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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따라간사람들] 키프리안

영성묵상훈련 오명희 전도사............... 조회 수 2842 추천 수 0 2011.12.17 20: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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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71&page=63 
키프리안

교회를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

64년 네로의 박해로부터 250년에 이르는 시기를 ‘국지적인 박해’의 시기라 한다면 250년에서부터 313년까지의 시기를 ‘전반적인 박해’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박해가 크고 작건 그것은 항상 혹독했지만 데시우스(249-251)황제의 박해는 가장 참혹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멸절코자 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을 배교 시키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며 교회는 분열될 위기까지 처하였다. 이러한 때에 끊임없는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혼신을 쏟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북아프리카의 감독이자 최초의 순교자인 키프리안이다. 그는 3세기 때 서방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였으며, 가톨릭 성직 계급제도의 창시자였다. 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어거스틴을 위시한 많은 신학자와 사상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뛰어난 라틴어로 구성된 65통의 편지가 남아있다.

회심체험
3세기의 가장 위대한 감독이자 교부였던 키프리안은 주후 200년경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한 부유한 이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고관으로서 당시의 유력하고 명망있는 귀족집안이었다. 그는 부모의 신분에 어울리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문학, 수사학, 법률 및 행정능력에 뛰어 났으며 또한 학식과 웅변술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성공적인 수사학 교사이며 변호사로서 부와 명예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원만하고 겸손하였으므로 항상 많은 친구들이 따랐다. 그는 막대한 재산가였고 모든 화려함의 극치 가운데 생활했다. 그러나 키프리안은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당시는 환락과 도덕적 부패로 가득한 사회였다. 이러한 타락한 사회에서 그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한 회의를 느꼈다. 그는 수사학자로서 당시 기독교 법률가인 터툴리안의 저서를 많이 읽었다. 그리고 친구인 장로 캐실리우스의 설교를 자주 들었으며 성서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도 중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246년(46세) 어느 날, 정원에 앉아서 성경을 읽다가 그는 회심체험을 하게 되었다. “하늘에서 오신 성령의 숨결을 통해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현저히 바뀌기 시작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헌신하리라 결단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맹세했다. 자신의 직업과 사회적인 지위를 벗어버리고 고행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매우 소박한 차림새에 검소하게 살면서 오직 성경연구에만 몰두했다. 그의 미덕과 선행은 광범위하게 칭송되었고 곧 장로로 피택될 만큼 신앙적으로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248년, 회심한지 2년만에 그가 굳이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체인 카르타고의 주교로 추대되었다. 그처럼 빠른 시일 안에 주교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로 그가 자신의 고향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때부터 그는 정력을 다하여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문제들을 능력 있고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소화하였다.
키프리안은 동양사람인 터툴리안을 굉장히 존경하여 그를 가리켜 항상 ‘주’(The Master)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웅인 터툴리안 보다 폭넓은 견해와 보다 실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던 사람으로 행정관리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기품 있는 주교로 일했다.

