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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따라간사람들] 찰스 그랜디슨 피니

영성묵상훈련 최용우............... 조회 수 2921 추천 수 0 2011.12.17 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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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68&page=63 
찰스 그랜디슨 피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그 '온전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은 남부와 서부를 거쳐 1800년에는 테네시와 켄터키의 서부 개척지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논쟁이 일어나고 국가의 정세가 험악해지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세기 미국은 영국에서 갓 독립된 나라였다. 독립된 나라의 헌법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강조했고, 따라서 종교는 개인의 자유에 속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아예 종교를 버리려했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곳곳에 불법이 성행했다. 불신앙적인 문학이 홍수처럼 범람했으며 종교는 정지상태에다가 교회는 날로 쇠퇴해 갔다. 청교도들이 처음에 아메리카에 상륙한 이래로 기독교가 이처럼 쓰라린 시험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런 시대적인 요청에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영적 대각성을 일으켰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19세기 근대 부흥운동의 아버지’로 불렸던 찰스 그랜디슨 피니이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기존의 가치개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체계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킬 때 새로운 예언자가 등장해서 전통적인 가치를 새롭게 해석해 줌으로서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안토니 윌레스)

어린 시절
‘근대 부흥운동의 아버지’ 찰스 그랜디슨 피니는 1792년 8월 29일, 코네티컷주 리차드 카운티 위런에서 실베스티 피니와 리베커 라이스 피니의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코네티컷 주가 점점 땅이 부족해지고 땅값이 오르자 찰스의 가족은 그곳을 떠나 뉴욕주 오네이다 카운티의 하노버(지금의 커클랜드)에 정착하였다.
피니는 1912년 예일대학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반대를 받자 2년동안 뉴저지에서 교사생활을 거쳐 해밀턴 오네이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8년 뉴욕 아담스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면서 벤저민 라이트 판사의 법률 사무소에 도제로 들어가 일하면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후로 그는 정기적으로 아담스 지방의 법원에서 소송사건을 다루었다.

회심
법률서적에 인용된 성경문구들을 접하면서 성경에 끌리게된 피니는 성경을 읽는 한편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강렬한 내면의 갈등을 겪으며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1821년 10월 10일 자신이 근무하는 법률사무소에서 기도하다가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환상가운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다. “나는 주님의 발 앞에 쓰러져서 나의 영혼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면서 목 메인 소리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다 적시어 놓았다. 갑자기 성령이 나에게 임하셔서 마치 내 몸과 영혼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마치 전류가 내 몸뚱이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 정말 성령은 사랑의 물결이 엄습해 오듯 내게 밀려왔다. 성령의 파도가 계속 밀어닥칠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러한 피니의 회심 체험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과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러지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어느날 아침, 교회 기도회에 참석했을 때 돌연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신비한 모습으로 그를 두루 비추었다. 그는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편에 서서 변론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런 영적체험 후 피니의 복음전도 사역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전도 유망한 변호사직을 사퇴하고 설교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문 앞에 나와 그를 맞으며 건강에 관해서 묻자 “아버지, 전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집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말했다. “들어오너라 찰스. 네가 기도해 주렴.” 이렇게 시작된 기도의 회복은 찰스의 부모님과 여러 남매들을 회심케 하였고, 나아가 그 마을에 신앙의 불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찰스는 세인트 로렌스 장로회의 배려로 신학을 공부하여 1824년 7월1일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50년동안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힘찬 음성을 지닌 그의 설교는 법률적인 경향이 많았다. 그는 마치 배심원들 앞에서 변호를 하듯 명쾌하고 분명한 어조로 그리스도를 위한 변론을 제기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성화를 강조하며 당시의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목회와 개혁활동
부흥사로서 큰 사랑을 받은 피니는 여러해 동안 많은 도시를 순례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제퍼슨 카운티, 세인트 로렌스, 에번즈 밀즈, 앤트 워프, 브라운 빌, 구버너 등지에서 일련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25년에는 웨스턴, 트로이, 유티카, 로움, 오번까지 퍼져 나갔다.
1826년 겨울에서 봄에 이르는 동안 유티카 지방에서 인도한 부흥회에서는 회심한 사람이 3,000명에 달했다. 그는 일단 부흥회를 시작하면 한 도시에서 일년이상 계속 집회를 인도하였다. 뉴욕에서는 7년 동안 대집회를 가졌다. 1831년. 피니가 뉴욕시의 로체스터에 있는 제3장로교회에서 6개월 동안 주도한 부흥회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설교로 10만명이 회심했는데, 그 중에는 그 도시의 지도층 인물들도 꽤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피니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상점의 문을 닫고 술집들은 폐업했다. 극장은 마차 대여소가 되었고 범죄율은 2/3로 감소되었다. 그후 2년 동안 그 도시의 감옥은 실제로 텅텅 비었다고 한다. 로체스터에서의 집회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운동’이라고 불려졌으며, 1831년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각성의 해’였다. 그때 이후로 부흥회는 미국 도시사회의 한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2년, 피니는 뉴욕에 있는 제2장로교회로 옮겼지만, 극단적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측과 사사건건 부딪치다가 1834년 친구들이 그를 위해 특별히 지은 브로드에이 장막교회라는 회중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피니는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다른 목사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형태의 설교를 했으며 개인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해 주었다. 맨 앞줄에 ‘통회의 자리’라는 좌석을 따로 마련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요청할 수 있게 했다. 여자들도 공개적으로 회중 앞에서 간증과 기도를 하게 했으며, 사람들이 울며 부르짖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피니는 부흥회의 준비과정과 기도를 중요시했다. 부흥회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 지역 목사와 평신도를 소집해 기도모임을 조직했다. 그리고 회심한 사람들을 돌보고 훈련시킬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부흥회가 끝난 뒤에는 새로운 회심자들의 가정을 방문해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피니의 ‘새로운 부흥운동’은 반노예운동, 남녀차별철폐, 형무소개혁, 교회내에서의 빈부차별 반대, 금주와 절제운동 등 많은 사회적인 개혁운동을 수반했다.
피니의 부흥운동은 기존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주의 운동이 아니라 기존사회를 성서적인 원리로 변화시키려는 개혁운동이었던 것이다.

