 타파하기 위해 자기 교구인 링컨주에 경건협회를 세웠다.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Susanna Wesley)는 장로파 청교도 목사의 딸로 경건한 부인이면서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웨슬리는 아버지로부터 국교회주의의 철저한 권위주의적 신앙을, 어머니에게선 예리한 감각과 깊은 경건을 그리고 영국 청교도서적을 탐구하면서 개혁정신에 눈을 떴다.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는 오랫동안 청교도 생활을 한 분이기에 아이들을 매우 엄격한 규율 아래서 양육하였다. 웨슬리는 전 세계를 하나님의 은혜의 도가니로 인도했지만 그의 삶은 청빈 그 자체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어머니의 좋은 영향이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난했지만, 천국으로 향할 때까지도 그 가난을 유지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가진 것이라곤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었다.
웨슬리의 부모는 1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웨슬리는 15번째 태어난 아이였다. 국교회 목사인 아버지의 생활비는 1년에 겨우 50파운드였다. 이 돈은 한 아이를 1년간 기르는 비용도 채 못되었다. 그런데 수잔나 부부는 그처럼 가난하게 살면서도 청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아무리 구차해도 정당한 보수 외에는 신자들에게서 조금도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앤드류 교회는 신자가 2천명이나 되어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구차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들의 신조는 한결같았다. “본래 주님의 전도자는 가난을 복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지팡이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말라고 했어요.” 신자들이 돕기를 청하면 수잔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였다. “분명히 말하면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없이 양식만 풍족하다면 그처럼 괴로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러한 어머니의 생활관 때문에 웨슬리는 어릴 적부터 배가 고파 견디기가 힘들었고, 옷이 다 떨어져 마을 아이들에게 ‘비렁뱅이 아들’이라는 놀림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수잔나의 교육으로 가난의 귀중함을 배우게 되었고, 후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을 뒤흔들어 놓은 영적대각성운동의 선구자였지만 그 가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청빈한 삶을 영위하였다.
수잔나는 아이들이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반드시 먼저 주기도문부터 외우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면 전체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날 분량의 성경말씀으로 몇 편의 신약과 시편 한 장 씩을 꼭꼭 들려주었다. 웨슬리는 점점 자라면서 간단한 교리문답과 성경구절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국교도와 청교도의 심한 알력과 대립으로 국교도에 속한 웨슬리의 집에 불을 질러 모든 집과 목사관이 다 타버리는 엄청난 재난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어린 웨슬리는 분한 마음으로 법정에 알려서 그들을 감옥에 넣자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그래선 안된단다. 아무리 분한 노릇이라도 그래선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거든.” 이런 어머니의 권면이 웨슬리에겐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해야 당연하지만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나요?”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어떤 나쁜 사람들이 우리 목사관에다 불을 지른 것보다 더 엄청난 것이었단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부터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왔거든. 하나님의 존재를 아예 우습게 여겨버린 것이지. 그래서 모두가 짐승과 다름없이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왔던 것이야. 그처럼 엄청난 죄가 어디 있겠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죽게 만드신 다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단다. 이런 하나님처럼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행한 일을 통해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배워갈 수 있었고, 어머니의 사상은 끝까지 그의 중심이 되어 난관이 있을 때마다 그를 지탱해 주었다. 웨슬리의 사상은 복음주의 카톨릭 정신(evangelical catholicism)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웨슬리 안에는 전형적인 개신교주의와 영국의 국교회주의가 어우러져 있다. 웨슬리는 신심깊은 어머니가 있는 가정 속에서 경건의 실천적 모델을 찾았다. 그리고 옥스퍼드와 조오지아 선교사 시절에 섭렵한 영국 국교 신학자들의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영국 국교 사상을,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을 통해 초대교회의 경건과 금욕주의의 삶을 배웠다. 그리고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암 로우, 헨리 스쿠갈같은 지도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거룩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경건과 완전, 성화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고, 그것을 체험을 통해 교리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일생 작업이었다. 웨슬리는 성경의 교리를 신학화함에 있어서 희랍 신학·라틴 신학·중세 신학·모라비안 신학·종교개혁자들의 신학 등 모든 신학의 방법론과 강조점들을 체계있게 종합화했다는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2) 메도디스트
웨슬리 동생이자 동역자였던 찰스 웨슬리와 휫필드 등 옥스퍼드 동역자들이 합세하여 1729년 봄에 공동기도를 목적으로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훗날 그들이 영적각성운동을 전개하고 복음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게된 모체가 된다. 존 웨슬리가 이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성클럽의 주목적은 경건규칙을 삶 속에서 흠없이, 낱낱이 생활화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자신의 의지, 생각, 보잘것없는 육신조차 깡그리 드리고자 하는 열망이 그들 사이에 번져갔다. 그들은 매주 수, 금요일에 금식하고 성찬식을 매주 갖는 등 청교도적인 금욕주의 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규칙주의자(Methodist)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들은 매일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졌고,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은혜받은 것들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나아가 정기적으로 죄수들을 방문하거나 고아나 사회개혁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윌리암 로우였다. 그는 비국교도로 자연신론을 비판하는 「이성론」(The Case of Reason, 1732)을 저술하여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은 가장 악독한 교만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성의 능력은 죄로 말미암아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성은 종교적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경건한 신앙과 성결한 생활을 위한 “기독교적 완전에 관한 실천론”, “신실한 생활을 위한 엄숙한 명령”을 저술하였다. 특별히 이 두 책이 신성클럽 회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성 클럽 회원들은 초대 교회 교부들과 중세 신비가들의 삶과 신학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들의 삶의 목표가 기독자 완전, 성결임을 알고 나서는 큰 매력을 느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열렬하게 실천하기도 했다.
