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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혼자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2960 추천 수 0 2012.01.14 22: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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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4:23‐31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nosuchjesus.com 

기도는 혼자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강해(21)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구속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3‐31)



기도는 능력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공회로부터 무슨 내용을 전해도 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만은 하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제 동료들에게 와서 경과보고를 한 후에 함께 합심해서 기도하는 장면이다. 성경은 빌기를 다하니 모인 곳이 진동하고 성령이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주에 성령 충만한 결과가 꼭 기적적이고 몸이 떨리는 식이 아니라 오히려 주로 상식적인 일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물론 대개 그렇다는 뜻이지 초자연적 모습을 완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본문의 경우와 같이 성도들이 합심해 기도하는 곳이 진동하고 또 각자 몸이 떨릴 정도로 내면의 충만함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가장 먼저 알 것은 그분은 인격적이기에 신자와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서 교제 하신다는 사실이다. 인격 대 인격의 교제란 쉽게 말해 인간의 지정의 영역 안으로 그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이입(移入) 전달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이 신자에게 명철한 지혜를 허용할 때는 신자의 지성 부분을 자극한 것이며, 본문의 경우는 감정의 충만함과 함께 의지적 결단도 함께 불러일으킨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이 신자에게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작용될지는 오직 그분의 재량에 달렸다. 신자가 성령의 감화 내지 능력을 특정 방식과 때에 받고 싶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11).”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또 한 신자에게도 경우에 따라 다 다르게 나타나는 법이다.  

문제는 이런 성경기사를 대하는 대부분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인 곳이 진동하다니? 이런 황당무계한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도무지 믿을 수 없어!”라고 하는 불신자들의 반응이 첫째다. 또 다른 반응은 “합심으로 기도하니까 역시 기적 같은 큰 일이 일어나네. 우리도 믿음으로 합심 기도를 열심히 해야지!”인데 아주 많은 신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전자는 오직 인간의 이성에만 판단 기준을 두었기에 스스로 체험하지 못했거나 과학적으로 믿기지 않는 것은 무조건 부정하려는 태도다. 불신자들에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하나님의 이적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말로써 설득해 믿게 하기는 힘들다 못해 거의 불가능하다. 설득하는 자나 받아들이는 자나 어지간해선 인간 이성의 고착된 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자의 그런 반응에 대해 신자 쪽에서 구태여 반발, 논쟁,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땅이 진동했던 기적은 2,000년 전에 분명히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얼마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영적 무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큰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대신에 신자는 신기한 기적의 체험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놀랍고도 오묘한 권능 가운데 이미 붙잡혀 있음을 감사하고 그분과 교제 동행만 하면 된다. 신자에게 기적이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우주의 주인과 개인적, 인격적으로 항상 교통하는 것부터 사실은 너무나 큰 기적이라는 것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의 신자들의 반응이다. 합심기도만 하면 무조건 기적이 일어난다고 또는 일어나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런 신자들은 본문도 거두절미하고 24절의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와 31절에서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라는 구절에만 초점을 맞추어 본다.

물론 신자가 땅에서 매면 땅만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즉, 영계에서도 진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기도로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이유가 무조건 합심해서 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합심기도만 하면 능력이 나타난다면 기도라는 형식 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을 불러오는 수단이 된다. 기도하는 신자는 이미 엄청난 능력을 소지한 셈인 반면에 하나님은 신자가 호출만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종으로 전락한다. 하나님 그분이 능력의 원천이자, 능력 그 자체다.  

하나님은 신자가 기도했다고 다 응답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직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당신의 일을 이뤄나가되 그 일을 위해 신자를 보호 인도하신다. 신자가 도저히 연약하고 무능하며 어리석다는 진정한 고백과 함께 자기 소원을 빌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향한 당신만의 역사를 그 소원을 통해서 혹은 별개로 시작하신다. 기도는 신자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통로일 뿐이다. 더 정확히는 그 역사에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준비요 실천이며, 나아가 현재 잘 실현하고 있는지 수시로 점검하는 방식이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최초의 분리

사도들이 유대인임에도 유대공회에서 시달림을 받았듯이 기독교가 최초로 핍박받기 시작한 것은 유대교로부터다. 또 그런 핍박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핍박 초기부터 종교 조직, 체계, 관습이 당장에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같은 민족으로 유일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동일한 신앙의 뿌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신앙 내용이나 형식에서 상당 부분이 서로 겹쳐 있었기에 현실적으로 단번에 달라지기도 어려웠다.  

