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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3:2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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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58951 |
깨어 있으라!
마가복음 13:24-37, 대림절 첫째 주일, 2011년 11월27일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이 대림절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교회가 대림절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대림절은 사도신경이 말하고 있듯이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때를 기리는 절기입니다. 이 기다림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이고 내용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종말론적 재림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오늘 이 재림공동체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드믑니다. 재림은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폄하합니다. 재림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막연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재림신앙은 현대사회에서 공허한 외침인가요?
마지막 때
마가복음 13장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전쟁과 난리가 일어납니다. 가족끼리 서로 증오합니다. 온갖 환난이 일어나고 거짓 선지자들이 설칩니다. 세상이 거의 막장 수준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내용이 막 13:1-23절에 나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막 13:24절이 시작됩니다. ‘그 때’에 우주가 해체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영광으로 오십니다. 인자는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 나오는 용어인데, 세상 마지막 때 세상을 심판하러 올 분을 가리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인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말의 때에 모든 걸 걸어두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대한 성서의 진술이 오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그것을 세계 파멸로만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두려워하기도 하고, 기분 나빠하기도 합니다. 순수한 사람들은 두려워하겠고, 나름으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분 나빠하겠지요. 그건 오해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마지막 때에 대한 이야기는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입니다. 겉으로는 파괴처럼 묘사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완성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려면 먼저 파괴되어야 하기 때문에 파괴를 말할 뿐입니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직관할 줄만 알면 이해가 가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 형식으로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제한적이고 무상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가까운 사람들끼리 삶을 파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끼리의 경쟁으로 인해서 이 세상은 끊임없는 불화에 휩싸입니다.
이것을 개인의 실존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의 이런 생명형식으로 살아가는 한 파멸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한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좋은 집, 건강,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얼마나 빨리 우리 손에서 사라지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것은 해체되고 파괴됩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태양빛 아래의 이슬처럼 사라집니다. 무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잠간만 생각해보십시오. 개인만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로 일컬어지는 인류 자체의 미래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태양도, 지구도 모두 파멸됩니다. 인류와 그 문명의 미래도 결국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개인과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엄정한 실존입니다. 이것을 꿰뚫어본 묵시문학자들이 마지막 때를 파멸로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지막 때는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파멸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선 완성을 말합니다. 죽음을 넘어선 생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그 마지막 때를 종종 혼인잔치로 비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부이고, 예수님은 신랑입니다. 잔치는 노래와 춤과 떡과 술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요소들입니다. 이 잔치는 생명의 절정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극치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어머니 자궁 안에 들어 있던 태아가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입니다. 산모나 태아가 모두 출산 순간에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희열로 바뀝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재림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믿었습니다.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신부처럼 목마름의 영성으로 그 때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지막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 언제 생명의 절정 순간이 올까요? 우주 전체가 생명의 충만감으로 찰 때가 언제일까요? 막 13:32절에 따르면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심지어 아들(예수)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읽고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니까 핑계를 대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를 모른다는 말은 생명완성이, 즉 구원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창조 사건이 하나님의 고유한 행위였듯이 하나님이 홀로 개입해서 결정할 일입니다. 만약 마지막 때를 계산해낼 수 있다면 그 때는 마지막 때가 아닙니다. 계산이 가능한 사건이라면 시시한 겁니다. 우주물리학자들이 지구의 남은 나이를 45억년으로 계산하지만 그것이 곧 마지막 때는 아닙니다. 그 이전일 수도 있고, 그 이후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개인 운명도 마지막이 50년 후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은 홀로 세상을 창조하고, 홀로 완성하실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에 속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지막 때를 모른다는 복음서 기자의 말은 마지막 때에 이뤄질 생명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각성의 삶
생명 완성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현실 앞에 직면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마가복음은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 말이 33절과 35절과 37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 상황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으로 나가면서 종들과 문지기에게 집을 지킬 권한과 책임을 맡겼습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릅니다. 종들과 문지기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종들과 문지기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주인의 요구는 바르지 못합니다. 아무리 집을 지킬 책임이 있다고 해도 사람이 24시간 깨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혜로운 종이라면 잘 때 자고, 깨어 있을 때 깨어 있으면서 집을 관리할 겁니다. 사람이 피곤하면 어쩔 수 없이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주인의 태도가 공정했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홀연히 일어날 주님의 재림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늘 영적으로 각성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가 제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덧붙였습니다.(37절)
다른 한편으로 본문이 ‘깨어 있으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는 것은 당시 마가 공동체에 깨어 있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지연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재림 신앙을 조롱하는 이들까지 생겼습니다.(벧후 3:3) 베드로는 그들이 ‘자기의 정욕에 따라’ 행하면서 재림신앙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정욕에 따라서 행한다는 것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자기의 욕망에 자극적인 것만을 무조건 추종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삶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그들이 기대하고 있던 예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살 길을 자기 스스로 찾아야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정욕적인 삶입니다. 이런 삶에 치우치면 예수 재림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마가복음이나 베드로후서 시대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자그마치 2천년동안이나 주의 재림이 지체되었습니다. 재림 지연이 만성이 되어서 재림을 실제로 열망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조금 노골적인 예를 드는 걸 용서하십시오. 만약 재림 신앙에 철저하다고 한다면 무리하게 교회당 건축에 열을 내지 않습니다. 곧 주님이 재림하시는 게 분명하다면 큰 재정을 들여서 지은 교회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건축에 몰두한다는 것은 재림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겠지요. 거꾸로 주님이 곧 오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마치 내일 내가 죽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근본적으로 이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주님은 다시 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일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듯이 말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에서 보듯이 지금 당장 모든 일상을 멈추고 재림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일상과의 단절이 아닙니다. 일상에 대한 냉소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상의 상대화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이 오신 다음에는 모든 것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가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세상의 질서가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있을 때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도 모두 내려놓게 됩니다. 여러분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업적도 모두 내려놓게 됩니다. 자신을 첫째라고 생각했던 분들은 좀 억울하게 생각하겠지요. 억울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업적 자체가 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은 실제로 짐이었든지 거꾸로 자랑이었든지 다 상대적인 가치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뚫어보는 삶의 태도가 바로 영적 각성의 한 대목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상의 영성화입니다. 영성화라는 말을 일반적인 말로 바꾸면 생명지향성입니다. 즉 영적 각성은 자신의 일상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이뤄질 생명완성의 시각으로 직면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일상은 분명히 상대적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입니다. 시시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입니다. 여기에 창조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밖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은폐의 방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들으려면 영적인 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있나요? 집을 장만하려고 계획합니까?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까? 그것 자체에만 몰두하지 말고 잠시 멈춰서 그것이 생명완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일상의 계획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여러분의 영혼이 실제로 훼손되는지도 살펴보십시오. 그런 영적 통찰이 곧 깨어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질문하면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대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 한 해도 11달이 다 지나갔습니다. 우리 인생도 한 달만 남겨놓을 순간이 곧 닥칠 것입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런 허무한 삶을 넘어서 생명이 완성될 순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순간이 바로 예수님이 재림할, 오늘 본문에서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한 바로 그 때입니다. 이 말씀이 시시하게 들리시나요? 막연하게 들리시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졸고 있는 겁니다. 졸고 있을 때는 졸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마가복음 기자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한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깨어 있으십시오. 생명의 주인이 오십니다. 마라나타!(고전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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