웨슬리가 옥스퍼드 대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웨슬리는 우연히 수위실에 들렀는데, 수위아저씨의 옷이 너무 춥고 낡아 보여 쳐다보자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옷이란 이것 한 벌밖에 없어요. 그래도 이 옷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답니다.” “점심은 드셨나요?” “집이 너무 가난해서 난 물 한컵으로 점심을 때운지가 벌써 오래되었답니다. 그렇지만 이 한 컵의 물을 주신 하나님이 또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아저씨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집도 형편없는 좁은 오두막이어서 난 이곳 수위실에서 그냥 밤을 지새운 적이 많지요. 하지만 이런 자리까지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웨슬리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입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잠잘 곳도 없는데 감사하다니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위 아저씨는 즉시 가로막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시고 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드는지 모른답니다. 거기에 비한다면 입을 것, 먹을 것, 잠자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이 진심입니까?” 웨슬리의 질문에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마음에 없는 말을 어떻게 합니까, 이런 마음만 가지고 살면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도 없고 불평스러울 것도 없어요.”
수위아저씨의 이 말은 웨슬리의 마음에 큰 감동과 파장을 일으켰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웨슬리는 한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 내가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세계가 따로 있었구나. 이런 세계를 모른 채 만약 목사나 신학자가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이겠는가.’
웨슬리의 마음에 복음적 부흥의 불길이 지피기 시작한 것이었다.
18세기 전 유럽은 계몽주의(합리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주장하며 초자연적인 요소는 모두 부인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부활 그리고 성경상의 수많은 기적들을 부인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고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만을 최고로 인정하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의 두뇌로 이룬 자연과학이 이때 최고의 수준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계몽주의를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이때 나약하고 유약한 크리스천들은 맥없이 쓰러졌고, 신심이 깊다고 인정받던 크리스천들도 턱턱 조여오는 합리주의의 공격에 나동그라지기 일쑤였다. 기독교가 제구실을 못하면 사회의 타락은 물보듯 뻔한 일이다. 자연히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하락하였으며 공직 사회에 부패가 만연하였다. 18세기에 영국 국민의 20% 정도가 교회에 출석하였다. 게다가 영국은 청교도 신앙의 쇠퇴, 이신론의 등장, 산업혁명으로 인한 인간 가치관의 변화 등으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암흑기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할 상황에서 하나님은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영적각성의 불길을 준비하셨다. 준비된 사람을 통해.
산 믿음
영국 하원의원이었던 오우걸 도우프 장군은 미국 조오지아주에 식민지를 개척한 사람이다. 새로운 식민지에 전도할 사람이 꼭 필요했던 차에 웨슬리 형제가 감옥 전도를 한다는 말을 듣고 조오지아주에서 목회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1735년에 미국으로 떠났다. 가는 도중 모든 것을 앗아갈 것만 같은 거대한 폭풍우를 만났다. 웨슬리는 전도하러 간다고 하면서 사나운 폭풍에 죽을 까봐 벌벌떠는 자신의 모습과, 산채만한 폭풍속에서도 요동하기는커녕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난다. 배를 금방이라도 삼킬듯이 사나운 파도가 덮치고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그야말로 배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다 죽게된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힘, 나의 피난처 어려운 고비마다 항상 구해주시니 땅이 다 깨어지고 산들이 깊은 바다에 빠져들어도 나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어라. 바닷물아 마음대로 소용돌이쳐 보아라. 하나님은 나의 산성, 나의 구원자시니.”
