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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들처럼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88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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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3:21-3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나도 그들처럼
요13:21-30
                 *영화 [회상]을 통해 가룟 유다의 길을 교훈 받은 후에
                  설교를 시작할겁니다.

지난 주일에 홍천에서 엠마오 가는 길 28기가 있었습니다. 37명의 남자 교우들이 깊은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저는 영성 디렉터로 섬겼고, 조은구 장로님은 평신도 부디렉터로, 임규현 장로님과 최원천 집사님, 황재원 교우는 팀맴버로, 그 외 많은 교우들이 비하인드에서 몸으로 기도로 도왔습니다. 이런 섬김 때문에 은혜 또한 각별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수도 없이 본 [회상]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것은 엠마오 가는 길 프로그램의 첫 번째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있었던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거기서 가룟인 유다는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눅22:3절에 보면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했고 또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가룟 유다 안에 들어가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유다가 '사탄의 도구'로 쓰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 유다가 그렇게 변했을까요? 그도 한때는 주님의 신뢰와 총애를 받던 앞길이 유망한 제자였습니다. 돈주머니를 책임 맡아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보기도 했던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게 사람이 변한 걸까요?

요한은 그가 주님께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요12장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주님께 값비싼 나드 향유를 부었던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당시 일용노동자의 1년 벌이에 해당하는 값어치의 귀한 나드 향유를 주님의 발에다 쏟아 붓습니다. 그리고 말이 아닌 몸의 언어로 자기 신체 부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쳐서는 주님의 가장 낮은 신체 부위인 발을 정성껏 닦습니다. 그건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전 재산과 전신을 동원한 전인적 사랑과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 행위는 엄청나게 많은 말을 품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기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몸으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런 마리아의 마음을 알기에 주님 또한 일절 입을 열지 않고 그저 생체 반응으로 온몸으로 깊숙이 그녀의 헌신을 받아들이고 느낄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보십니까? 보기에 따라서 한없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기이할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참 아름답다'며 감동할 수도 있고 '무슨 저런 일을 하는가'고 황당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것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돌발적 행동에 제동을 걸면서 비난의 포문을 엽니다. 그 장면이 가룟 유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정서적 요소는 분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향유를 주님께 쏟아 부은 마리아와 그러한 마리아의 행위를 용납하는 주님을 한꺼번에 비난합니다. "도대체 뭐하는 짓들인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이렇게 쓸데없이 쏟아 허비하는건가..." 그 비난의 요지는 300 데나리온을 상회할 정도로 비싼 그 향유를 왜 그렇게 허비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팔아 얻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억지 논리가 아닙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명분있는 진술입니다. 상식을 존중하는 평균치의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할 만합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실용적 준거에 따른 합리적 판단 하에서는 꾸중 받고 비난받아 마땅할 처신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라는 이 도덕적 대의와 명분 앞에 누가 감히 반기를 들고 공공연히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가룟 유다의 일갈에 통쾌해 하고 머리를 끄떡이며 동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를 위시해서 당신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을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그 여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여인의 행동이 '마음 중심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일'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녀가 주님께 드린 것은 넉넉하거나 남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가난을 일상으로 살아온 자가 드리는 순결한 사랑 행위였습니다. 어렵게 오랜 기간 동안 모아온 것을 주님께 아낌없이 드린 겁니다. 그러므로 그 향유는 물질적 가치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두고 가난한 자의 구제라는 도덕적 의무 운운하는 것은 주님이 볼 때 그 향유의 물질적 가치에만 눈이 먼 자가 내뱉는 편협한 소견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헌신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누가 감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 또한 이제 곧 십자가의 길을 가야할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분이 받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 한 주 후면 마지막 남은 그 몸뚱아리마저 내어주려고 골고다를 향해 갈 참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 속에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그녀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가난한 자의 구제'라는 도덕적 명분을 들이댄 것이 경우가 맞는 처사입니까? 너무 잔인한 거 아닙니까? 주님처럼 가난한 자를 위해 살아온 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유일하게 맛보는 그 유일한 누림의 순간에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를 언급하는 것은 결코 적절한 주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그 향유는 주님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실 것을 미리 내다보는 마리아가 마지막 가시는 주님에게 드리는 사랑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을 것이므로 너희들이 그렇게 원통하면 너희들의 옥합을 깨뜨려 그들을 도우라'는 겁니다. 자기는 안하는 그걸 왜 이 여인에게 강요하느냐는 겁니다.