은신처로 피함
그가 주교에 오른지 2년 후인 250년에 로마제국 전역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또다시 일어났다. 황제 데시우스(249-251)는 로마의 옛문화를 재생시키려는 의도로 기독교에 대한 범국제적, 조직적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에게 배교를 목적으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박해는 특히 주교들에게 집중되었다. 지도자를 없애면 기독교를 제압하기가 훨씬 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이 일정한 날에 일제히 지방장관 앞에 나와서 희생제물을 드려야하며 제사드렸다는 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 자는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어 지위와 재산을 박탈당하고 감금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버리고 이방신들 앞에 경배를 드렸다. 반면에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감옥으로 달려가는 성도들도 있었다. 박해와 고통이 더욱 심하였을 때, 권력자들 앞에서 보여준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용기는 정말 명예스럽고 감동적이었다. 양자간의 대결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동시에 순교를 통한 신자들의 영광은 더욱더 높아져갔다.
키프리안은 이 박해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였다. 혹자는 이를 비난하여 당시 순교한 로마교회의 감독 파비안과 그를 비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의 사명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박해는 251년, 데시우스 황제가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함으로서 끝이 났다. 키프리안은 도피생활을 끝내고 카르타고 교회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특히 ‘신앙을 저버렸던 사람들’을 교회로 다시 받아들여 주자는 안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비록 양떼들을 보살핀다는 이유이긴 했으나, 아무튼 핍박이 일어났을 때 도시를 떠나 피신해 있었던 관계로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키프리안은 중간노선을 취하였다. 배교한 크리스챤은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는 노바티안 분파에 반대하였고, 변절자에 대한 용서를 하되 일정기간 동안 참회를 한 후에야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단에서 받은 세례의 무효를 주장하였는데 이 문제로 인해 그는 교황 스테판 1세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키프리안은 출중한 인격과 권위있는 생활태도로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그는 겸손하고 경건하였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사회적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자기의 관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선한 뜻과 충성된 마음으로 가르쳐서 많은 감화를 주었다. 데시우스의 박해가 끝나고 발레리안의 박해가 시작되기까지 약 6년 동안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으며, 또한 교회 정치에 감독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순교의 본보기로 삼음
발레리안의 통치기인 252년, 역병이 카르타고에 번졌을 때 키프리안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힘썼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로마 정부는 이 역병을 기독교인 때문이라고 모함하였다. 드디어 257년 종교적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고, 키프리안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로마의 잡신에게 경배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를 단연 거부하였다.
총독이 물었다. “그대가 키프리안인가? 그대는 우리 로마 신들에게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의 감독으로 일해왔다. 그 일을 재고하라.” 키프리안이 대답했다. “당신의 그러한 요청을 재고하십시오. 이것은 재고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문제입니다.” 총독이 말했다. “로마의 신들과 그들에 대한 신성한 의식을 반대한 신성 모독자인 그대의 생명은 너무 길었다. 그대는 악질적인 범죄의 기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와 사귄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본 법정은 그대를 단 칼에 벨 것을 구형한다. 참수하라!” 키프리안이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키프리안은 즉시 밖으로 끌려나갔으며 수많은 군중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도 그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소리쳤다. 그는 자기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금화 하나를 사형 집행자에게 주고,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리면서 사형집행을 받았다. 키프리안은 영웅적인 권위를 나타내며 258년에 북아프리카 교회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영광스런 순교의 반열에 들어갔다. 그는 심문당할 때나 처형당할 때도 인격의 고매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의 신학은 성경에 대한 법률주의적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또한 터툴리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그와는 달리 신학적인 논쟁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단지 교회가 하나되기를 바랐고 주교들의 권위를 통해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의 글은 여러 개의 결정적인 교리의 근본을 형성했다. 251년 그는 카르타고 종교회의를 소집해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라는 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는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획기적인 저서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한 기관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오직 교회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교회 밖은 어둠과 혼란뿐이며 교회를 떠나서는 성례, 성직, 심지어 성경까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통해 기독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함으로 교회가 필요하다. 모든 주교는 베드로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주교에게 복종해야 한다. 교회를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없다.” 키프리안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교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게 만들었고 주교들은 그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권위를 얻게 되었다.
「배교자들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그는 박해로 인해 배교를 했던 사람들을 다루었는데, 그의 입장은 너무 쉽게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는 엄한 벌이 내려져야 할 것과 아울러 뉘우치는 자들에게는 일정기간을 통해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단자의 세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는, ‘교회 밖에서 행해진 모든 성례전적 행위는 무효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혀 배교한 이들은 이미 성령의 은사를 잃어버린 자들이므로 그들은 성례전적 중재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재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키프리안은 10년 동안 주교로 일하면서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지만 그 시험들을 잘 이겨 나갔다. 또한 교회내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교회정치에 감독제도의 확립을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그는 진정 서방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이며 저술가로서 영광스런 순교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자기 양떼를 열심히 보살폈던 목자로 후대에 기억될 것이다.

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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