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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예수는 없다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073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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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8:18-2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그런 예수는 없다  
마8:18-22

*돌 틈바구니에서 기어 나오는 가재처럼 다시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가을 낙엽처럼 내게로 떨어집니다.
  목사로 산다는 게 도대체 뭘까?  

몇 년 전에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판 적이 있습니다. 꼼꼼히 읽긴 했지만 아예 실증적인 예수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믿는 변질된 [그런 예수는 없다 No Such Jesus: Reading the Christianity Inside Out]는 말을 하려는 것 같아서 별로 여러분에게 소개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잘못 믿고 전하는 그런 예수는 없을지라도 예수는 있다는 것이고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교리, 신조와 신학으로 다듬어지고 덧칠해진 예수가 원 예수의 변형이요 조형(造型)이라면 원 예수 즉 나사렛 예수, 역사의 예수를 찾는 사람에게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건 하등 놀라움이 아니죠? 감리교 권사 한 분이 친애하는 후배의 목사 안수 식에 참석을 했답니다. 모든 식순이 끝나고 방금 목사 안수를 받은 후배와 손을 잡고서 “목사님. 예수님을 믿으시오”라고 했다 합니다. 목사 되기 위해서 신학을 전공했고 목회현장에서 목회인턴 기간을 거쳤으며 목사 고시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방금 신앙고백과 함께 선서까지 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목사를 향해서 ‘예수님을 믿으시오’라고 했으니 예삿말이 아닌 것입니다. 금관을 쓴 예수나, 교리와 신조 그리고 교회전통에 갇혔거나 시달려 이지러진 예수가 아니라 그것들 이전의 예수, 그것들의 허위와 의미 없음을 들어내 줄 그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 되기를 바라는 뜻의 당부였을 것입니다.

요즘 서울서 어느 장로교 목사님이 제게 자주 전화를 걸어오십니다. 강변역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오래된(그 목사님 말로는 어느 한 구석에 쑤셔 박힌 듯이 있던)제 책 한 권을 읽은 후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거 같아서 기쁘다면서 말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무렵에도 꽤 긴 시간 목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해석문제도 이야기하고, 산상수훈도 말하고...그러다가 문득 목사님이 그러십니다. “오늘날 교회나 성도들의 삶에 예수가 있기나 한가요?” 그래서 이아침에 저도 여러분에게 다시 물어보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삶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성서공부를 조금만 깊이 하면 갈릴리에서 살고 행동한 예수의 모습이 세월이 흐를수록 달라진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죠. 보통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된 문서이고 그 보다 15년 전후 늦게 기록된 복음서가 마태와 누가복음입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자료로서 사용하면서 예수가 인간 예수보다 신적 예수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이 엿 보입니다. 마가의 예수는 훨씬 인간다운 예수의 모습이라면 마태의 예수는 덜 인간답고 더 신적 예수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가령 마가복음의 예수는 화를 내는데(막 10:13-16) 마태와 누가복음은 화를 내지 않는 예수로 표현합니다(마 19:13-15, 눅 18:15-17).즉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에게 데려 오자 제자들이 그들을 만류하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낸 예수가 훨씬 인간적인데, 마태와 누가는 화를 내는 예수에 대한 언급을 생략함으로써 덜 인간적인 예수상을 그리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마태는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고 변경하여(막 6:5과 마 8:3 비교)예수의 권위 손상을 방지하려고 합니다. 예수가 미쳤다(막 3:21)는 것을 마태와 누가는 생략하고 있죠. 다른 예로서 마가복음의 폭풍진압 기적(4:38)에서 제자들은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를 깨울 때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아보지 않습니까?”라고 부르짖지만, 마태복음의 폭풍진압기적(8:25)에서 제자들은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구원하소서”라고 기원하는 자세로 변경이 되어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 예수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신적 예수가 강화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자(Proclaimer)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저 선포자 예수가 선포(설교)의 대상(The Proclaimed)이 되었고 예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해 되셔요?  