이 두 종교의 분리는 교권의 주도권 다툼이나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 내지 감정 대립이 발단 된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끼리는 도저히 서로 융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호와 신앙이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출발한 자들이라 서로 간에 이질감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갈수록 신앙의 대상과 내용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다름을 실감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분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꿔 말해 그 분리는 신자들이 의식적으로 시도하지 않은 가운데 서서히 일어났다. 기독교 신자들은 동족을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도하려고 무척 노력했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너무나 확신했고 또 구약을 믿는 모든 유대인들도 메시아를 대망하므로 복음을 제대로만 전하면 그 은혜 가운데로 들어오리라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대교에서 교인을 뺏어오거나 그 체계가 잘못되었으니 무너뜨리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이 순수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본문은 그 대표적인 경우로 특별히 사도들이 미처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기도하는 내용과 형식에서 그런 분리가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유대교식 기도와 기독교식 기도가 본격적으로 다른 모습과 내용을 띄게 된 것이다. 단순히 신앙적 열심과 정성의 양과 경건을 나타내는 형식에서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유대교식 기도란 종교적, 제의적, 의식적인 기도였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배에서 항상 공중이 합심해서 기도하는 형태를 취했다. 요즘 주일 예배의 한 순서로 시행하는 성시교독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미리 준비된 기도문이 있고 인도자가 선창으로 낭송하면 그대로 따라하거나, 아멘으로 화답하거나, 번갈아서 그 다음 부분을 읽는 형식이었다. 당연히 모든 회중이 드리는 기도 내용이 같았다. 동일한 기도 제목을 놓고 각자가 성령의 인도대로 다르게 기도하는 현대 교회의 통성이나 합심 기도와는 달랐다. 한마디로 유대교식 기도는 기도문을 다 함께 낭독하는 셈이다.

본문 24절에서 일심으로 기도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식으로 기도문을 낭독했다는 뜻이다.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라는 구절에서 ‘소리’의 원어는 단수명사로 표현되어 있다. 사람은 여럿이되 동일한 내용을 똑 같이 복창했다는 뜻이다. 그런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기도한 내용인 24절부터 26절까지가 시편 2:1‐2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사도들도 유대교의 기도 형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대로 따라했던 것이다.  

일심, 통성, 교독, 묵상, 낭독 어떤 형식으로 기도했던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했으면 그만이라고 치부할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유대교식인지 기독교식인지 구태여 구별하는 까닭은 그 형식보다는 기도하는 내용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차이가 상당하기에 분명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기도의 내용은 크게 3가지로 대별되는데 반드시 그 세 가지가 다 들어가야만 한다. 가장 먼저 “만유의 주재시여!” 혹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여!”라고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를 불러야 한다. 그 다음에는 대적이 자기들을 위협하고 있는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아뢰는 것이 기도의 주 내용으로 따라오고,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시편2편을 인용한 사도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자.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24-26절) (밑줄 친 부분이 시편2:1,2절임) 먼저 하나님 성호를 부르고 현재 사도들이 당하고 있는 위협을 시편을 인용해 아뢰었다. 유대교 형식대로 기도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다 26절 후반부와 27절부터 갑자기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시편을 그대로 인용하려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며”가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도들이 임의로 변경한 내용이 따라 나온다.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시편에서 기름 부은 자 즉, 메시아를 예언한 부분에 예수를 대입하였다.

