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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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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예수 탄신 2008주년
눅 2:1-7
2008.12.25
이 천 여 년 전,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참 특별한,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온 세계가 호적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동네로 갔다”(눅 2:1-3).
이스라엘에서 호적등록 즉 인구조사는 군대를 징집하고 세금을 거둘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갖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시도했을 때도 성경은 ‘다윗이 사탄에 의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라고 혹평을 하고 있습니다(대상 21:1). 열심당의 원조라고 하는 갈릴리 유다의 봉기도 인구조사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입니다(행 5:37).
그런데 백성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인구조사를 더욱이 자기 나라 왕도 아닌, 식민지배를 하는 로마 황제의 칙령으로, 시리아 총독이 시행했으니, 그에 대한 반감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죠. “온 세계”가 했다는 것이나, “모든 사람”이 다 참여했다는 데서 그것이 상당히 강압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때의 인구조사는 요즘의 그것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적등록을 하려면 저마다 자기의 출신 지역으로 가야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던 요셉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없으므로 걸어서 가야 했고 그것은 사흘 길은 족히 되는 먼 길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의 약혼자 마리아가 임신 중이었고, 해산할 날이 임박한 상태인 것입니다(6절).
그렇게 무리한 걸음을 강행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황제의 칙령이든 총독의 시행령이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강압적으로 내려졌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라면 해야지, 식민지 백성들에게 무슨 판단이나 거부의 권리가 있겠어요. 요셉은 어쩔 수가 없어서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가면서도 속으로는 길에서 아이를 낳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한 일은 현실로 닥치고 말았습니다. 아직 몸을 누일 방도 구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마리아에게서 산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이리저리 방을 구해 보았지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7절).
이 대목에서 흔히 우리는 오늘날의 여관이나 여인숙을 떠올리면서 그런 곳에 남은 방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환락을 즐긴 것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관(katalyma)”이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여관이나 여인숙과는 좀 다른 의미입니다. 그것은 보통 가정집의 사랑방 또는 객실을 의미합니다(막 14:14 참조). 주석가들은, 그 당시에는 오늘날의 여관이나 여인숙 같은 것은 베들레헴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방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여관 객실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문을 굳게 걸어 잠근 가정 가정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첫 번째 크리스마스 전날 밤인 그날 밤에 베들레헴에 비어 있는 사랑방이 하나도 없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낯선 나그네를, 더욱이 만삭이 된 여자를 맞이할, 마음의 방이 굳게 잠겨 있었던 것입니다.
식민 통치자의 강압을 못 이겨서 억지 걸음을 한 그들, 자기 고향에 와서도 아이를 낳을 방 하나를 빌리지 못한 그들, 이젠 지친 몸 잠시 기댈 방도 하나 구하지 못한 그들에게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습니다.
8절부터 이 이야기의 무대가 바뀌고 분위기도 바뀝니다. 들에서 밤을 새우면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주의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 탄생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적이다”(11-12절).
이것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들에서 밤을 지새우던 목자들에게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동방박사들처럼 배운 사람들도 아니고, 아기 예수를 경배하여 메시아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도 아니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릴 만큼 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바로 그리스도요 표적이라는 기쁜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들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가 어떻게 메시아의 표적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는 로마 황제가 주님으로 높임을 받는 로마의 식민통치 하에서, 그런 높은 보좌 위에 있는 황제가 아니라, 저 낮은 구유 위에 있는 아기가 그리스도라는 소식 자체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로마 황제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평화롭고 순한 아기가 메시아라는 소식은 그들에게는 진정한 평화를 주는 소식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는 천사들의 외침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것은 무력으로 약자를 진압한 뒤에 누리는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가 아닙니다. 메시야께서 저 높은 왕궁에 오지 않으시고, 들에서 밤을 지새우는 자신들처럼, 마구간 말구유 위에 오신 것을 보게 된 순간에 느끼는 평화입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나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천사에게 들은 것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화가들이 그린 크리스마스 그림에는 아기 예수에게서 빛이 환하게 나는 그림들이 많습니다. 마태복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는 태어난 곳이 마굿간이라는 말도 없고, 동방박사들이 와서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다고 되어 있어서 더욱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상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아니라 들에서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마리아와 요셉에게 그 아기가 그리스도요 표적이라는 천사의 말을 전해 주었다지만 마리아와 요셉이 그것을 그대로 깨달았는지도 의문입니다.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신앙의 눈으로 보고 깨달은 것일 것입니다. 지금 방도 구하지 못해서 추운 바깥 어느 곳에서 자기의 귀한 첫아들을 구유에 눕혀야 하는 마리아는 실제로는 그저 기뻐하거나 들뜰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많이 자란 다음에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몰랐던 듯합니다(눅 2:50). 그런데 어떻게, 아기 예수가 태어난 당시에,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리스도가 오시는 표적이라고 확신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니, 마리아와 요셉이 맞이한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들뜬 날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크리스마스입니다. 누가복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그 일이 있은 지 팔십여 년이 지난 다음에, 그 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누가 기자가 기록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누가 기자는 그 옛날의 기억을 그의 복음서에 옮기고 있는 것일까요?
초대교회 시절에, 교회가 커지고 제도화되어 가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도 커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작은 사람들과 함께 하며 십자가를 지기까지 그들을 사랑한 예수보다는, 하늘로 올라간 예수, 영광의 예수만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에게서 몸은 잠시 빌려 입은 껍데기 같은 것이요 중요한 것은 그의 영이라고 하면서, 몸을 천시하고, 영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변질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엔 “예수는 누구인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는가?” 하는 물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때 그들이 맨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기억입니다. 그들은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사람들이 그렇게 높이는 예수는, 화려하고 높은 왕궁의 보좌에 온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어느 구유에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누군가가 보살펴 주지 않으면 잠시도 살 수 없는 갓난아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기가 자라서 그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들과 함께 청년기를 보냈으며, 그들을 사랑하였으며, 마침내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형을 당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난 뒤로 이전에 느끼지 못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묻혔지만, 뭔가 알 수 없는 기쁨이 그들에게 넘쳤습니다. 그 뒤로부터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해 오고 있으며,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 돌보고 섬기며, 복을 빌어주며, 먼 곳까지 찾아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들은 그 기쁨의 근원이, 저 높은 곳에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어떤 존재나, 사람들에게 어떤 신비한 체험을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인 실체가 아니라,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세상에 처음 태어나자마자 구유에 눕혀져야 했던 아기 예수임을 알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그 안타까운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기억임을 알았습니다. 늘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사랑한 예수, 마침내 십자가형을 당하기까지 하면서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한 예수임을 알았습니다. 그 예수를 잊지 못해서, 그 예수가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들이 한 일이 너무나 죄스러워서, 그들은 한시도 그를 잊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춥고 쓸쓸했을지도 모르는, 요셉과 마리아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을 구하려고 쓸쓸한 베들레헴의 밤거리를 헤매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따뜻한 방으로 맞이하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속에서 치밀어 올라, 오늘 우리 곁의 작은 사람들, 소외된 이웃을 찾아서, 가진 것을 나누고, 성탄을 축하하고 복을 빌어준다면, 나그네를 혼자 두지 않고 더불어서 기뻐한다면, 분명 그들 가운데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렇게 태어나 기쁨이 된 아기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2008번째로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기쁨이 오늘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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