웨슬리는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를 이 배안에서 모라비안교도들을 통해 산경험을 한 것이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삶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였음을.
처절한 실패
미국에 간 웨슬리는 밤낮을 뛰어다니며 전도하며 사람들을 회개시켰다. 첫 예배부터 웨슬리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놓았다.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 예배당은 주일마다 사람들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주일뿐 아니라 평일에도 예배당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복음이 들어간 곳엔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무도회장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수많은 술집과 극장은 물론 값비싼 옷이나 보석점들까지도 발길이 뜸해졌다. 게다가 웨슬리는 학교를 설립하여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육사업도 펼쳤다. 가난하여 신발 없이 맨발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웨슬리 자신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학교에 나오기도 했다. 새벽 5시부터 활동하여 오후 10시까지 숨쉴틈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섰다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은 웨슬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웨슬리의 자신감은 날이갈수록 속도가 붙었고 하나님의 자리가 서서히 그에게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국교회파인 웨슬리는 지나치게 엄격한 규칙들을 만들어 그 제도대로 따르게 함으로써 불평불만들이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게다가 여자문제로 인한 오해로 웨슬리의 체면과 위신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미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남을 회개시키겠다고 의기양양해 들어갔던 미국의 전도운동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그의 국교회의 고교회파 입장은 청교도적 내지는 경건주의 분위기와 조화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실패를 통해 그에게 더 큰 것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1738년 1월 24일 영국으로 귀국하던 그는 실패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이렇게 적는다.
“식민지 사람들을 회개시켜 신자가 되도록 만들었지만 나 자신은 결코 한번도 회개한 적이 없지 않았던가! 나는 분명히 그동안 풍성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고, 나의 설교는 사람들을 움직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나는 어떤 죽음이 온다해도 사도바울처럼 죽는것이 도리어 유익하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이 온통 부패하고 가증스러운 채였던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의 행위나 의나 노력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께 이를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의 행동만 의지하고 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성령께서 친히 증거하실 일이지 내가 스스로 해야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찾아온 행복
이러한 깨달음은 웨슬리를 변화시켰다. 처절한 실패를 통해 하나님은 그에게 ‘겸손’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절대로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이 훌륭한 사람을 만나면 그가 어린아이라도 무릎 꿇고 배울 것이다.’
웨슬리는 귀국 후 런던에서 모라비안 선교사 페트루스 뵐러(Petrus B hler)를 만나 영어를 가르쳐 주면서 경건주의 신앙에 대하여 배웠다. 뵐러는 런던에 모라비아 경견협회를 설립하고 인도하였는데, 웨슬리가 여기에 참석했다. 때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올더스케이트 스트리트(Oders Gate Street)에 있는 경건협회 모임에 참석했는데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듣던중 아주 거대한 변화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듣는 중에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동시에 알게 되었고, 내몸에서는 죄악의 사슬들이 풀어져 내리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른바 그 유명한 ‘올더스케이트 사건’인 것이다. 이때부터 웨슬리는 자기 의(義), 국교회파의 틀에 박힌 엄격한 규칙들과 교회의 형식들, 심지어 기도문까지도 마치 몸을 결박하고 있던 쇠사슬을 벗어던지듯이 던져버렸다. 그의 영혼은 날개를 퍼덕이며 훨훨 날아오르게 되었다. 진정한 자유, 복음, 은혜를 향해…
활활 타오르는 부흥운동
웨슬리는 회심을 체험한 후에 1738년 여름에 헤른후트(Herrnhud) 공동체를 2주간 방문하면서 모라비안교도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의 교회조직, 신앙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구원의 확신, 선교열정, 교인 상호간의 형제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감리교체제는 외적교리보다는 내면적 체험을 강조하는 모라비안들의 영향으로 가슴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모라비아 형제단의 신비주의 내지는 정숙주의 경향을 비판하고 후에는 멀어지게 되었다. 모라비안 공동체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에 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부족한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에게 회심못지않은 중요한 계기가 된다.