또 그 이후도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라고 시편과 관계없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예수를 메시아라고는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유대교식 일심 기도로 시작했다가 자의(自意)로 하는 기독교식 기도로, 선창자와 회중 중에 누가 먼저 그랬는지 불명하지만, 바뀐 셈이다.

참으로 흥미와 관심을 끄는 성경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전후 사정을 정말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의 재판정에서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오히려 그들을 당당하게 야단쳤다. 그러나 과연 그가 끝까지 그렇게 배포 크게 나갈 수 있었을까? 한 편으로는 자기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겁도 나기 시작했지 않겠는가?

위대한 사도 베드로를, 그것도 성령의 권능을 입었는데 그렇게 얕봐선 안 된다는 반발이 생기는가? 그렇지 않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성령의 권능을 입었다고 시종일관 슈퍼맨으로 바뀌어있는 것은 아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본문의 사도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승리를 혼자서 일궈낸 엘리야도 그 직후에 자살하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 핍박하는 대적을 두려워하며 절망에 빠졌지 않는가?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했던 비겁하고 치사했던 모습은 베드로에게서 분명 사라졌다. 대신에 제사장들을 따끔하게 충고하고 왔다. 분명 스스로 자기를 봐도 너무 신기해 성령님의 권능에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 편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만약 계속해서 권능에 사로 잡혀 있었다면 돌아와서 동료들에게 제일 먼저 무슨 이야기를 해야 이치에 맞는가? 자기 한 일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영광을 돌려야 바른 순서 아니겠는가? 그런데 무엇부터 이야기했는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먼저 고했다. 나름대로 걱정했고, 최소한 신경이 쓰였다는 뜻이다. 전혀 염려하지 않았다면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부터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동안 익숙했던 유대교식으로 일심으로 시편을 낭독하며 하나님께 소리 높여 도우심을 구했다. 그런데 선창(先唱)한 사도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시편 예언을 따라 읽다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라는 구절에 이르러선 불현듯 성령의 깨우침을 받았다. “아! 맞습니다. 다윗이 예언하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군요.”라고 무릎을 친 것이다.

“과연”이란 단어로 27절이 시작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은 시편을 함께 낭독할 때나, 속에서 나오는 대로 스스로 기도할 때나 쉽게 등장할만한 단어가 아니다. 그 단어는 순간적으로 뭔가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거나, 이미 그렇게 깨달은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는 의미이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가 분명한 까닭은 빌라도나 헤롯 같은 세상 군왕과 제사장 같은 관원들이 함께 힘을 모아 그를 대적한 사실만 보아도 ‘과연’ 성경 예언 그대로 이뤄졌으니 절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한 목소리로 시편을 낭독하는 유대교식 기도가 순간적으로 기독교식 기도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다. 단지 기도 형식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대로 유대교와 기독교가 신앙 내용적으로도 분리되는 최초의 과정이다. 다른 말로 정해진 기도문을 낭독하는 형식적 기도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속에서 나오는 대로 기도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데서부터 두 종교의 분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 분리는 기독교 사도나 유대교 제사장들이 계획하기는커녕 전혀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성령님이  선도했다. 사도들이 동족이라는 인간적 정의(情誼)에 묶여 유대교와의 분리를 망설이는 사이에, 아니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개입하셨던 것이다. 오로지 십자가 복음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만천하에 드러내시기 위해서였다.      

핍박을 더 받게 해달라는 기도.

그런데 사도들의 기도에서 정작 살펴볼 중요한 사항은 아직 더 있다. 군왕과 관원들이 기름 부은 자, 예수를 대적했듯이 이제 그 제자들도 대적하기 시작했다. 사도들로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교 식의 일심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기도의 방향이 바뀌었다.  

일심으로 낭독하는 기도의 형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거기다 기도의 내용까지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유대교식 기도였다면. “이 위협에서 구원하시고 대적을 보수하시고 우리를 신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두 번째 내용이 반드시 따라 나와야 했다. 그런데 그런 간구는 사라지고 오히려 그 반대 되는 내용의 기도를 했다.