과연 이 주님의 말씀에 가룟 유다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가 주님의 이 말씀에 어떤 직접적인 반응을 보였는지를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유월절 전날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의 유다를 요한은 2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이걸 보면 유다는 주님의 말씀을 선히 받질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주님의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너는 왜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차원 높은 삶의 누림을 위해 나드 향유 같은 걸 바치지도 못하면서 저급한 감상적 유희의 차원에서 정신적 영적 가치를 남발하느냐"는 질책으로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주님의 그 말씀이 사람들 앞에 자기를 '멋진 순간에 찬물을 끼얹고 심통스럽게 투기를 일삼는 자처럼 만들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망신과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대신 사탄이 그에게 친구가 되어갑니다. 가룟유다의 이런 변화의 과정을 백무산의 시는 잘 설명해 줍니다.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 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 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 졌습니다.  
            백무산 '나도 그들처럼'전문

그렇습니다. 그는 [믿음]을 버리고 [삶]을 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여인은 삶을 던져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게 가룟 유다의 실수입니다. 신앙은 삶을 써서 믿음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을 이용하여 삶을 도모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다의 변질을 주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먼저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이건 대단히 의미심장한 행동입니다. 며칠 전 유다는 한 여인으로부터 발 씻김을 받던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그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유대 사회에서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의 그 더러운 발을 씻기십니다.

이 정도면 마음이 울컥해야지요. 한마디로 감동을 먹어야지요. 그러나 오히려 베드로는 울컥하는데 유다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겁니다. 그런 유다를 향해 주님은 '너희가 발만 씻어도 될 만큼 깨끗하나 전부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를 향한 또 한번의 도전입니다. 그에게 계속해서 씻고 돌아설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발을 씻기듯 서로 이렇게 섬기라'고 당부하면서 '제자 중 하나가 당신께 발꿈치를 들 것'이라고, 곧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지속적인 두드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꿈쩍도 안합니다. 그런 유다에게 주님은 마지막으로 '영접'이라는 단어를 말씀하십니다. 영접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나 유다에겐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해하셨다"고 전해줍니다. 이 말은 몹시 번민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장하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드러내어 말씀하십니다. 여기 '증거했다'는 말은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분위기는 일순간에 경직되고 팽팽한 긴장이 흐릅니다. 베드로는 요한에게 눈짓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묻게 하고 주님은 '그게 누구냐'는 요한의 질문에 '내가 빵 한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건네주는 자가 그'라고 말씀하시며 곧 빵 한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가룟 유다에게 건네줍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가룟 유다의 배신이 밝혀지는 만찬 자리를 아주 느리게 보여줍니다. 왜 주님이 물을 떠다 제자들을 씻기셨습니까? 그건 가룟 유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촉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어떻게 주님이 제 발을 씻느냐'고 말해야 할 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가룟 유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기회를 흘려보내고 맙니다. 그 세족식 끝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는 말씀 또한 그를 깨우치는 말씀이었지만 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발을 씻기신 후 우리 표현으로 옮기면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격언을 인용하며 또 한번 유다의 배신을 암시했을 때 알아듣고 얼른 주님 앞에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했어야지요. 그러나 이미 사탄에게 마음을 사로잡힌 유다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주님은 괴로워하시며 사건의 전말을 말씀하시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유다는 당신의 몸과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찍은 빵'을 그에게 건네면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주님을 등지고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참 안타깝고 아쉬운 장면입니다. 그는 밖으로 뛰쳐나갈 게 아니라 자기에게 건네진 그 포도주 찍힌 빵을 먹었어야 했습니다. 그걸 먹어 사탄을 내어 쫓았어야지요. 그러나 그는 주님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사탄을 선택합니다. 요한은 30절에서 그 결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주님과 제자 공동체를 떠난 유다를 기다리는 것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빵을 팽개치고 빛의 자리를 등지고 캄캄한 어둠 속에 뛰어들어 결국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사망의 자리에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주님은 가룟 유다를 홀로 조용히 불러서 그를 타이르지 않으셨을까? 과연 주님이 그를 불러 조근조근 타일렀다면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을까? 복음서가 보여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이란 상대방을 코를 꿰듯이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을 존중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은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하시면서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설득이 아니라 결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결단이 있어야지 설득하고 타이르고 설득해봐야 또 재탕 삼탕 반복하는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자신을 주장하는 사탄을 스스로 내어쫓지 아니하면 그는 결국 사탄에 휘둘리는 인생이 되고 말고 신앙 공동체를 등지고 인생의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마는 겁니다.

교우 여러분! 사탄은 우리를 휘두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흐릿한 사람은 휘두르려 하지도 않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똑똑하고 명분과 논리가 분명한 자를 노립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열심있고 누구보다도 내 신앙이 낫다고 생각하는 자를 노립니다. 주님의 12제자 중에 열심으로 치면 베드로를 따라갈 자가 없고 똑똑함으로 치면 가룟 유다를 좇아갈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신앙의 대사도 바울은 권면하는 겁니다. 한때 사탄의 길들이기에 빠져 혼쭐이 났던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편지 5:8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믿음이란 주님을 향한 전적 신뢰요 주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설령 주님이 나를 해롭게 하고 심지어 나를 죽인다 해도 마리아처럼, 이삭처럼, 주님처럼 그것조차도 수용하는 게 믿음입니다. 창15: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것을 그의 의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게 아니라 '그런 약속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게 참 믿음입니다. 이들은 모두 삶으로 믿음을 키운 사람들입니다.

참된 신앙은 삶을 거름으로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은 믿음으로 삶을 살찌우려 합니다. 그게 가룟 유다의 문제였습니다. 이때부터 귀가 닫히고 눈이 멀고 감각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떠났고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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