1738년부터 시작된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이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인식하는데서 출발했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의 형식주의와 위선에 대해 초대 교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비판하였고, 국교회는 이들을 ‘열광주의자’, ‘광신자’라고 비난하며 국교회에서 설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동역자였던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가 웨슬리에게 옥외전도를 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산이든 언덕이든 길거리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몰려드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수천명 때로는 3만이 넘는 군중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가슴을 후벼팠다. 양복 양장으로 쭉쭉 빼입은 신사 숙녀들이 체면을 불사하고 나뒹굴며 통회했다. 광산노동자들 또한 눈물로 인해 골이진 얼굴로 하나님의 임재속에 기뻐 펄펄 뛰었다. 화장으로 곱게 칠한 숙녀, 잘 차려입은 신사도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앞에 체면을 내려놓고 나뒹굴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앞에 인간의 자존심, 체면따위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이러한 죄의 찔림으로 인한 통회와 기쁨의 함성이 전 영국, 나아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 성결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한만큼 마귀도 활발하게 일했다. 웨슬리는 국교도에 속한 폭도들에 의해 돌에 맞기도 하고 주먹과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피를 철철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핍박도 성령의 불길을 끌수가 없었다. 그는 순회설교자가 되어 평균 하루에 3-4회 설교하며 일생동안 4만여회 설교하였다. 국교회에서 쫓겨난 그는 영국 전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 전도하며 “세계가 나의 교구다”라고 외쳤고 실제로 그렇게 영성적 각성운동은 불길처럼 번져갔다.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형식화된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교회갱신운동이었다. 탁월한 설교가이자 조직자였지만 그는 국교회에서 분리할 의도가 없었다. 1739년에 브리스톨에서 협회(Society)를 조직하고 협회 소유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이 되었다. 1740년 7월에 “감리교 연합회” 즉 연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부흥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한 기구이지 국교회로부터 독립을 위한 기구는 아니었다. 회원자격은 진정한 회심이었고, 완전 성결을 위해 정진할 것을 요구하였다. 1742년 12명으로 구성된 속회제도를 도입하였고, 속장에 평신도를 임명하였다. 평신도들이 교회 활동을 통해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줌으로써 감리교를 통하여 각계각층의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세기 말엽 프랑스인 할레비(Elie Halevy)는 “1815년의 영국”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18세기말 프랑스의 혁명으로 불안정한 프랑스와 달리 영국이 안정을 유지한 것은 바로 18세기 복음주의의 부흥운동 때문이었다.” 나아가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영국에서 찬송가의 발전, 노예제도의 폐지와 감독제도 개선을 포함한 사회개혁, 그리고 근대선교운동의 유산을 남겨주었다.
이론이 아닌 체험의 신학
웨슬리가 올더스케이트의 경험을 기점으로 점진적인 성화과정을 거쳐 기독교인의 완전사상을 체계화시킬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중생 이후 하나님을 향한 거룩에로의 열망을 끊임없이 불태우던 그는 올더스케이트 체험을 통해 영국 국교회 신학에서 벗어나 이신득의를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오랜 갈망과 영적인 분투 끝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죄인이며 무력하고 부패하였으며 자신의 노력이나 선행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인식하였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믿음으로만이 성화에 이를 수 있음을 절감하고 성경연구와 아울러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그 말씀대로 살아있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체험은 특별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체험으로써 구속적 체험이었다. 즉 ‘은총의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속에서 경험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늘 하나님의 은총을 사람의 체험과 연관시켰고, 또한 논리를 생활과 그리고 교회를 사회와 연관시키면서 실제적인 산신학(living theology)을 정립하였다. 그러므로 체험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신학은 신학 사상사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칼빈과 비교해서 말한다면 칼빈은 무엇보다 성경을 우선하여 성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할 수 있는데까지 종합하고 체계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치밀하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이다. 웨슬리 역시 “한 책의 사람”으로서 성경을 중시하였으나 이에 하나 더 첨부하여 “체험”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웨슬리는 사회사업과 봉사활동을 적극 추진하며 자신의 완전사상을 펼쳤다. 웨슬리는 소박하고 절대적인 빈곤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교역자는 물론 무지한 평신도들까지도 자신의 영역 안에 포함시켜, ‘전 세계가 나의 교구요 나의 일터’라는 모토를 남겼고, 칼빈은 당대의 신학자들 즉 지성인들을 공략하여 교수, 사제, 주교들을 개신교화하고 훈련받은 지적 능력을 다해서 가톨릭의 오류와 무지를 극복하려고 애썼다.
