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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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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출애굽 그리고 出 성암
출1:1-14
지난 토요일(2009/1/17)경향 신문에 우리교회에서 저와 같이 목회 하던 고진하 목사님의 글이 실렸습니다. 고목사님은 그 신문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번 글의 제목은 ‘고통에서 날개가 돋다’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매섭다. 오랜만에 찾아간 매지 호수도 꽁꽁 얼어붙었다. 한참을 걷다가 호수 둑에 잠시 앉아서 쉰다. 호수 가운데는 청둥오리 몇 마리가 둥둥 떠 있다. 호수 전체가 거의 얼어붙었는데, 오리들이 떠 있는 그 부분만 얼음이 없다. 어떻게 저 부분만 얼음이 잡히지 않았을까.’
매지 호수 건너편에서 매운탕 집을 하는 사내의 말에 의하면, 추운 겨울밤이면 호수 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쿵쿵 들린답니다. 그래서 그 사내가 어느 밤중에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잠을 깨서 밖으로 나와서 컴컴한 밤하늘을 쳐다보았더니 호수위에서 검은 물체가 낙하하면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게 뭔지 아시겠어요? 청둥오리들이 제 온몸을 던져서 두꺼운 얼음을 미리 깨 놓은 것입니다. 호수가 얼어붙으면 먹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글의 제목이 ‘고통에서 날개가 돋다’입니다.
저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를 벗어던지고 떠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모세라는 한 사람의 영웅적인 삶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것과, 편안하게 거저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고통 중에 얻은 날개’가 아닙니까? 생명의 날개를 달려면 자기 몸을 던지는 고통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벗어나려면 우리 모두 온 몸을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모세를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상세하게,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그의 동족을 바로 왕으로부터 구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을 때, 그는 번번이 자기가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면서 뒤로 물러섭니다(3:11; 4:1, 10). 뿐만 아니라 일을 하다가 동족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하나님께 노골적인 불평까지 늘어놓습니다(5:22-23). 못하겠다는 이유도 여러 가지였죠. 어떻게 자기가 감히 바로 앞에 설 수 있느냐고 하기도 하고, 동족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도 하고, 동족들이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이름을 물으면 어쩌냐고 하고, 자신은 말재주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그와 함께 있겠다면서 격려하기도 하고, 기적을 보여주기도 하고, 말 잘하는 아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기까지 하시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하십니다. 모세가 위대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그를 쓰시기 때문이지, 그의 능력이 뛰어나거나, 그가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서가 아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들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 모세, 그리고 히브리 백성으로 이어지는 수직관계 속에서 모세를 봅니다. 이런 수직관계에서 볼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히브리 백성을 인도한 지도자,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아서 전달한 예언자로서 모세의 위대한 모습만 부각됩니다. 출애굽은 영웅적 지도자 모세의 업적이고, 그밖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면서 불평이나 늘어놓는 존재들이 됩니다. 과연 이것이 성서가 그리는 출애굽의 진상일까요?
출애굽의 진상을 바로 알려면 모세를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바로의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히브리 노예들, 그들의 조상들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들을 그 압제로부터 구하려고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세의 삼각관계에서 보아야 합니다. 모세를 유일신론의 창시자로 보거나 서구 문화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보지 못하고, 그를 어떤 고고한 철학자나 창의적 사상가 또는 위대한 영웅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한 번도 사적으로 은밀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용기를 내어 바로에게 가기까지, 하나님은 세 번 그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3:6-9, 14-15; 6:3-8).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3:6-9).
놀라운 말씀이죠. 하나님이 구원의 행동을 개시하시는 결정적 동기는 다름이 아니라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생각을 한 것도,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2:23-24; 6:5). 모세가 어떤 영웅적 행동을 하거나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오히려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나이가 여든 살이었으니, 이미 모세에게서 이집트 사람을 죽이던 때의 혈기왕성함은 사라진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나이에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죠. 이런 사실은, 하나님이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여러 번 할 수 없다고 한 데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물음을 제기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내버려두다가 꼭 그렇게 부르짖을 때에야 행동을 개시하시느냐고. 뿐만 아니라, 행동을 개시한 다음에도 즉시 바로 왕을 격퇴하든가, 아니면 그의 마음을 움직여서 출애굽을 허락하게 하지 않고, 어찌하여 모세가 열 번씩이나 바로를 찾아가 기적을 일으키며 대결하게 하는가. 심지어 하나님이 일부러 바로로 하여금 고집을 부리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4:21; 7:3)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얻은 해방과 자유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면서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싸워서 획득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도 당하기 전에 미리 역사에 개입하셔서 출애굽을 시켜주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라는 개념을 미리 정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주입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시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성서에서는 선후관계가 아니라 동시적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속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 하늘에까지 다다를 때,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이고, 모세도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의 현장에서, 그 고통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스스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모세가 무슨 유일신 사상을 창시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6:2-3).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새롭게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그런 고난을 겪기 전에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으로 고백하였어요.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의 압제 속에서 고난 받는 가운데 부르짖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을 부르는 고유명사로서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는 의미입니다(3:14-15). 이것은 흔히 ‘나는 스스로 있는 자(自存者)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번역입니다. 이런 번역은, 히브리 성서를 헬라어로 옮길 때, 신을 ‘존재 자체’로 보는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이름은 어떤 존재를 설명하거나 이름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지만, 하나님은 실제로는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은 이런 행동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볼 때, 어찌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고백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바로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해주지 않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도 많이 하였습니다. 바로 왕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들을 구해 주지도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냐고 항변도 하였습니다. 그런 항변과 부르짖음이 하늘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에 대한 물음이 바로 새로운 답을 가져다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들은 가만히 있는데 기적을 펑펑 일으키는 분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있는 나’로 인식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이 필요에 따라서 요구하고 조종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구원의 행동을 하시는 주체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나’라면 그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은, 이집트 왕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종들이 아니라, ‘스스로 서는 사람들’이어야 함을 인식한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그들의 고난을 그저 감내하거나, 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원망하지 않고, 그들을 스스로 서게 하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즉시 구해 주지 않고,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고 고집스럽게 만들어가면서까지 그들을 고생을 시킬 때도,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을 훈련시키고 기르기 위해 바로 왕까지도 쓰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난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하고, 사막에서 어떤 고생을 할지라도 절대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새로운 인식과 믿음이 출애굽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억압받는 광경을 보시고 분노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이 준비가 되기까지는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리하여 히브리 노예들을 체념과 굴종 속에 쓰러지게 놔두지 않고 스스로 서게 하시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3:18)가 계셨기에 출애굽은 가능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3천 2백여 년 전에 출애굽을 이룩해 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꽁꽁 얼어붙는 호수위로 온 몸을 던져 얼음을 깬 한 밤의 청둥오리들을 연상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출 애급 입니다. 노예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변화는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이렇게 쟁취해야 빛나는 것입니다. 신문의 칼럼에 나오는 글의 마지막 구절엔 매운탕 집 남자의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짐승이나 사람이나 산다는 게 만만치 않답니다.”
여러분!
우리교회도 지난 50년의 교회 역사를 뒤로 하고 새 길을 가야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모세처럼 주저거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자기 몸을 던져 얼어붙는 호수를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새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기 몸을 던져 얼어붙는 호수를 깰 자유의 의지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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