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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데살로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375 추천 수 0 2011.12.18 2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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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살전4:13-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54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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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창조절 열 번째 주일,

2011년 11월6일

 

오늘 설교 본문인 살전 4:13-18절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와 내용이 나옵니다. 특히 16절과 17절이 낯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재림과 믿는 자들의 휴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낯설고, 우리에게도 궁금한 게 많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면 지금은 하늘에 계시다는 뜻인데, 그 하늘이 어디일까요? 우주 공간 어디를 가리키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면 어디인가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는데, 흙으로 변했던 원소가 다시 결합해서 사람이 된다는 뜻인가요? 휴거가 실제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몸이 풍선처럼 공중부양을 한다는 뜻인가요?

 

이런 재림 표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한쪽은 그것을 사실적인 진술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구름을 타고 오시고, 자신들도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갈 것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계 전체 교회에서 보면 소수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이상하게도 다수를 차지합니다. 1992년에 한국교회와 사회를 크게 흔들었던 ‘다미선교회’ 추종자들이 대표자들입니다. 다른 한쪽은 재림과 휴거 사상을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성서의 재림 표상을 고대인의 신화로 간주하고 아예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로 지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양쪽 모두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전자에 속한 이들은 문자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동일한 이유로 배척합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근본을 놓치게 될 경우에 이런 일은 흔히 벌어집니다. 이런 잘못을 피하려면 성서본문이 말하려는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재림 지연

 

초기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재림 공동체였습니다. 부할 승천하신 주님이 곧 지상에 다시 오신다는 믿음에 근거한 공동체였습니다. 예수 재림은 복음서와 서신에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 14: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진술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실제로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는지, 말씀하셨다면 무슨 뜻으로 그러셨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메시아 사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초림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면 재림 운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다는 것은 자기 사명의 실패에 대한 토로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승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오늘 우리는 이 부활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이 실패한 게 아니라 승리했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해서 우리가 부활 생명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부활 생명이 이 역사에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역사에서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역사에서 우리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 외롭고, 두려워합니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마른 것처럼 우리의 생명 경험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종말에 실현됩니다. 종말이 오면 그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불완전한 것들이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부분적인 인식이 완전한 인식에 도달할 것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그 종말론적 사건이 바로 예수의 재림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긴박했던지 자신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그들은 재산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몇 년 안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게 분명하다면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사유재산을 소유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결혼할 필요도 없고, 학교에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심정으로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그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상이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던 신자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야 예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모든 게 끝나버린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곧 죽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은 부활 신앙으로 극복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부활신앙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앙은 유대교인들에게도 있었고, 다른 종교에도 부분적으로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의 재림을 맞는 것입니다. 재림이 지연되면서 신자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은 이런 신앙의 근본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이런 신앙적 위기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제시한 논리는 먼저 죽은 자나 나중에 죽은 자나, 또는 여전히 살아있는 자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이 죽은 자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마지막 때 예수의 재림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를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는 자’라고 했습니다. 특히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잔다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메타포로 표현하는 게 최선입니다. 복음서에는 그런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마지막 때를 혼인잔치로, 예수님을 신랑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잔다는 말은 생명이 일시적으로 멈춰있다는 뜻입니다. 표면적인 생명은 물론 죽은 겁니다. 숨도 끊어지고 모든 형체도 먼지가 됩니다. 그런 것만 본다면 사람은 죽음으로 끝장입니다. 그러나 심층적인 생명은 죽은 게 아닙니다. 그 심층적인 생명은 자연적인 생명까지 뛰어넘는 생명입니다.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고유한 생명 사건입니다. 표면적인 생명은 죽지만 심층적인 생명은 죽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 빠진 이들을 가리켜 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자는 자들이나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이나 똑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밤새도록 기도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잠을 잤습니다. 아침밥 먹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밤새 기도한 사람이나 잠을 잔 사람이나 똑같이 밥상 앞에 앉아있습니다. 잠을 잤다고 해서 아침밥을 못 먹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잠에서 깨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도, 즉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과 함께 데리고 오신다는 바울의 설명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16절과 17절에서 유대인들의 고유한 사상인 묵시문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도 잠에서 깬 이들과 더불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말도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재림 시에, 즉 이 세상의 생명 형식이 끝나는 종말에 예수님에게 선취된 부활체로 변화될 것입니다. 먼저 죽은 자나, 나중에 죽은 자나, 여전히 살아있는 자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런 진술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의 연대기적인 시간 개념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기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1년보다 10년이 더 길다고 봅니다. 2011년 다음에는 2012년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시간도 피조물입니다. 시간도 하나님이 허락하는 조건에서만 자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계 안에서만 시간이 절대적이지 그것을 넘어설 때는 상대적입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빛의 속도 안에서만 시간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흐릅니다. 예수 재림은 이 세상이 새롭게 구성되는 사건이며, 순간입니다. 물리적인 빛이 더 이상 절대적인 구성 요소가 되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제 밑으로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그때가 되면 먼저 죽은 자나 나중에 죽은 자나, 여전히 살아있는 자나 시간의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살아 있는 자도 죽은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합니다.

 

삶의 진정성과 영적 각성

 

재림과 휴거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실제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 구절인 살전 4:1-12절을 보십시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1, 12절) 일상의 진정성에 대한 충고입니다. 이런 충고에 이어서 갑자기 재림과 휴거를 언급했습니다. 흐름이 이상해 보입니다. 이상한 게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일상의 진정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재림 신앙을 불안하게 생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재림이 없다면, 죽는 것으로 끝장이라면 삶의 진정성은 확보될 수 없습니다. 서로 위로하라는 18절도 그것을 가리킵니다.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삶의 진정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바울은 재림의 순간이 ‘도둑 같이’ 임한다고 지적하면서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일상의 진정성에 대한 충고입니다. 결국 바울이 전하려는 것은 삶의 진정성이 재림 신앙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재림 신앙의 오해에서 삶의 진정성이 훼손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예수 재림에 대한 영적 각성입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는 이것이 부족했습니다. 영적 각성은 일상의 매너리즘과 대립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대개는 이런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 거기서 벗어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요소가 그런 방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돈, 살림살이, 취미생활, 건강, 정치 등등, 이런 것들이 우리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삶의 구성 요소들입니다. 소위 강남의 잘 나가는 교회의 신자들도 거의 이런 데만 모든 삶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삶의 토대가 되면, 즉 이런 것에 우리가 길들여지면 우리의 영혼은 훼손됩니다. 무뎌집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 각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무리 종교적 열정이 뜨거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진정성, 즉 생명의 진정성을 안고 살기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생명이 질적으로 변화되고 완성될 주의 재림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에, 또한 재림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임한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영혼을 집중시키십시오. 그 사실만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그 사실만이 여러분의 영혼을 실질적으로 깨어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만이 우리에게 삶의 진정성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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