창의적 종합 신학
웨슬리는 성경의 교리를 신학화함에 있어서 희랍의 신학, 라틴 신학, 중세기의 신학, 모라비안의 신학,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등 모든 신학의 방법론과 강조점들을 체계있게 종합화했다는데에 특징이 있다. 그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성결의 개념과 아울러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만으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강조를 채택했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생활까지 미치는 깊이와 동시에 거룩한 삶을 강조함으로 ‘믿음만으로’와 ‘거룩한 삶’의 둘을 은총의 테두리 안에서 종합시킨 것이다. 웨슬리의 사상은 복음주의 가톨릭 정신(evangelical catholicism)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웨슬리 안에는 전형적인 개신교주의와 영국의 국교회주의가 어우러져 있다. 웨슬리는 경건한 어머니를 통해 실천적인 모델을, 옥스퍼드와 조오지아 선교사 시절에 섭렵한 영국 국교 신학자들의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영국 국교 사상을,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을 통해 초대교회의 경건과 금욕주의의 삶을, 그리고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암 로, 헨리 스쿠갈같은 지도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거룩을 접할 수 있었다.
청교도 운동 이후 퇴조하던 교부 연구가 17세기에 윌리암 비버릿지(William Beveridge), 로버트 넬슨(Robert Nelson)같은 이들에 의해 복고되어 기독교 교리와 영성에 연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웨슬리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었다. 웨슬리는 이그나티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마카리우스, 에프라임 사이루스같은 이들로부터 지혜와 경건을 터득했다. 그는 탁월한 지성과 영국 국교의 품위 속에서 훈련받은 목회자이면서도 비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는 점에서 서민을 위한 복음주의가로 기억되기도 한다. 때문에 그의 사상과 삶에는 신앙과 행위, 성경과 전통, 계시와 이성,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보편구원과 조건 선택, 용서의 확신과 타락의 위험, 그리고 원죄와 기독교 완전주의가 조화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복음적 신인 협동설
웨슬리는 인간 속에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성향조차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속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마귀의 형상으로 인쳐져 훌륭한 교육이나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도 조종되거나 바뀌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완전히 부패한 상태 즉 완전한 절망가운데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이러한 상태를 ‘자연상태’라고 불렀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루터나 칼빈의 개혁자들과 일치하지만 칼빈의 이중 예정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웨슬리의 구원론에 대해 이성주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멸망은 사람의 책임으로 보았다. 사람이 자기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에는 최소한의 긍정적 반응을 보이며 협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론때문에 일부에서는 웨슬리 신학을 인본주의적인 신학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원죄론’을 보면, 인간의 완전타락과 전적부패를 분명하게 강조하고, 그렇기에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이에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말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의 신인협동설은 펠라기우스나 중세의 가톨릭의 주장처럼 인간이 절반, 하나님이 절반 나누어 맡는 식의 협동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 인간의 책임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재은총과 인간의 수동적 협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웨슬리의 완전 사상
루터가 ‘십자가’와 하나님의 ‘의’를 보면서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에 그리고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바라봄으로 ‘이중예정’에 초점을 두었다면, 웨슬리는 기독자 완전에 그의 초점을 두었다. 웨슬리는 완전성화의 단계를 영적인 성장 측면에서 매우 분명하고 훌륭하게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따라서 웨슬리는 교회사에서 영성신학의 탁월한 권위자라고 불리운다. 그는 하나님과의 합일,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원리를 체험적으로 입증시킴으로 하나님과의 일치에 대한 신학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로써 성도들에게 신앙의 초점과 과정 및 목표를 정확히 제공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성도들을 강력하게 하나님과 닮도록 이끈다.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의 의미는, 더 이상의 성장의 여지를 부인하거나 무죄한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완전을 가리킨다. 상대적 완전의 의미는 실수할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기적 완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독립적이거나 자력적인 완전이 아니라 항상 구원자를 바라보는 의존적인 완전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완전이란 타고난 본성적 죄성을 극복하며 하나님에게만 집중하여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의도의 순수함, 완전한 사랑, 그리고 인간의 유한함을 초월하여 절대적 완전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제한적 완전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는 완전주의가 열광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적 자부심과 자기 의에 반대하는 글 “감리회의 훌륭한 스승들에게 드리는 조언”을 출판했다. 또한 완전주의를 고정된 상태나 무죄 개념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방황하는 사상들”(1760), “신자 안에 죄에 대하여”(1763), 그리고 “신자의 회개”(1768)등 세편의 설교를 작성하였다.
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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