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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 번 째 이야기, 사랑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137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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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1:15-1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그 세 번 째 이야기, 사랑
요21:15-17

요즘 사람들은 어떤 걸 <사랑>이라고 하나요? <사랑>를 주제로 이야기해보라면 아마 사람 숫자만큼 다양한 의견과 경험들을 내 놓고 이거라고 할 겁니다. 그 말은, <사랑>이 우리의 호흡만큼 가깝게 경험하고 요구되지만 또 딱히 정의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오죽하면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 하겠어요’하는 유행가 가사가 만들어졌겠어요.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아는 것 같지만 인류가 여태 사랑 타령인 것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나나 여러분이나 사랑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설교 때나 책에서 배우는 사랑은 마치 광산에서 채굴된 것을 제련해서 얻은 순금 같은 사랑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일 뿐, 우리의 현실은 사랑이라고 해도 불순하기 그지없습니다. 불처럼 뜨겁다고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환경이 오염되어 맑은 공기 맑은 물이 귀하듯이 진정 순수한 사랑 그리고 희생적이라고 할 만한 사랑도 귀하기만 합니다. 물론 저 섹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 또는 두 남녀의 사랑을 애틋하게 그린 ‘러브 스토리’ 같은 사랑이 지금도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사랑도 그렇게 덜 이기적이고 덜 탐욕적인 사랑이 될 수는 없을까 그립고 아쉽지 않습니까? 가령 마더 테레사 같은 수녀의 이타적인 사랑으로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정의하기도 어렵고 삶으로 실행하기도 쉽지 않지만 희랍사람들은 그걸 네 단계로 나누어 놓기는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가페’(agape), ‘필리아’(philia), ‘스토르게’(storge), ‘에로스’(eros)입니다. 이런 구분이 뭐 <사랑>에 대한 고정불변의 기준이라는 게 아닙니다. 당시대 사람들은 그래도 이정도 구분은 하고 살았다는 거죠. 헬라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사랑이 이런 거다’해서 내 놓은 거예요. agape는 많이 들으셨으니까, 순수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거룩하고 숭고한 사랑 그래서 신적인 사랑을 말한다는 거 아시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 agape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최고로 높은, 비싼, 가치 있는 사랑이 되는 거죠. 그 다음엔 ‘필리아’(philia)사랑입니다. 이건 뭐냐. 철학을 영어로 필로소피(philosophy)라 하는데, 이 말은 지혜(sophia)와 사랑(philia)의 합성어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 함이다 그런 뜻입니다. 아가페의 경지는 아니지만 다른 종류의 사랑보다는 한층 가치가 있게끔 보이는 게 필리아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은 ‘스토르게’(storge)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좀 더 본능적이고 실제적입니다. 대다수 인간들이 물마시고 밥 먹는 것처럼 일상의 상태로 일으키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은 뭐죠? 예,  ‘에로스’(eros)사랑입니다. 그건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사랑으로서 야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에로틱’한 사랑이 당시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는 어떻습니까? 여전하지 않습니까? 스토르게와 에로스가 사랑의 대표이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랑이 사회와 사람들속에 가득해지면 질수록 기대보다는 실망이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지금 환락가를 없애는 노력들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질 높은 사랑, 헬라사람들이 규정해 놓은 ‘아가페’와 ‘필리아’같은 사랑이 없었어요. 그런 사랑을 위해 인간 자신들이 수고하지 않고 있었어요. 부모자식간의 보호와 기대를 사랑이라고 여기면서 가족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남녀간의 애증과 분노를 사랑이라고 하면서 미움과 결별을 숨 쉬듯 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요한공동체는 기독교 공동체가 지향하고 성취해야 할 사랑의 목표를 제시하게 된 것입니다.      

