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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0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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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남과 다른 生을 사는 사람
시103:3-9
*감리교 총회를 다녀와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습니다.
'이런 게 신앙의 현실'인가 싶어서 입니다.
그것은 해석의 진보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큽니다.
[감사]라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해석을 컨텀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에 교우들의 평안을 기도합니다.
누군가 병을 고쳐 주고, 생명을 지켜 줬다면 그것만큼 고마운 일이 없을 겁니다. 빚을 갚아주고, 꼬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그것만큼 감사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외부로부터 공여된 그 무엇으로 인하여 내가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유익을 얻었을 때 일어나는 순박한 반응을 우리는 [감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감사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만 생겨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예배를 하나님께 올리면서 교우들이 고백하는 것과 같은, ‘그렇지 않은 경우’ 즉 병이 고쳐지지도 않았고,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도 않았고,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 것도 없지만 [감사]하는 경우는 순전히 자신의 내부에서, 조건과는 무관하게 생겨나는 창조성에 기인하는 높은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경우의 [감사]가 그러함에도 그 귀속(歸趨)은 [나]에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그것은 [나]자신에게 속하게 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래보았자 모두 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감사는 어떤 것일까요? 2천년 동안 달래듯 어르듯 지켜 내려온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새로운 문법으로서의 [감사]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게 직접적인 유익이 아님은 물론 이려니와,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따라 그 어떤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런 감사 말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는 그와 같은 감사에 나아가야 한다는 게 저의 기도입니다. 전통적으로 말하는 우리의 감사란 이기적이고 편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문법으로서의 감사는 무엇일까요? 편향되지 않은, 이기적이지 않은, 나와 무관하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감사는 뭘 말하는 것일까요?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레이닝 스톤>(Raining Stones)이라는 영화를 통하여 그 의식 전환의 실마리를 열어 보겠습니다. 이 영화는 작은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 작은 시선으로 기존의 가치와 편견을 전환하는 혁명적 발상이 돋보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영국의 한 도시입니다. 밥(Bob)은 부인과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실직한 40대입니다. 그는 카톨릭 신자인데, 딸 콜린이 7살이 되어 처음으로 성찬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성찬식에는 드레스를 입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 드레스 비용이 꽤 비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전에 입었던 것을 빌려 입으면 비용은 전혀 들지 않지만, 밥은 자기 예쁜 딸에게 평생 한번뿐인 그 성찬식에 헌옷을 입히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드레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밥은 별의 별 일을 다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업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변변한 것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다 비정상적이거나 위험한 일들입니다. 이를테면, 남의 목장의 양을 훔쳐다가 정육점에 판다거나, 보수당 당사에 가서 잔디를 몰래 뜯어다가 다른 곳에 가서 판다거나, 마약 판매와 격투가 난무하는 나이트클럽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 등등이었습니다. 눈물 나는 노력을 해보지만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아내 몰래 대출회사에서 돈을 빌리게 됩니다. 이 돈을 제때에 갚지 못하게 되자, 대출회사는 텐시라는 악당에게 돈 받는 권한을 넘겨줍니다. 텐시는, 마약을 팔고, 빚진 돈을 폭력과 협박으로 받아내는, 아주 악질 고리대금업자입니다. 그는 밥이 없는 사이에 밥의 집을 찾아와서 밥의 아내에게 온갖 횡포를 부리고, 돈을 갚지 않으면 딸도 밥의 아내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고 돌아갑니다.
돌아와서 이 장면을 본 밥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스패너를 품에 숨겨서 텐시를 찾아갑니다. 한 술집 지하 주차장에서 밥은 술 취한 텐시와 격투를 벌입니다. 텐시는 능숙한 솜씨로 밥을 때려눕히고 차를 타고 가려고 하는데, 밥은 엉겁결에 텐시의 차 앞 유리창을 스패너로 내리치고, 그 바람에 텐시는 지하실 기둥에다 차를 박고 즉사하게 됩니다. 밥은 애초에 텐시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우연하게 일이 이렇게 커진 것입니다. 밥은 텐시의 옷에서 빚진 사람들 명부를 꺼낸 다음 그곳을 빠져나옵니다.