장로교와의 갈등
피니의 새로운 방법의 개혁운동에 반대한 코네티컷 주의 아사헬 냇틀튼 목사와 다른 목사들은 정통적인 전통을 고수하려 했다. 반대세력은 피니에 대해 거짓 풍문을 퍼뜨렸으며, 방해공작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온 교회가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반대도 있었다. 피니는 일생을 통하여 많은 반대와 조롱을 받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방해공작이 심할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부흥운동은 더욱 거대한 불길이 되어 거세게 타올랐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약해지고 반면에 그를 지원하는 세력은 강해졌다. 미국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거짓 송사만을 믿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지만 피니의 설교를 듣고 오히려 그의 복음 전하는 일에 협조했다.
1932년 재발성 호흡기질환과 콜레라로 인해 여행을 할 수 없게된 피니는 뉴욕시에 있는 제2장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835년 오하이오에 있는 오벌린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16년 후에는 총장이 되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복음전파 뿐 아니라 성결운동을 펼쳐나가 현대부흥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대학은 죄인들을 회심하게 만들고 성화에 이르게 하고 이것에다 모든 교육적 기능들을 종속시켜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오벌린 대학은 그 후 곧 세계적인 기독교 영향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완전성화는 하나님의 명령
피니는 전통적인 신학의 틀을 버리고 성서로 돌아가서 성서적 기독교를 재건하려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 인간의 책임도 충분히 강조했다. 이런 그의 신학은 성결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그 ‘온전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가 보기에 성령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신자가 복종하기만 하면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힘을 발휘하게 돕는 분이었다. 이것은 회개와 중생과는 다른 것이다. 신자라 하더라도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과 안받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고 주장했다. 즉 성령세례를 받은 이는 죄로부터 벗어나 권능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후 ‘성령세례‘는 미국 성결운동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피니는 일생동안 여러 가지 책과 설교집, 부흥 강연집, 자서전, 그리고 논문들을 썼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신앙부흥운동강의’(1835)로서 부흥운동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교범이다. 또 그의 ‘조직신학강의’(1846)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논하였다. 그가 말하는 성화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하나님처럼 완전함’을 의미했다. 피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하나의 의무이며 이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수준 뿐만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체험을 의미한다. 완전성화는 하나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약속이다.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완전성화는 각 개인의 책임이므로 인간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의 ‘회고록’(1876)은 19세기 전반기의 대부흥운동에 참여했던 그의 남다른 행적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찰스 피니는 19세기 미국 기독교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피니의 중요성이 남북전쟁 당시의 링컨과 비견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서 19세기의 미국 기독교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교회사가들은 그가 평생 회심시킨 사람이 50만명이나 된다고 추산한다. 그의 위대한 공적은 기독교 역사상 결코 허물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사용한 혁신적인 새로운 방법 등은 무디, 빌리 선데이, 빌리 그래엄 등과 같은 후대의 복음 전도자들을 위한 길을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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