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갈5:1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자유하신가요?
갈라디아 5:1
*교회 다니는 일, 예수 믿는 일의 결국은 [자유]입니다.
애굽을 나오게하신 것도 [자유]이고, 십계명과 율법도 긍극적으로 [자유]입니다.
구약과 하나님, 신약의 예수께서 펴신 일들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와
개별적인 인간들이 지닌 가치관과 의식으로부터의 [자유]였다면,
3.0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겐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현실 또는 교회와 성도의 삶의 현장은 그렇지 못합니다.
속회공과, 강의, 설교, 하늘 양식 같은 다량의 원고를 한 주 안에 쓰면서 문득
아득해지는 거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물로 받은 [자유]를 보전하거나
누리며 살고 있는가?
여러분도 한 번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2008년 7월 27일 설교 원고입니다.
예수께신 하셨던 비유 하나가 있습니다.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가서 사막을 헤매다 살 곳을 찾지 못하자 옛 집(사람)에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 그 집이 깨끗이 청소되고 정리가 된 것을 확인하고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완전수)을 데리고 와서 살았습니다. 귀신이 나간 그 공간에 새로운 것을 가득 채웠으면 귀신의 귀환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말씀의 뜻이 어떻고 저떻고 할 마음 보다는 이 시대의 기독교적 삶, 예수를 믿는 개개인의 영적인 상태가 이런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많고, 예배당도 무수히 세워지고, 목사도 많고, 예수 이름을 걸고 하는 이러저런 행사가 엄청나지만, 지금 우리들의 영적인 형편은 되레 이전 보다 더 많은 귀신들이 우리의 영혼이나 삶 속에 우글거리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염려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한 무한의 자유를 상실한 채 더 많은 것들에 구속당해서 쩔쩔매며 살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편지로서 비록 짧지만(6장) 매우 중요한 서신입니다. 바울서신들은 대체로 전반부에서는 ‘복음의 진수’를 쓰고 후반부에서는 ‘윤리’를 말하는데, 우리의 본문은 ‘윤리’편에 속합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반대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으로 또 은총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이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바울은 적자(嫡子) 사도가 아니라는 것과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교인들을 선동했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선동에 말려들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것이며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의 복음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faith by love)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義認)를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럼에도 믿음만으로는 불충분하니 천사와 영물을 섬기고 금욕과 유대인의 절기를 준수해야 한다(골로세 교회에서)고 하거나,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갈라디아 교회에서)는 반론이 제기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러한 반론에 대해서 복음을 사수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습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의 문제는 ‘할례’였습니다. 할례를 받고 받지 않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온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직결되기에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얻기 위해서라면 매우 유연한 태도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처럼 처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을 깨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다시 율법의 멍에를 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었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가정교사)으로서 위치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율법으로부터 믿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입니다. “자유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 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로써 바울은 그의 투쟁의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보존(保存)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이 자유는 “악한세대”(갈 1:4)의 현상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입니다. 바로 이런 자유가 갈라디아서 전체를 뚫고 있는 기본 개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믿음으로 얻게 된 결과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요 방향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 안에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은총이 과제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 자유를 굳게 지키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값싼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경험한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요?
첫째는 ‘원시종교’와 그것들의 악한 통치로부터의 해방입니다(1:4, 4:1-10).
둘째로 ‘율법과 죄 아래서의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입니다(2:19, 3:13).
셋째로 ‘죽음’(2:20, 5:25)과 ‘미신’(4:8-10)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넷째로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차별’(3:26-28)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다섯째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모든 해방과 자유는 그리스도에게서 선물로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자유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즉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5:22-23)입니다. 이것은 자유의 기초이며 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유가 9가지 성령의 열매에 들지 않은 것입니다. 자유는 성령의 열매를 아우르는 근본이오 결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바울은 “주는 영이시다.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은총이자 과제라 했습니다. 과제란 다름이 아니라 자유를 보존하고 보전하는 것입니다. 보존(保存)의 사전적 의미는 “잘 지니어 잃지 않도록 함”이고, 보전(保全)은 “보호하여 안전하게 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전하게 해야 할 과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또 실천함으로써 자유를 보호하고 더 나아가서 안전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개신교의 역사가 150년도 되지 않았으니, 기독교 2000년 역사에 비하면 너무 짧습니다. 그래도 세계선교역사에서 한국교회처럼 단숨에 성장한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그 반대보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지만 큰 빌딩이 긴 그림자를 갖듯이 급성장으로 인한 복음의 질적 왜곡이 심합니다. 지금 교회와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 사회의 신망을 야무지게 상실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교권과 권위주의로부터의 자유가 세월과 세상을 따라서 퇴색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성도들과 교회가 또는 목회자들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더 많은 욕망의 노예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합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얼마나 신선하고 바람직하며 소망스럽습니까? 이게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자유를 보전하지 못하고 ‘굳게 서지’ 못한 것입니다.
그 원인을 바울의 말로 하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따르는 것이 성령을 거슬리는 것인데 성령을 말하면서 실상은 육체의 욕망에 메인 것입니다(갈 5:16-21).
자유가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누릴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이 바로 이 자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의 허세와 허영으로부터의 자유, 권세와 그릇된 힘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을 새롭게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놓지 말고 붙들어야겠습니다.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자유 하는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정욕에 종살이하고, 온갖 형식과 교리와 관습, 욕망의 노예가 된 현실을 직시하고 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는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요 목표입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고 그 속에서 살면서도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섬기는 데까지 낮아지는 자유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유인으로 살고 자유는 보전될 것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