사도들이 무엇을 기도했는가? “종들로 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더 전하게 해달라고 했다. 혹시 “위협함을 하감하시고”(29절)를 도와달라는 내용으로 오해할지 모르지만, 여기서 ‘하감’은 위협을 낮추고 감해달라는(下減)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아래를 감찰하신다는(下鑑) 뜻이다.

예수의 이름조차 들먹이지 말라고 위협을 받고 온 직후라 겁이 나서 함께 합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럼 대적의 위협에서 구원해 달라는 내용이 응당 따라 나와야 하는데도 오히려 그 이름을 더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위협과 핍박을 더 받게 해 달라고 간구한 셈이다. 비유컨대 아예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겠다는 작정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기사를 일으켜서 대적을 무찔러 달라는 기도도 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는데 도움만 되게 해달라고 했다.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예수의 이름은 더 증거 되는 반면에 자기들을 향한 핍박과 위협은 자연히 더 늘어날 것이 너무나 빤한 데도 말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해 이런 기도를 한 것이다. “우리를 더 핍박받게 하소서. 더 많은 위협과 환난 속에 들게 하소서.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어떤 고통을 받고 또 죽어도 좋습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 들어나게 하시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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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신자는 어려운 형편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자연히 가장 먼저 혹은 주로 그런 기도가 나오게 마련이다. 나아가 자기가 소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그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려 있다. 말하자면 그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려면 자신을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순응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 무슨 사건을 만나도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잠잠히 있겠다는 숙명론적 믿음을 가지라는 뜻은 아니다. 그분의 뜻과 계획에 순응해야 한다. 즉 이 땅에 십자가 복음이 편만이 전해져서 당신의 거룩한 통치가 확장되는 일에 순응해야 한다. 다른 말로 신자가 자신의 인간적 욕심과 뜻은 죽이는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기독교의 분리가 시작된 초점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의 선택받은 민족의 구원과 풍요만  기도하는 데서 이제는 자기들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뜻만 드러나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뀐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간절히 드렸던 기도 그대로다. 또 이런 기도를 하니까, 단순히 함께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인 곳이 진동하며 성령이 충만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즉각적 응답을 받은 것이다.

또 다른 오해는 말아야 한다. 모인 곳이 진동하는 것 자체는 응답이 아니다. 사도들이 실제로 간구한 내용이 복음을 더 전하게 즉, 핍박을 더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기도한 대로 사도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전하게 하였고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더 행하게 했다. 본문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절)고 결론짓고 있지 않는가?

이어지는 33절에서도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라고 했다. 많은 불신자들이 부활의 증거를 믿게 되어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그들이 변화되어 가진 것을 나눠쓰므로 핍절한 사람이 없어졌다고 했다.(34,35절).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인생이 거룩하게 바뀌고 또 그런 자들로 인해 사회도 의로운 영향을 받아 깨끗해진 것이다.

그에 비해 오늘날 우리 중 대부분은 스스로 큰 권능을 입는 것과 땅이 진동하는 것에만 주된 관심을 쏟는다. 땅이 진동한 까닭은 사도들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을 더 견고케 하고 또 그분의 생전 약속대로 지금도 자기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들로 세상에 나가 더욱 담대하게 살아계신 영원한 메시아를 증거케 하려는 뜻이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먼저 혹은 동시에 강림하자 그 모인 곳도 함께 진동했을 뿐이다. 땅이 혼자 진동해봐야 나이트클럽의 춤꾼이나 지진대비물품을 파는 장사들만 신날뿐 신자에겐 아무짝에도 소용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그런 일만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큰일이다.