밥은 신부를 찾아갑니다. 그는 무슨 일인지 묻는 신부 앞에서 흐느껴 울면서 일어난 일들을 다 설명합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밥은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저 신부에게 부탁은 자기 아내가 경찰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듣지 않고 신부에게서 듣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는 정색을 하고 밥에게 말합니다. 자기에게 이미 찾아온 이상 경찰서에 갈 필요는 없다고. 텐시는 악당이고 그 사람이 죽은 것은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합니다. 신부는 밥이 가져온 빚진 사람들 명부를 그 자리에서 불에 태워버리고, 밥에게 그 일을 자기들 둘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지금 고해성사를 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밥은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합니다.
다음날 밥은 딸의 성찬식에 참석하고, 친구로부터 악덕 고리대금업자 텐시가 만취 상태에서 운전하다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영화 속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신부의 처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그런 행동은 윤리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밥이 선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신부를 찾아와서 사실을 털어놓을 때 밥은 흐느끼면서 말합니다. 자기는 이때까지 신자로서 착하게 살아왔다고, 바르게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해왔다고. 신부는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 어깨를 두드려줍니다. 밥은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별의 별 일을 다 했습니다. 일의 발단이 된 것은 자기 형편에는 맞지 않는 비싼 드레스를 무리를 해서 사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뿐인 예쁜 딸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허영이라고 몰아 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부잣집 아빠라면 드레스를 빌려 입혀도 꿀리는 것이 없을 것이지만, 가난한 실업자이기에 더더욱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최소한의 아빠 노릇이라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그 드레스 값 110파운드(약 30만 원)가 그렇게 별의 별 짓을 다 해도 벌 수 없는 것이었을 때 그의 좌절감은 어떠했겠어요. 그를 달래면서 그의 장인은 노동자들에게는 일주일 내내 “돌들이 비처럼 내린다”(raining stones)고 넋두리를 합니다. 돌들이 하늘에서 우박처럼 쏟아져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런 고난의 현실, 그런 진퇴양난의 현실을 ‘레이닝 스톤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밥이 선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선 모든 도덕적 물음이 일시적이나마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성찬식 때 비싼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종교는 그가 따라갈 수 없는 사치일 뿐입니다. 아무리 노동부 사무소에 구직신청서를 내도 일거리가 없는 그에게 왜 일하지 않느냐거나 왜 성실하지 않느냐는 물음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아내와 딸을 협박하고 마수를 들이대는 그 악당에게 스패너를 휘두르는 것은 그에게는 마지막 생존의 몸부림인지도 모릅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들을 피해보려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 자리, 모든 도덕적, 종교적 물음들이 일시적이나마 정지되고 무의미해지는 자리, 바로 그 자리를 감독은 ‘레이닝 스톤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는 밥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대신에 벽장에서 포도주를 꺼내어 한 잔 따라줍니다. 그의 고해성사를 받아주고 그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음을 선언합니다. 밥에게 그 신부가 준 포도주는 진정한 의미의 성찬이었을 것입니다. 밥의 눈물과 담배연기로 얼룩지고 빚진 사람 명부를 태워버린 연기가 자욱한 그 어두운 방에서, 밥이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드리는 모습은 그 어떤 성당에서의 고해성사보다도 거룩해보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밥이 구원받는 자리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바로 그 성찬식과 고해성사를 집행하는 신부야말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처럼 내리는 돌들, ‘레이닝 스톤즈’ 아래에서 어디에도 희망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 신부는 그렇게 밥과 함께 서 있음으로써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 자리에 나설 수 있는 삶, 그것이야 말로 기독교 역사 2천년의 자기중심성을 뛰쳐나가 새로운 문법을 짓는 현장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가 실현해야 할 차원 높은 감사입니다. 지금은 이게 필요한 시대아닙니까? 이런 창조적인 감사를 요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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