이런 단계에서는 그래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보전되고 실천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해 속의 기독교가 주후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공인을 받자 세상맛을 보게 되면서 본래의 모습에서 굴절되고 세상과의 타협으로 그 세를 확대하고 즐기기 시작합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900명 여인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킨 것을 비롯해서 십자군 전쟁, 성직매매, 면죄부 판매, 지동설 주창자의 처형 등 헤아릴 수 없는 과오들이 예수(하나님)와 성서와 교권의 이름으로 저질러졌습니다. 수도원 제도의 등장이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등이 타락한 기독교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위한 시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나사렛 예수를 다 살아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도 그렇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의 대형화와 고도성장(?) 속에는 복음의 왜곡 내지 복음에서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물량주의, 교권주의, 권위주의, 기능주의, 세속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는 한국의 기독교는 ‘심리학’과 ‘엔터테인먼트’가 그 중심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흐름 속의 예수는 나사렛 예수가 아닙니다. 시인 김지하가 언젠가 말했던 금관을 쓴 예수죠. 이 금관은 예수가 쓴 것이 아니라 그에게 교권과 제도와 교리가 합세하여 씌운 것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고 가난한 자와 소외자들 편에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과 더불어 살던 그 예수는 없는 겁니다. 높아진 예수, 존귀한 예수, 심판의 예수, 거룩 거룩한 의식 속에서 찬양경배 받는 예수, 전통에 갇히고 신조에 꽁꽁 묶인 예수, 그 예수는 있지만 ‘머리 둘 곳이 없다’던 인자 예수는 없다는 말이죠. 예수가 있긴 있는데 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없다고, 있기는 있는 거냐고 묻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 18-22절은 제자의 “따름”을 말합니다. 제자란 스승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두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처음 사람은 제자 집단 밖의 사람으로서 신분이 안정되고 사회의 존경을 받는 사람 즉 서기관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의 답은 고향도 없고 보호막도 없는 처지에 동참할 수 있는가? 고 물으십니다. 그것이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의 뜻입니다. 땅의 인자 예수의 처지는 가련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제자 집단에 속한 자로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떠나게 해 달라’고 청하지만 예수는 거절합니다. 자기를 따르라고 합니다. 이 엄청난 요구에 담긴 뜻은 예수의 삶을 철저하게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련한 처지에 동참하며 세상에서의 예수의 삶을 철저하게 증언하는 것이 예수를 “따름”이요 제자의 길인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자기 부정의 길이죠. “나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마 10:37-38)는 것이며. 누가복음에서는 ‘부모와 처자와 아내를 미워해야(개역) 또는 버려야(새번역)’ 제자가 될 수 있다(눅 14:25-26)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를 따르는 자는 가족의 결속관계를 예수와의 결속보다 앞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열심히 지켜온 부자 청년이 영생의 길을 물었을 때 예수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리고 난 후 나를 따르라 하셨지요?( 마 18:22).

산상설교는 두 건축자의 비유로 마감되는데 그 핵심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 자’의 상반된 운명입니다(7:24-28). 그리고 바로 이 말씀 앞 절(7:21-22)에서 매우 심각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오직 은총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굳게 굳게 믿는 자들에게 심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를 향하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사를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판사는 법률로만 판결한다고 한다는데 이 본문은 하나님의 뜻의 실천으로만 심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의식(세례, 성만찬), 기독교적 전통과 교리신조, 성서통독과 예배참석, 40일 금식과 기도 등을 열거하면서 ‘주여, 주여’ 할지라도 예수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대형성전 안에 수천, 수 만 명이 운집한 교인을 앞세우고 어느 목사가 ‘주여, 주여, 보소서’ 할 때도 예수는 여전히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만을 묻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 25:31-46). 오늘의 교회들이 진정 예수를 따르고 그 말씀을 살아내는가요? 성공한 목회자는 많지만 ‘예수처럼 사는 목회자’는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자랑 삼아(?)말할 수 있는 그 어느 누구를 자신 있게 ‘예수처럼 사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여기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나사렛 예수‘의 삶을 흠모하고 그 삶을 살아내는 회개운동이 절실하다 할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사신 예수가 없다는 것은 그 예수를 살아내는 제자들이 없어서입니다. 그 좁은 길 따르는 교회가 없어서 ‘예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이지 예수가 없을 리 없습니다. 예수는 있습니다. 물론 나사렛 예수, 역사의 예수가 지금 지구촌 어디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그는 이미 하늘로 올림을 받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죠. 예수가 있다는 것은 그의 부재(不在) 중의 예수의 현존인 성령 보혜사 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는 예수의 환생(還生)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도 되겠지요. 여하간 예수는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야만 보혜사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다고 하셨어요. 예수가 없는 지금 예수의 자리에 계신 분이 보혜사 입니다. 그리고 그 보혜사 성령은 나사렛 예수가 살고 가르친 것을 제자들에게 회상하게 하고 그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있다는 것은 그의 말씀 따라서 오늘에도 예수를 살아내는 예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는 이제 예수의 사람으로 인하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교인들을 보고서는 예수가 있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 교회 밖의 사람들도, 저 옛날 옛적에 성 프랜시스코를 보고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20세기 성녀(聖女) 마더 테레사 수녀를 보고는 예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우리 교회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들이 자랑스럽게 ‘내 속에 또는 우리 안에’ 예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게 잘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좋은 교회입니다. 공동체 밖의 사람들이 또한 ‘저 사람 속에 또는 저 교회 속에 예수가 있다’고 말하게 된다면 얼마나 뿌듯할까요? 예수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예수 없다’소리 듣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나도 그런 목사가 되고 싶은 겁니다. 성공한 목사 말고 ‘예수처럼 살았던 목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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