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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18세기 말경에
스코틀랜드에 존 글라스(John Glas)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영국인 사위를 두었는데
그의 이름은 샌디멘(Sandyman)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같이,
매우 인기가 있고 많은 영향을 끼친 가르침을 창시하였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기독교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라는 로마서 10:9의 말씀을 인용해
이것만이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말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그분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성경 역시 그렇게 말씀합니다.
감정은 쓸모없고
그 메시지만 믿고 그 진술을 표현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18세기에 매우 인기가 있었고
큰 해를 끼쳤던 샌디메니안주의입니다.
그 당시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이후에도 굉장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한 운동으로서는 사라졌지만 그 가르침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가르침은 인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진리가 전해진 후
설교자를 통해
"이 진리를 믿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간단히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조금도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라고 당신이 말하면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의 감정에 대하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의 회심에 대한 가르침의 중점은 지성적인 믿음에 있습니다.
그것에다
영적인 훈련과 성경에서 발견된 도덕적인 가르침을 더하면
당신은 선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으며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셨으므로,
그분을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체험이 없어도
당신이 믿는다고 말하면 구원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가르침은 모든 확신에 관한 교리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가서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들은 확고한 확신을 가졌다는 사람들에 관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물론입니다. 당신 역시 확신을 가지셔야 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면, 그들은
"이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이리 오십시오"
하며 성경을 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이것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이 당신에게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라고 반문하면 그들은
"당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이것은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매우 흔한 가르침입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감정을 고려하는 것조차도 단념시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이며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신약성경과 성경 전체에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잇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두려움의 의식은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서 발견된 이 위대한 느낌,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이 의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현대 복음주의와 18세기 중반까지의 복음주의의 큰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신학적으로는 서로 다른 점들이 있었음에도
이 점이 바로 현시대와
종교 개혁, 청교도 그리고 초창기 감리교 때와의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경건한 의식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습니까?
경이와 놀람,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에 대한 느낌은 어디로 갔습니까?
사람들이 모세나 다윗
또는 다른 사람들이 소유했던 이 놀라운 경험들을 찾지 않는 이유는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차갑고 이성적인 믿음주의(believism)을 가르치지 않고
전인격이 관련되는 경험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또한 가르칩니다.
성경은 이 경험을
어떤 한 시대나 일정한 종류의 사람들
또는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신앙은 완전히 확신하며 설복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확실한 것입니다.
신앙은 무서움을 없애기 위해서 어두움 속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완전히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저는 이 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는 성경의 몇몇 진술들을
제시하여야 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에 관해서 단지 이 진술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에 관한 전형적(典型的)인 진술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입증이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는 하나의 증거적인 효능과 요소가 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한다면,
믿음이란 확실한 보증이 있는 권리증서(부동산)
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믿음을 희미하고 불확실하며 불투명한 또는 애매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하면서 바울은
신앙이란 실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히브리서 11:13에서 그 점을 되풀이 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이 말씀이 뜻하는 전체 의미는
믿음에는 확신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점을 여기 로마서 4장에서 대하게 됩니다.
이 점이 신앙을 단순한 지적인 믿음(인정)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을 소위 신앙주의와 구분해 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소위 샌디메니안 주의라는 이단이
18세기에 교회를 괴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샌디메니안 주의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고 떠들어 대는 교훈입니다.
그 교훈은 모든 감정과 확신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이고 이단입니다.
참으로 믿고 중생한 사람이라면
확실히 자기는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앙은 아닙니다.
믿음은 확신이라는 또 다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앎입니다.
우리는 지식의 요소를 믿음으로부터 박탈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히 (설복되어) 확신하는 것입니다.
...
믿음은 지각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가슴속에서 전인적으로 일어납니다.
그(아브라함)는 완전히 확신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참되고 본질적인 신앙의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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