성령이 시키는 기도

기독교 신자의 기도는 유대교뿐 아니라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의 기도와도 달라야 한다.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꼭 구해야 할 것만 구해야 한다.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단순히 고상한 내용을 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이웃을 돕고 사회를 선하게 변화시키는 기도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종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자주 하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모든 종교와 정작 달라야 할 또 다른 요소가 있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사도들이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부터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증거하게 해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도 분명 겁을 먹고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기도를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기도를 하는 중에 미처 의도하지 않았던 기도로 바뀐 것이다. 무슨 뜻인가? 후반부의 기도는 자기들이 의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신자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신자가 방언 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의식이 분명한 가운데 신자 혼자서 기도하지만 정말 온전한 기도가 되려면 반드시 성령님과 둘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간접적으로는 기도를 방해하는 세력을 막아주고, 직접적으로는 기도제목과 간구하는 내용까지 신자에게 생각나게 하셔서 이끄신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성령의 간섭으로 기도를 하니까 기도 중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응답에 대한 확신도 생긴다. 기도 중이라는 것은 아직 현실적으로 응답이 실현된 것 하나 없음에도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기도 하면서 불안 염려가 사라지고 자신의 영혼에 평강과 위로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자연히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려는 온전한 결단과 헌신이 따라오게 된다.  

솔직히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자신의 의식으로는 핍박을 더 받고 나아가 순교해도 좋다는 기도는 쉽게 할 수 없다. 간단히 가정해보라. 지금도 만약 공산주의나 우상 숭배 국가가 기독교 신자의 생명을 위협하며 핍박한다고 치면 신자가 어떤 기도부터 하겠는가? 가장 먼저 그런 위협에서 지켜달라고 할 것이다. 거기까지가 인간 신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기도다. 그러나 그런 기도를 간절히 하는 가운데 어느 듯 죽으면 죽으리라는 굳건한 각오가 생기고 심지어 자기를 순교 현장으로 보내주어서 더 활발히 사역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성령님이 시키는 기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헌신된 신자를 억지로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든 자는 사나 죽으나 오직 그분의 향기를 드러내기를 스스로 자원, 소망, 나아가 열망하게 된다. 하늘의 보배를 이 땅에 심는 일에 헌신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천국을 바라보고 살기에 생명마저 복음의 확장을 위해 기꺼이 던질 수 있다. 성령의 강권적 인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자의 온전한 헌신이 먼저 내지는 동시에 생긴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 신자가 기도할 때에는 성령님만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성자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서 신자를 위해 성부 하나님께 중보 하신다. 또 성부 하나님은 그 기도를 접한 순간 비로소 당신의 거룩한 역사를 시작하신다. 기도 당사자가 실은 네 사람인 셈이다. 천하의 대 주재로 살아계신 성삼위일체께서 신자더러 기도를 하게하고, 기도의 내용을 간섭하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도 알게 하고, 마지막으로 응답까지 하시는 것이다.

결국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겠다는 순전하고도 겸비한 자세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내용마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기도하게끔 해주신다. 물론 신자 본인은 구체적으로 그분의 뜻을 모를 수도 많으나, 최소한 그분의 뜻이라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든 헌신하겠다는 결단만은 따라온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 많이 증거 하게 해달라는 사도들의 기도가 따지고 보면 자신들이 더 헌신하겠다는 결단의 고백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떤 형식의 기도를 하고 있는가?

그럼 이제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어떠한지 정말 솔직하게 점검해보자. 대개가 그저 무엇을 주시고, 어떤 위험에서 구해주시고, 소원하고 계획하는 것 다 이루어 달라고 빌고 또 비는 수준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마침 말 말고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종교의 기도와 하나 다를 바 없다. 간혹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봐야 “저 사람이 하는 짓이 얼마나 나쁜지 알지 못하니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정도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흉내 내는 양 하지만 내면으로는 상대를 이미 판단하고 정죄한 셈이다.

본문의 사도들처럼 “지금 세상에서 당하는 이 고난과 핍박이 참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한 때문이기에 오히려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과연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않은 것 아닌가? 그런 기도도 할 수 있다는, 아니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바꿔 말해 예수 믿으면 당연히 모든 환난과 고통에서 해결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자꾸만 위험에서 구해 달라, 문제 해결해 달라, 소원을 이뤄 달라는 기도만 하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때로는 주님의 일을 하게 해달라고, 신자 된 의무감에서든 진심으로든,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빤히 보이는 위험과 핍박을 무릅쓰고, 아니 그 정도는 아니라도 자신의 시간이나 물질에 손해보고 희생하는 일인 줄 미리 알고도 자원하겠다고 기도한 적이 있는가? 시간과 여유가 허락하면 교회 봉사를 하겠다고만 하지 않는가? 또 그럴 수 있도록 시간과 여유를 채워 달라는, 사실은 현실적으로 축복해 달라는 내용이지만, 기도는 자주 했어도 말이다.

