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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7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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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행복의 길에 들어서서
2006-01-29
I. 들어가면서
지난 시간에는 인간 비참의 정체가 궁핍에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궁핍함을 해결하셨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 이 시간에는 거듭남을 통해 그렇게 영생을 부여받은 신자가 왜 이 땅의 유일한 현자가 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 행복을 누리며 사는 진정한 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II.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
영생, 곧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주관적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 아래 두 부류의 사람이 그 단적인 예가 된다.
A. 더 이상 욕망이 없음: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했으나 지각이 있는 자들 중에는 과도한 욕망을 가지지 않고 모든 면에 있어서 자족하는 평안한 마음을 소유한 자들이 있다. 인간 욕망의 무한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결핍을 느끼게 하고 저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한다면 이러한 큰 욕망을 절제하거나 소유하지 않은 자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도 현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자라 말할 수 없다. (예-자신에 대해서 엄격하고 절제력이 있는 자들 대부분이 타인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할 것을 요구하며 인색한 경우가 많다.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반영한 것임)
B. 결핍을 느끼지 못함: 객관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개선되어 살 수 있는 자들인데, 스스로 그 결핍을 느끼지 못하며 사는 자들이다. 이는 마치 탕자가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는데도 타지에서 여전히 쥐엄 열매를 먹고 만족해하며 행복을 느끼는 경우와 동일한 것이다.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결핍이 없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수 있으나 행복은 완전히 주관적인 것일 수 없다. (예-「매슬로우의 욕구단계론」:생물학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사회적 욕구, 자긍심에 대한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 하부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에 상위 욕구 느끼지 않을 수 있듯이 말이다)
III. 영혼의 완전성
이와 같이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 행복을 결정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면 이 행복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참으로 인간되기 위해서는 영생이라는 통로를 통해 영혼이라는 인간 본질 속에 자원을 공급해야 한다. 따라서 행복은 인간의 영혼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영혼의 완전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A. 영혼의 완전성: 하나님처럼 완전한 존재는 아니지만 창조 될 때의 인간 영혼의 본래 상태는 그분을 닮았기에 인간 영혼 됨으로서 충분할 정도로 완전하게 만들어졌으며,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채워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 수 있었고, 아래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만물들을 다스릴 수 있었으며, 옆으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적합한 역할들을 그분의 계획에 따라 인간됨으로 작용하기에 완전한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이러한 영혼의 완전성을 파괴하였다. 즉 영혼에게 주어진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도록 그 힘과 경향성에 손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게 자가 되었고 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우선적인 일은 망가진 영혼이 고쳐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중생인 것이다.
B. 영혼의 두 바램: 사람의 영혼 속에 2가지 바램(인자)을 주심으로써 그분의 창조 의도를 드러내셨다. 이는 신자든 불신자든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며, 이 두 바램에 따라 살 때에만 영혼은 기뻐할 수 있고, 인간은 진정 행복할 수 있게 된다.
1. 목적: 인간 존재로 하여금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나아가게 하는 인자이다. 이는 사람들이 그분의 창조 목적을 향해 살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의도를 볼 수 있으며, 영혼이 그것을 향할 때에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예-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조차도 선을 행하였을 때는 평안함을 느끼지만 악을 행하였을 때에는 모든 평안함을 상실한다. 하나님의 뜻, 그분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인자가 이들에게도 있음을 볼 수 있다)
2. 완성: 영혼이 첫 창조 시 완전함 하에 있었을 때에는 탁월한 지정의를 갖추고 있었으나, 범죄 한 이후로는 그러한 완전함을 상실하게 되었고 너무나 큰 고통들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오랜 시대를 거쳐 다양한 해결책들은 시도하였으나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간의 영혼이 완전함을 찾아가고자 하는 성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혼의 완전함은 중생으로만 가능하며 신자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중생은 이러한 영혼 본래의 완전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나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완전성이 점진적으로 회복되어 가는 것을 성화라 부른다. 따라서 가시적인 자원이 풍족하다고 할지라도 영혼의 완전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IV. 신자: 현자의 길에 들어 선 사람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이미 아는 세상의 유일한 현자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항상 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 지혜로울 때와 어리석을 때: 거듭남을 통해 영생을 공급받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 자원, 그분의 은혜의 공급은 우리의 믿음과 그분을 향한 사랑을 동반하는 순종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 때에만 풍성한 생명과 은혜가 공급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진리를 아는 신자가 왜 불순종의 삶을 선택하는가? 이는 불순종하는 것이 순종하며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는 저들의 어리석은 판단 때문이다. 신자에게 있어서의 불행은 상황 그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피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있다. 따라서 신자의 비참의 정체는 엄밀히 말하면 궁핍이 아니라 지혜의 결핍(어리석음)인 것이다.
B.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의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최상의 존재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의도하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께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행복을 논함에 있어서 그분의 이러한 계획안에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사는 것이 행복을 위한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C.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삶: 나로 하여금 왜 여기에 살게 하시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길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다음의 두 가지 지혜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1. 믿음의 규칙들: 이성으로만 해결하려고 할 때 그 한계성이 있기에 참으로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 2. 생활의 교훈들: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본분과 위치를 지키며 살 때 인간은 참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V. 결론과 적용
교부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이시며, 그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없다고 인정하는 일은 그러한 인식을 한 인간에게 반드시 순종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에 신자는 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어리석은 신자들에게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도로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자리를 이탈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곧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믿음의 규칙들과 생활의 교훈들을 따라 사는 진정한 현자 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00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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