아가페는 동사 아가파오(agapao)에서, 필리아는 동사 필레오(phileo)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이 agape와 philia를 성격화하였으니 신약성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agape일 것 같은데 실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그렇습니다. 아마도 누구나 제일 먼저 암송하는 성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인데, 여기서 쓰인 사랑은 agape 동사형(egapesen)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agape로 한정되지 않고 ‘필리아’로도 나타난다는 거죠. 요한복음 3장 35 절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agape)한다고 쓰고 5장 20절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philia)하사 …… 합니다. 예수의 사랑이 ‘아가페’(11:5)로 쓰이고 또 ‘필리아’(11:3)로 나타나고 있죠. 다른 예로서 사랑하는 제자(the beloved disciple)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12장 23절에서는 ‘아가페’로 표현되고 20장 2절에서는 ‘필리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아가페’ 사랑과 ‘필리아’ 사랑을 교차해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예수의 사랑을 말할 때 ‘아가페’와 ‘필리아’를 번갈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설교자들 혹은 해석자들이 '아가페'와 '필리아' 사랑을 구별하여 별스럽게 흥분 하면서 설교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가 수난 당하고 죽었습니다. 제자들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한탄만 할 수 없어 디베랴(갈릴리) 바다(호수)에 배를 띄웁니다. 신앙고백을 먼저 한 제자도 베드로였지만 본문에서 고기 잡자고 먼저 제안한 제자 역시 베드로입니다. 그를 따라서 도마, 나다나엘, 요한과 야곱, 그 외 무명의 제자 두 사람이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려 그 밤을 보냈으나 허사였습니다. 새벽 미명에 나타난 예수의 말을 듣고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 바다에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베드로를 위해서 호숫가에 조반이 차려져 있고 부드러운 조반 식사 초대사가 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어라.” 예수는 이어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베드로는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이 ‘아가파오’와 ‘필레오’ 동사입니다. 첫 번과 두 번째 물음에서 예수는 ‘아가파오’ 동사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agapas me)고 묻고 세 번째는 ‘필레오’ 동사로 묻습니다. 세 번의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에서 사용한 사랑은 세 번 모두 ‘필레오’ 동사입니다. 어떤 설교자는 주님의 ‘아가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계속 ‘필리아’ 사랑을 말하니 예수가 세 번째는 같은 ‘필리아’ 사랑으로 질문을 했다고 하며 예수가 필리아 사랑으로 물으니 그 때야 비로소 주님의 뜻을 베드로가 이해하였다는 식의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앞서 알아 본 대로 하면 ‘아가페’ 사랑이나 ‘필리아’ 사랑은 서로 바꾸어서 사용한다고 해서 그 의미가 달라지거나 사랑의 성격의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가페'와 '필리아' 사랑을 엄하게 구별할 이유가 없는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두 말이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은 ‘아가페’와 ‘필리아’ 사랑이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적절하냐’의 문제입니다. 적어도 당시의 기독교 공동체가 지향하는 사랑이 이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로스’나 ‘스토르게’ 사랑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그것은 이것들이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까지 저는 세 번의 설교를 통해 사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실현 된다’ 는 실천요강에 대해서 오늘은 ‘아가페와 필리아처럼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행동요령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대의 기독교공동체 사람들에게 요구된 신앙 강령입니다. 물론 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것은 사실입니다. 너무나 육감적이고 불안한 사랑이 지금도 가득하니까요. 그러나 헬라 사람들이 정의하고, 요한이 사용한 다분히 철학적인 개념인 ‘아가페’와 ‘필리아’를 외우고 설교만 하지 말고 기독교적 사랑의 완성 이라고 할 만한 우리 이야기는 없을까요?

경주에 살던 어떤 관원이 강릉으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동해를 끼고 천리나 먼 길을 관원의 부인도 하인들과 같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집 안에만 있던 여인이 먼 길을 따라 나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일행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서 점심 자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바닷가 병풍처럼 깎아지른 바위 위에는 철쭉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때는 봄이었겠죠. 여인은 그 꽃이 몹시 갖고 싶어졌습니다. 누가 저 꽃을 꺾어 나에게 줄 수 있을까, 여인은 마음속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산등성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고 있던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여인에게로 다가와서는 그녀의 마음을 훤히 알고나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까?

붉은 벼랑가에
잡고 있는 어미소 놓으라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리이다
                        -노인 헌화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경덕왕비의 어머니 수로부인이 남편 순정공을 따라가다가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이게 ‘아가페’나 ‘필리아’사랑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분명 사랑을 노래한 거 아닙니까? 소에게 풀을 뜯기던 노인이 마치 청년처럼 벼랑의 꽃을 꺾어서 여인에게 바친다는 사랑 노래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스토르게’나 ‘에로스’는 아니라는 겁니다.    

파란 바다, 붉은 꽃, 늦은 봄, 환한 대낮에 길고 긴 길을 가는 여인입니다. 사랑의 도구는 이만하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이제 여인에게는 꽃을 꺾어다가 바칠 남자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여인의 사랑은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남자가 노인이라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양식으로 하자면, 에로스적으로 하자면 나이어린 ‘훈남’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스토르게로 한다면 남편인 순정공이어야 합니다. 깎아지른 벼랑을 오르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합니다. 또 있습니다. ‘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다’는 말도 노인과는 영 맞지 않습니다. 노인이 뭘 부끄러워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요. 여인이 사랑의 조건으로 삼는 것도 다른 게 아니라 꽃입니다. 돈도 명예도 부귀도 아닙니다. 달랑 꽃이라는 겁니다. <오주연문>이라는 옛날 책에 “사람이 아름다운 꽃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으뜸 풍류다.  淸福이 있는 사람이라야 능히 꽃을 사랑할 수 있는 복을 누린다.”고 되어 있으니, 여인이 바라는 사랑은 이런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노인은 생리적인 나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도 ‘老兄’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이것은 늙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적으로 높다는 뜻입니다. 知者라고할까 賢者라고나 할까요. 노인이 붙잡고 있던 소는 뭡니까? 짐승이 아니라 현자들이 추구하는 道죠. 진리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에서 소는 재산입니다. 그걸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영욕을 버리고 여인과의 사랑을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랑을 택하겠다는 거예요. 이겁니다. 우리들의 오래된 이야기인 <수로부인 헌화가>에서 차원 높은, 아가페 적이고 필리아 같은 사랑의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사랑이 뭔지를 보여준 예수님의 이야기와 그 비유가 되는 겁니다. 수로부인 같은 이런 여자로 사랑하며 살고, 갈고 닦던 도와 소유와 세속의 영욕을 모두 내던지는 노인 같은 그런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을 불태우는 남자로 사는 게 어떠냐 말입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할 때 그 사랑은 ‘아가페’와 ‘필리아’ 사랑이 맞습니다. 그걸 우리 식대로 정의하자면 ‘수로부인과 노인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랑으로 세상을 정화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과 공동체를 이름하여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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