혹시라도 예수 믿은 지 오래이며 교회 중직을 맡은 자일수록 “제가 주님의 일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기도, 헌금, 구제, 봉사, 전도에 누구 못지않게 제일 열심이었는데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주님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기도만 많이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상 어느 누구도 고통을 더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져 그런 기도를 해선 안 되고 또 사도들을 본받아 의식적으로 하라는 뜻도 아니다. 정말 평소부터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거룩하게 살고 있기에 사람들로 예수를 믿고 싶은 영적 찔림이 들게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그 반대로 조롱과 비방과 멸시를 받고 있어야 한다.

또 기도는 절대 혼자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간구해야 한다. 기도하는 중에나 끝난 후에도 항상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지정의로 기도하고 있더라도 내면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미세한 음성에 민감해야 하고 가능하면 기도하는 전 과정을 그분의 인도하심에 내어맡겨야 한다. 그러면 비록 처음에는 알게 모르게 자기의 헛된 바람이나 심지어 탐욕에 물든 기도를 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성령님이 바로 잡아주신다.

이처럼 신자가 온전한 믿음으로 진정으로 하는 기도에는 성령이 항상 함께 하고 심지어 그 기도를 주도한다는 면에서 기독교의 기도가 유대교를 비롯한 다른 모든 종교의 기도와는 확연히 다르다.  다른 말로 기독교의 기도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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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령이 주도하는 기도란 신자만을 살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신자를 예수의 일꾼으로 들어 쓰셔서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기도다. 물론 그 일에 신자가 기꺼이 헌신하고 있으면 당연히 모든 고통과 환난과 핍박에서 반드시 구해 주신다. 그에 소요되는 물질과 사람과 능력을 채워주시며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은혜를 넘치도록 맛보게 해주신다. 신자가 당신의 일에 성실하게 헌신했으니 보상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를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세상 앞에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신자란 성령님의 기도에 초대받은 자다. 예수의 복음으로 남의 영혼을 살리고 그 인생을 변화시키는 일에 동역자로 부름 받은 자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리고 기도란 그 일을 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아니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한 대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의 일이 술술 이뤄진다는 뜻은 아니다. 신자의 진정한 기도를 매개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시작하시고 진행하시어 열매 맺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란 오히려 하나님이 신자를 당신의 일에 초대하는 것이다. 신자 쪽에선 그분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자칫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다른 말로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겠다는 헌신 없이, 하는 기도는 단지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그칠 뿐이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기도의 내용을 바꾸어 보라. 조심해야 할 것은 단순히 기도의 내용만 바꾸면 그 자체도 형식이 된다. 그 이전에 정말로 십자가로 구원 받은 뜻이 무엇인지 점검하여 그 은혜 안에 담대하게 서있어야 한다. 바울처럼 평생을 사나 죽으나 자기를 대신해 죽은 그분을 위해서 살겠다는 헌신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며 또 기도도 어떤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으로 바뀔 것 아닌가? 최소한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기도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도 정말 그 일이 끝나 당신의 영광이 드러날 때까지는 세상으로 신자의 머리터럭 하나도 다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실 것이다.

요컨대 우리 모두가 기독교식의 기도라도 제대로 할 줄 알면 얼마든지 베드로 같은 위대한 사도로 변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럴만한 진정한 의사가 있느냐, 또 준비가 되어 있느냐 뿐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형식의 기도를 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만 마지막에 붙이면 기독교식의 기도를 했기에 복 받으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20/2009
유타대학촌교회 8/4/1996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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